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병원 복도에 서서 통화를 하던 여자는 급히 전화를 끊고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복도를 지나는 한 남자에게 깍듯이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선생님.”
“네, 어머님.”
여자에게 인사를 받은 30대 중반의 남자도 같이 머리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떡진 머리에 깊게 내려온 다크서클. 지난 3년간의 병원 붙박이 생활로 피로가 뼈까지 스며든 그는 이 대학병원의 2년 차 레지던트였다. 그의 왼쪽 가슴에는 휘갈겨 쓴 손글씨처럼 파랗게 그의 이름 석자가 수 놓여 있었고, 받침이 없는 나머지 이름에 비해 성씨인 황 자가 유난히 커 보였다.
“손님이 와 계신가 보네요.”
의사는 문에 달린 유리창을 통해 병실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네. 저, 우리 애는 언제쯤...”
“예, 그게...”
순간 그는 여자의 애절한 눈빛을 피해 시선을 복도 저 끝에 달린 빨간 소화기에 두었다. 그러나 이런 건 시간을 끌어봤자 절대 좋을 거 없다는 걸, 그는 그간 경험을 통해 잘 알았다.
“말씀드렸다시피 수술은 잘 끝났습니다.”
의사가 수술이 잘 되었다고 하는데 어째 여자의 낯빛은 더 어두워졌다.
“아마도 신체적 외상보단 심적인 트라우마가 더 큰 문제이지 않을까 하고, 저희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일을 겪었으니까요.”
자신들은 의료진으로서 할 일을 다했다. 집도를 하신 교수님은 물론이고, 자신을 포함한 모두 다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또 해냈다. 객관적인 이미지와 수치, 모든 검사 결과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의사로서 스스로에게 떳떳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무력감을 느꼈다. 결국 “더 이상 저희가 도와드릴 건 없습니다. 나머지는 환자에게 달렸어요”라는 건데, 과연 이 말에 쉽게 수긍할 보호자가 어디 있을까. 설령 수긍한대도 위로가 되진 못할 거다. 아니나 다를까, 서리 맞은 꽃처럼 고개를 떨구는 여자의 눈에서 뚝뚝 눈물이 떨어졌다. 의사는 차오르기 시작하는 연민을 최대한 억누르며, 의사로서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의 말을 꺼냈다.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죠.”
“황 선생님! 콜이에요!”
때마침 자신을 찾는 간호사의 부름에 그는 얼른 여자에게 목례를 하고 자리를 떴다. 다시 혼자 남겨진 여자는 고개를 들어 병실을 돌아보았다. 얼마 뒤 문이 열리고, 면회를 끝낸 중년의 남자가 병실에서 나왔다. 여자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에게 애원했다.
“선생님, 우리 아들 저렇게 만든 놈들을 반드시 처벌해 주세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자는 여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일단 긍정적인 말부터 꺼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다른 피해 사례들도 하나 둘 신고되고 있어요. 이렇게 진술이 모이는 건 좋은 일입니다. 다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던 여자는 남자가 말끝을 흐리는 걸 보고 불안함을 느꼈다.
“다만, 뭔가요?”
“가해자 중 둘이 자기들은 그저 주동자가 협박해서 시킨 대로 했을 뿐이라고 발을 빼고 있어요. 거기에 그 주동자가 심신 미약을 주장하고 나서는 바람에... 일이 조금 복잡해질지도 모릅니다.”
“심신 미약이요?”
“예. 가정폭력을 일삼는 부친에게 학대를 당해왔다고 하더군요.”
여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때 남자의 바지 주머니 속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남자는 주머니 쪽으로 손을 뻗으며 급히 여자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는 전화기를 꺼내 들고 막 몸을 돌리려다가, 그녀를 안쓰럽게 쳐다보며 한 마디 건넸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는데, 조금 쉬시죠.”
여자는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띠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뚜벅뚜벅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가 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그녀는 아들이 있는 병실로 돌아갔다.
병실에 들어간 여자는 조용히 문을 닫고 발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아들에게 다가갔다.
- 그 주동자가 심신 미약을 주장하고 나서는 바람에...
물속에 던져진 작은 돌 때문에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진흙이 흔들려 올라오는 것처럼, 그녀의 발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기억이 되살아났다.
<2008년, OO 병원>
쏴아아. 졸음을 쫓기 위해 병실 안에 비치된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자리로 돌아가는데, 문득 그 일이 떠올랐다.
- 사모님, 제발 선처를 좀... 저희 아들 정말 가엾은 아이예요.
얼마 전 그놈 애미라고 한 여자가 찾아왔었다. 자존심이고 뭐고 싹 다 버리고 손바닥이 닳도록 빌던 모습. 무슨 죄를 지었든 상관없이 그저 자기 자식이라는 이유로 선처를 구하던 모습. 그 뻔뻔한 요구에 정당성을 더하는, 고생이 덕지덕지 붙은 처량한 얼굴.
