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유전자의 이기주의에 대해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그가 말한 유전자의 이기주의란, 자연선택의 핵심 단위는 개체가 아니라 유전자이며, 더 많이 복제되는 유전자가 살아남는다는 관점을 뜻한다.
즉, 여기서 말하는 ‘이기주의’를 도덕적 관념에서의 ‘이기주의’나 ‘이타주의’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가 말한 유전자의 이기적 행동이란, 유전자가 욕심을 낸다거나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유전자가 자신의 복제 결과를 기준으로 선택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어떤 행동이 개체에게는 손해처럼 보이더라도, 그 행동이 해당 유전자의 전체 복제량을 늘린다면 그 유전자는 ‘이기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부 동물들의 ‘경보 행동’을 살펴보자. 지구상의 수많은 땅다람쥐들은 포식자를 발견하면 큰 소리로 경보를 울린다. 이는 단일 개체의 수준에서 보면 분명히 이타적인 행동이며, 집단을 위한 결정처럼 보인다. 소리를 낸 개체는 포식자에게 자신의 위치를 노출하게 되고, 그 결과 포식자에게 죽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개체 수준에서는 명백한 손해인 셈이다.
하지만 이를 유전자 수준에서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땅다람쥐의 집단 내에는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형제·자식·친족이 다수 존재한다. 따라서 경보로 인해 이들이 도망쳐 살아남는다면,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지닌 개체들이 더 많이 보존될 수 있다. 즉, 개체에게는 분명한 손해이지만, 유전자의 관점에서는 명백한 성공이 된다.
리처드 도킨스의 관점에 따르면 자연선택은 유전자 수준에서 이루어지며, 위와 같은 사례들처럼 유전자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살아남았다. 그렇기 때문에 유전자는 한 번도 ‘이타적’ 선택을 한 적이 없었고, 그 결과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유전자는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인지하거나 의도, 의식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개체 안에서 ‘이타적’으로 보이는 ‘이기적’ 선택을 가능하게 만들었을까?
이 지점은 유전자가 개체를 향해 행사한 ‘명령’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유전자는 ‘누가 내 친족인지’를 알지 못한다. 유전자는 의식도, 인식 능력도 없기 때문에 “저 개체는 나와 50%의 유전자를 공유한다”와 같은 계산을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계의 수많은 동물에게서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이 진화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연환경 속에서 혈연과 높은 상관관계를 지닌 행동 규칙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연선택이 선호한 것은 “저 개체는 내 형제이니 도와라”라는 명령이 아니라, “어릴 때부터 같은 둥지, 같은 보호자, 같은 냄새를 공유한 개체를 도와라”라는 행동 규칙이었다. 유전자가 개체에게 부여한 명령은 바로 이러한 규칙이었으며, 이 규칙은 대부분의 진화 환경에서 혈연과 거의 일치했다.
다시 말해, 유전자는 자신의 유전자를 직접 식별하지는 못하지만, 그와 높은 확률로 연결되는 행동 규칙을 개체 안에 심어 둠으로써 자신의 복제를 보호해 온 셈이다.
이러한 유전자의 행동양식은 우리에게 다소 불편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윤리와 도덕적 판단이 인간의 의식적인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유전자에 애초부터 기록되어 있던 행동양식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의 견해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그 사실을 불편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아니, 어쩌면 더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리처드 도킨스의 말처럼, 이전 글에서 개체란 유전자의 생존 기계라고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생명이라는 존재는, 마치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중 하나인 피지컬 AI와 닮아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우리의 사고 회로와 각종 알고리즘의 설계자는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더 위대한 존재라는 점이다.
자연계 속 생명체의 가장 큰 목적은 ‘생(生)’ 그 자체에 있었다. 개체의 생존, 종의 영속성, 혹은 유전자의 영생(자기 복제를 통한). 생명체는 이 목적을 끊임없이 수행해 가며, 자신들이 지닌 유전자 코드를 최적의 형태로 변형시켜 왔다.
그리고 그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이며, 우리가 지니고 있는 유전자다.
또다시 수많은 시간이 흐른다면, 우리가 가진 유전자 코드 역시 또 다른 형태로 진화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의 환경 안에서는, 가장 정교하고 합리적이며 최적화된 유전자를 우리가 지니고 있는 셈이다.
생존이라는 개념에 ‘경쟁’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듯, 생존을 위한 유전자의 진화 또한 수많은 경쟁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도 유전자의 이기적인 생존 경쟁 속에서, 그 코드 안에 개체를 향한 이타주의라는 명령어가 함께 주입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현재의 피지컬 AI는 인간이 직접 프로그래밍해야 한다. 학습하는 AI라 할지라도, 아직까지는 인간의 개입 없이는 잘못된 방향으로 학습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유전자의 생존 기계가 지닌 LI(Life Intelligence, AI와의 구분을 위해 임의로 도입한 개념)는 이와 다르다. 자연이 설계한 이 LI는 세상의 공기를 처음 들이마시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이타적인 행동을 수행할 수 있다.
물론 유전자의 이기적 선택이 항상 개체의 이타적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또한 기본적으로 자연계에 인간의 도덕적·윤리적 잣대를 그대로 들이대어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성선설 vs 성악설’의 옳고 그름보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려는 능력, 그리고 ‘선’을 행하려는 그 노력 자체가 중요하다고 말했듯, 유전자의 ‘이기적 vs 이타적’ 구분에 굳이 삶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책을 통해 자연선택의 기본 단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을 뿐, 도덕적 논쟁을 펼치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는 그의 책을 통해 인간이 지닌 특별함을 다시금 엿볼 수 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 이기적인 유전자의 산물이지만, 그 유전자의 이기성에 맞서 반항할 수 있는 존재다.”
그는 인간이 학습, 문화, 규범, 이성을 통해 유전자적 충동을 거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유전자는 우리에게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명령어를 주입해 놓았지만, 인간은 그것을 넘어 또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보아도, 저렇게 보아도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전히 희망적이다.
우리는 이타적으로 보이는 이기적 행동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성과 감성을 활용해 진정한 희생에 이르기도 한다.
당신이 지닌 이타주의는 유전자에 의해 태초부터 이어져 온 본능일 수도 있고, 학습과 문화로 다져진 의식적 행동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생명체의 삶은, 그리고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얼마나 경이로운가.
본능적으로 이타주의를 행하는 생명이, 의식적으로 타인을 위한 선택을 하는 우리가, 그리고 그러한 ‘이타주의’ 자체를 ‘선’으로 받아들이는 당신과 나는,
정말이지 경이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