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단편소설

by 더블윤


AM 10:00


기지개를 길게 켜며 느즈막한 휴일 아침을 맞는다.

창밖을 내다보는 아이들의 실망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힝… 밖에 비 와. 나가서 놀고 싶었는데."




"아빠, 밖에 비 와. 불타고 있는 비가 내려."

"창문에서 떨어져."
재빨리 막내아이의 팔을 잡아당겨 첫째에게 넘겨주었다.

대충 꾸겨 넣어 둔 가방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서둘러 문을 나서려는 순간, 가방 사이로 삐져나온 옷깃이 낡은 경첩에 걸렸다.
경첩에 걸린 천이 찢어질 듯 버둥대더니, 옷들이 바닥에 우수수 쏟아졌다.
딸아이가 허리를 굽히려 하자 나는 손바닥으로 아이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그냥 내버려 둬. 어서 엄마 따라가."




PM 01:00


배가 고파졌다.
허기를 달래듯 배를 쓰다듬으며 냉장고 문을 열어보았지만, 금세 먹을 만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여보, 먹을 거 없어?"
"냉장고 안에 어제 만든 빵 있어. 데워 먹어."

투덜거리며 차갑게 굳어버린 빵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잠시 뒤, 고소한 냄새가 방 안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빵이야. 받아 놔."
"아버지는 안 드셨잖아요."
"아빠는 배 안 고파. 네 주머니에 넣어."

어제 만들어 둔 빵을 첫째 아들의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뒤따라오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나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첫째를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엄마랑 동생 데리고 할아버지 집으로 가. 절대로 멈추지 말고, 방송국이나 공장 같이 큰 건물 있는 길은 절대 피하고. 알겠지?"

아들이 곧바로 되물었다.
"아버지는요?"

"아빠는 가야 할 데가 있어."
나는 아들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강하게 붙잡고, 단호하게 말했다.
"아빠 걱정은 하지 말고, 엄마랑 동생을 지켜. 알았지?"

그의 어깨가 떨렸다.
나는 아들의 눈 속에 담겨있는 감정을 외면해야만 했다.




PM 03:00


딱히 계획도 없는 휴일.
밖에 나갈 일도 없으니, 집 안에서의 시간은 무료하게 흘러간다.
첫째와 둘째는 숨바꼭질을 하며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방 안에서는 뛰면서 놀면 안 되지."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주의를 준 뒤 피아노 앞에 앉았다.

"첫째 피아노 연습하라고 사줬더니, 자기가 더 열심히 치네. 피아니스트라도 되시려고?"
아내가 장난 섞인 핀잔을 건넨다.

"못할 것 없지."
나는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리며 대꾸했다.

손끝에 힘을 주자, 하얀 건반이 처음엔 가볍게 버티다가 이내 ‘쑤욱’ 하고 아래로 눌렸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가죽의 저항을 뚫고 메스가 피부를 가르며 들어갔다.

"선생님! 긴급 환자예요! 출혈이 심해요!"
열려 있는 수술실 문으로 뛰어들어오며 간호사가 외쳤다.

"여기도 급해요. 곧 갈 테니 우선 응급처치부터 해주세요!"
나는 솟구치는 출혈을 클램프로 집어내며 말했다.

밖에서는 간헐적으로 소음이 들려왔다.
대기를 울리는 진동, 이어지는 폭발음.
그 소리들이 이어질 때마다 온몸이 순간적으로 움츠러들었고,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저쪽 카세트 플레이어 볼륨 좀 올려줘요."
나는 건너편의 간호사에게 말했다.

간호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수술실 한쪽 구석에 놓인 카세트 플레이어의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쇼팽의 야상곡 No.1 (B♭ minor, Op.9 No.1)이 잔잔하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PM 07:00


TV에서는 뉴스 속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요즘 계속 저것만 나오네?"
"그럴 만도 하지. 사람들 많이 죽었대."
"근데 왜 저러는 거래?"
"몰라. 원래 사이 안 좋았잖아. 핵무기 문제도 있었다고 하고."
"누가 나쁜 놈이야?"
"맞은 놈이나 때린 놈이나… 다 이유가 있었겠지."
"금이라도 사놔야 하는 거 아냐?"
"그러고 보니 내일부터 기름값도 오를지도 모르겠다."
"아 그러네. 미리 채워 넣어야겠다."
"재미없다. 다른 거 보자."
"그래."

나는 리모컨을 조작하며 조용히 덧붙였다.
"뭐가 되었든, 다 자업자득이야."




온몸을 붕대로 감은 노인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자업자득이야."
"… 뭐가요?"

내가 되묻자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게… 모두 다…"

나는 그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어쩌면 정말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선뜻 이해되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당신이나 나,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주름진 손등 위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그저 태어나 보니 이 체제 안에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뿐인데요."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이미 그의 손은 서서히, 돌이킬 수 없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PM 10:00


"이제 자자. 내일 학교 가야지. 아빠도 출근해야 하고."
나는 아이들의 등을 가볍게 밀어 침대로 향하게 했다.




"애들 자…? 응. 괜찮아. …응. 곧 끝나겠지. 군인들? 아니야, 아직. …응. 내일은 북쪽으로 이동해. 거기가 더 안전할 거야. … 아니야,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응. 그래, 잘 자… 사랑해."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선생님! 환자 또 들어왔어요! 파편상 환자가 많아요!"
복도 끝에서 간호사의 다급한 외침이 겹쳐 들려왔다.




PM 11:00


늘 그렇듯 평범한 하루였다.
어쩌면 지루하다고 여길 만큼 반복되는 하루들.
그 평범함에 작은 변화라도 생기기를 바란 채 눈을 감는다.
그러나 내일 아침이면 또다시 같은 일상이 나를 맞이하겠지.




얼굴에 피가 뒤덮인 간호사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정신 차려요. 살려야죠."
나는 그녀의 손에서 메스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하지만 점점 더 가까워지는 폭발음은 수술실의 음악 소리마저 삼켜버리고 있었다.

"여기로 폭격 떨어진대요! 모두 대피해야 해요!"
동료 의사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울렸다.

그 순간, 나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건물이 흔들리더니 천장에서 흙먼지가 비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그 폭발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평범한 하루를 바란다는 것이 그렇게도 큰 욕심이었을까.

천장을 뚫고 미사일이 내려왔다.
내일 아침의 태양을 맞이하기도 전에,
그 미사일에서 뿜어져 나온 강렬한 화염이 내 시야를 마지막처럼 환하게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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