나는 화가 났다. 자기 자식이 중하면 남의 자식 중한 것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애를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봐달라니 염치가 있어야지, 어딜 찾아와서는 애가 가엾다는 둥 헛소릴 하나. 이렇듯 내 분노는 타당했고, 또한 내 모성애의 증거가 되기에 나는 끝까지 그들을 용서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내가 지금 ‘엄마’로서 격분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나의 위치’가 부정당할 지도 모른다는 것을. “어찌 어미가 되어서 애가 저 지경이 되도록 몰랐나” 하는 비난의 화살을 막으려면 나는 ‘운 나쁜 피해자의 엄마 역할’을 똑바로 해야 한다는 것을.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되었다.
한밤중의 병실은 간혹 들려오는 환자들의 신음소리 말고는 조용하기에, 나는 조심스레 보호자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곤히 잠들어 있는 아들을 바라보았다.
“......”
어떻게 이 지경이 되도록 몰랐냐고 물으면, 정말 몰랐다. 너무 조용하고 어둡기에 애 방에 들어가 보니 그 상태였다. 그렇게 맞고 왔으면 말을 해야지, 애가 말을 안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아니, 부디 남들이 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빌었다.
아니야. 일이 이렇게 되어서 그렇지, 생각해 보면 꼭 내 탓만은 아니다. 내가 애한테 좀 소홀했던 부분은 있지만, 나도 나름 최선을 다 했다. 당장이라도 집을 뛰쳐나가서 내 삶을 찾고 싶은 걸 꾹 참고 줄곧 애랑 같이 있지 않았나. 당장 이혼하고 싶은 걸 참고 애들을 위해 그런 결혼생활을 견디지 않았나. 그래, 그건 내가 쌓은 내 지분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 줘야지. 남편도 할 말은 없을 거다. 모든 불행에 그 별난 성격이 한 몫하고 있으니까.
그런 사람인 줄 알았으면 결혼하지 않았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안정감을 얻기 위해 결혼한 건데, 나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삶이 되어 버렸다. 나의 삶...
- 가엾은 아이예요.
‘나야 말로 가엾은 인생이라고.’
훌쩍.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갑자기 눈물과 콧물이 쏟아지려는 걸 주변 눈치가 보여 열심히 참으면서, 나는 겨우내 뜬 땅을 밟듯이 부글부글 올라오는 기억들을 지근지근 눌렀다. 그래, 나야말로 가엾은 인생이지.
간질 발작이 심해 경제 활동도 꾸준히 못하고, 그래서 자격지심에 아무것도 모르고 시집온 엄마에게 폭력을 일삼았다던 아버지는 내가 얼굴도 기억 못 하는 어릴 때 돌아가셨다. 자식이 없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나마 딸내미 하나인 게 어디냐고, 어느 북적거리던 날 어른들끼리 수군거리던 게 얼핏 기억이 난다. 아마 그날이 아버지 발인날이었을 거라고 나는 짐작하고 있다.
졸지에 혹 딸린 청상과부가 된 엄마는 그 혹을 친하지도 않은 친척들 집에 맡겨 놓고 돈을 벌러 다녔다. 어쩌다 찾아와도 엄마는 날 한 번도 안아주지 않았다. 안아주는 건 고사하고 따스한 말 한마디도 없었다. 이렇듯 친엄마에게조차 천덕꾸러기였는데, 친척들이 날 곱게 볼 리가 없었다. 덕분에 나는 다른 건 몰라도 눈칫밥 하나는 배불리 먹었더랬다.
자랄수록 엄마를 닮아 얼굴이 예쁘장해지자 문제는 더욱 커졌다. 같이 살던 육촌 오빠가 나를 보는 눈빛이 변했고, 그걸 눈치챈 당이모는 엄마를 닦달해 나를 데려가게 했다. 나를 데리고 나오면서 엄마는 내 탓을 했다. “네가 처신을 잘 못해서 일이 복잡해졌다”며. 엄마의 그 말은 내게 내 몸에 대한 깊은 수치심과 막연한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어찌어찌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나는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공장이나 식당에서 부지런히 일을 하며 착실히 돈을 모았고, 공장에서 만난 언니와 함께 상경하여 지하 단칸방을 얻어 살았다. 그리고 첫 면접을 보러 간 은행에서 운 좋게도 바로 은행원으로 취직시켜 주었다. 번듯한 직장도 생겼겠다, 나도 이제부터는 삶이 좀 펴겠구나 하고 기대했다. 그런데...
‘그만!’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끔찍한 기억에서 빠져나왔다. 그래, 그때 남편을 만났기에 망정이지.
인정한다. 그때 그이는 내게 있어 구세주였다. 계속 그렇게 있어 주지 않아서 문제지. 아무리 남자들이 애가 태어나면 변한다지만, 그이는 정도가 지나치다. 애 키우는 건 도와주지도 않으면서 나한테만 엄마로서의 의무를 너무 강조해 왔다.
‘나도 엄마한테서 받아본 적이 없는 걸 내가 어떻게 알 거라고.’
