시간과 이해의 감옥에서 바라본 우리의 현주소

aka. 아무말

by Outis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시간은 흐르지 않으며, 모든 것은 이미 이루어졌고, 동시에 존재한다."


양자역학의 발전 및 최근 음의 시간의 발견과 더불어 창작계에서 더욱 각광받는 발상이다. 이러한 주제로 만들어진 영화로 <테넷>과 <컨택트>가 있으며, 둘 다 자유의지와 선택에 대한 여지는 열어두었으나 '결국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는 결정론적 관점을 고수한다.



해가 지평선에서 떠올라 하늘 중천까지 올랐다가 점점 떨어져 다시 지평선으로 사라지면 달과 별이 뜨고 밤이 찾아온다.

인간은 응애하고 태어나 점점 자라다가 어느 순간 성장을 멈추고 늙어가며 끝내 죽는다.

잘 정돈되었던 방이 엉망이 되고, 깨끗하게 청소했던 거실에 먼지가 쌓여 가고, 모처럼 열심히 세탁기를 돌려 비운 빨래통에 다시 빨랫감이 가득 찬다.

이렇듯 우리는 사물 간의 사건, 엔트로피의 변화를 통해 시간을 직관적으로 인식한다. 기억을 통해 과거를 인지하고, 그 '과거'를 기반으로 가능성을 가늠하며 '미래'를 그린다. 따라서 우리에게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이란 것이 그저 '하나의 덩어리'를 인지하는 '한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면? 거기엔 사실 딱히 무엇이 먼저고 나중인지 정하는 '서열'이 없다면?


아마 마방진 놀이를 해보신 분이 계실 것이다. 가장 기초적인 마방진의 구조는 3x3, 즉 9개의 칸으로 나누어진 정사각형이다. 각 칸에는 1부터 9까지의 숫자가 하나씩 들어가며, 가로, 세로, 대각선의 세 숫자의 합은 늘 15로 일정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시간이라는 개념은 누군가가 무한에 가까운 마방진(세계)을 읽기 위해 택한 한 방법, 가로나 세로, 대각선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어느 줄을 선택해도 결과(세계)는 같듯이, 어느 방향으로 읽어도 마찬가지인 수많은 이야기 중 하나인 셈이다.



만약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정말 그런 것이라면.





설령 그렇다 한들, 우리로서는 선뜻 이해하기가 힘들다. 기억과 예측에 너무 익숙해져서, 과거의 경험에 의존하고 미래를 바라보며 현재를 사는 우리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국어에 영 젬병이었다. 싫다고 이를 부득부득 갈았던 영어보다 국어 점수가 더 낮았다. (물론 모국어인 국어 문제와 외국어인 영어 문제는 수준이 다르다. 국어 수준으로 영어 문제가 나왔면 당연히 못 풀었을 거다.)

내가 국어를 못한 이유는 작자의 의도나 감정이 잘 읽히지 않아서였다. 비문학은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았으나, 문학만 나오면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정확히 감정은 받지 않았지만, 추측건대 경험의 부재가 가장 큰 원인이지 않나 싶다. '김장은 어느 계절에 하나요?' 같은, 아주 기본적인 상식 문제도 헷갈릴 정도로 나는 주변 세상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부족했다.


내 경우는 꽤 심했다 할 수 있겠으나, 이런 어려움을 나만 겪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학교 공부는 대부분 교실이라는 공간에 모여 책상 앞 의자에 앉아 종이에 적힌 활자와 그림을 가지고 세상을 이해하는 식이었으니까.

모자란 경험은 상상으로 메꾸어야 했으나 정작 상상력을 키울 시간이 많지 않았고, 새로운 지식을 쌓기 위한 기존 지식의 지반은 대부분 암기로 이루어져 매우 약했다.


학교에서 졸업해도 시험은 끝나지 않는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생소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린 가장 비슷하거나 관련 있는 경험을 끄집어내어 사회가 기대하는 반응과 대처를 보여야 한다. 결과는 스무드하게 잘 넘어가든지, 아니면 이불킥 유발인자가 되든지 둘 중 하나일 텐데, 이는 인간 사회에는 '정답'이라 간주되는 범주가 있다는 뜻이다.


비슷한 자극에 대해 사회는 구성원들이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반응을 보이기를 기대한다. 불안정한 변수를 줄여 감시와 대응에 소요되는 에너지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이는 조직의 입장에서는 매우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시스템이며, 개개인에게도 안정이라는 이득을 가져올 수 있다.


상식. 지극히 바람직하게 들리는 이것이 지상에 발을 딛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폭력이 수반된다.


언젠가 본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한 원숭이 무리가 나왔다. (이름은 잊어버렸다. 암기란 그런 것이다.) 이 원숭이들은 마치 사람이 아양 떠는 것처럼 우두머리에게 최선을 다해 웃어 보인다. 그들에게 웃는 얼굴은 곧 복종의 표현이다. 우두머리에게 웃지 않는다? 바로 응징에 들어간다. 이것이 그들의 '상식'이었다.

이미 경험을 통해 배운 어른들은 괜찮지만, 문제는 아이들이다. 미처 배우지 못한 어린 원숭이가 우두머리에게 웃지 않았다가 맞아서 죽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눈치껏 웃으면 살고, 아니면 죽는 것이다.

충분히 균질한 사회를 위해, 질서의 유지를 위해, 모난 돌은 정을 맞는다.


이해와 공감도 알고 보면 가식적이다. 실제로 누군가의 생각이나 기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들 그게 가능하다고 믿을 뿐이지, 사실 우리는 '내가 생각하는' 그의 생각과 마음에 '나를 넣어 보는' 것이다. 지극히 행위자 중심의 작업인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노력한다.


상대의 감정에 공감하려 노력하고

세상의 이치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 노력의 근간은 생존, 즉 개체의 유지를 위해서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놀랍게도 이어짐을 경험한다.


마음과 마음의 이어짐을 느끼고, 받아들이고 받아들여짐을 느끼며,

세상에 대해 보다 잘 알고 더 가까워진 기분을 느낀다.

설령 그것이 망상에 지나지 않더라도.



만약 우리가 이것을 '좋다'고 여긴다면.





누군가가 우연히도 '시간'의 흐름이라는 방식으로 읽어 나가는 이야기 속의 우리는

현재, '사랑'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더블윤 작가님의 최근 글을 읽고 뽝! 떠오른 아무말을 끄적여 보았습니다. (아~~무 의미 없으~!)


두서없고 정신없는 제 글과 달리 작가님의 글은 매우 논리 정연하고 감동적입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강력히 추천드립니다.


https://brunch.co.kr/@6121f01a108340c/289

https://brunch.co.kr/@6121f01a108340c/290



예? SF를 좋아하신다고요? 스타워즈 팬이시라고요? 밀리터리 덕후??

작가님의 소설 '가장 찬란한 나의 별'에 입덕하실 시간입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myshiningstar


순전히 팬심으로, 무려 작가님의 허락도 안 받고 하는 짓임을 알려드립니다. (트롤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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