사랑도 받아 봐야 줄 수 있는 거지. 애랑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는데 하루종일 말도 못 하는 애기랑 같이 있자니 미칠 거 같았다. 그렇게 첫째를 좀 키워놨다, 이제 한시름 덜었다 했더니 난데없이 남편이 둘째를 가지자고 했다. 거기에 휘말려 둘째까지 낳으니까 정말 죽을 맛이었다. 오죽하면 어디 시장 같은 데 가서 애를 몰래 버리고 올까, 그런 다음 어떻게 둘러댈까 상상도 했었다.
나는 숨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자고 있는 아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랑 하나도 안 닮은 얼굴. 사랑받지 못한 나를 안 닮아서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얼룩처럼 집안에 눌어붙은 내 처지가 너무 답답하고 싫어서, 갈수록 남편을 쏙 빼닮아가는 이 아이가 미웠다.
‘네가 없었다면... 그날 진짜 버리고 왔으면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어둑한 공간에서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아이 옆에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지금 이게 다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긴, 어느 쪽인들 상관없다. 어차피 불안과 공포가 늘 도사리고 있는, 죽지도 않아 끝나지도 않는 악몽 같은 삶이니까.
“... 스읍.”
술. 술이 땡긴다. 술을 마시면 잠시 잊을 수 있는데. 상황이 상황이라 그동안 너무 참아서 그런가, 갑자기 너무 마시고 싶어 진다. 그래도 그럼 안 되지 하고 마음을 다잡아 보아도 진정이 안 된다. 나는 다리를 덜덜 떨며 손톱을 깨물었다. 점점 초조해진다.
드르륵. 그때 뒤에서 병실 문이 열렸다. 간호사인가 싶어 나는 얼른 손을 내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문가에 있는 건 의료진도 다른 보호자도 아닌,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4년 후>
“다녀왔습니다...”
“늦었네. 뭐 하다가 이제... 뭐야, 무슨 일 있어?”
“어?”
“평소보다 더 얼빠진 얼굴인데?”
나보다 한 살 아래지만 몸집이나 하는 짓이나 꼭 언니 같은 동생이 평소처럼 까칠한 말투로 나를 맞이했다. 나는 현관에 대충 신발을 벗어던지며 대답했다.
“몰라. 그냥 피곤해.”
“공부도 안 하면서 왜?”
“... 시끄러워.”
사실이니 반박은 못하지만 짜증은 난다. 애써 덤덤한 척 방으로 가는데 동생이 내 등에 대고 말했다.
“얼른 씻고 와. 아줌마가 과일 깎아두고 가셨어.”
“어~”
‘그러고 보니 일이 있어서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하신다고 하셨지.’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돌봐주신 가사도우미 아줌마는 우리 자매에게 있어 제2의 엄마 같으신 분이다.
방에 들어온 나는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너무 피곤해서 몸이 축 늘어졌다.
“후우, 뭔가 엄청 길고 긴 하루였어...”
왠지 머리가 복잡했다. 나는 잠시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 보았다. 시간상 가장 가까워서 그런지 벚꽃 구경간 게 제일 먼저 떠올랐다.
화악. 바람이 불고, 벚꽃 눈이 내렸다. 그리고 거기에 그 녀석이 서 있었다.
- 이거 써.
음침한 주인이랑 전혀 안 어울리는 예쁜 하늘색 우산.
- 이거. 네 머리에 붙어 있었어.
나는 쓱하고 내 머리를 쓰다듬어 보았다.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아침에 머리를 감아서 다행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방 앞주머니에서 반듯하게 접혀 있는 휴지를 꺼내어 펼쳤다. 그 안에는 아까 받은 꽃잎이 들어 있었다. 조심스레 꽃잎을 집어서 어루만져 보았다. 보드라워서 배시시 웃음이 나온다.
“... 그나저나 정말 의외네. 혹시 전부 꿈이었던 거 아냐?”
이렇게 벚꽃잎이 실재하고 있으니 꿈은 아니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서랍에서 비밀 일기장을 꺼내어 어제 다음 장을 펼쳤다. 그리고 흰 종이를 보며 오늘 쓸 내용을 떠올렸다. 벚꽃, 영어 과제, 쪽지, 그리고...
‘오늘 일기는 꽤 길어지겠네.’
나는 종이 맨 위쪽 구석에 꽃잎을 올려놓고는 구기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 위에 투명한 테이프를 붙였다. 그런 다음 일기장을 들고 휘리릭 앞으로 책장을 넘겼다. 거꾸로 달려가는 기록은 맨 앞장, 고등학교 입학 후 첫날에서 멈추었다.
[매번 키순서로 앉아서 이런 적이 거의 없는데, 맨 뒤에 앉게 되었다. 게다가 첫날부터 숙제도 있다. 고등학교는 그야말로 새로움의 연속이다.]
다음 장은 두 번째 날의 일기였다.
[자리를 바꿔달라기에 바꿔줬는데, 옆에 앉은 남자애가...]
그래, 이게 녀석과의 첫 만남이었지. 그 첫인상은,
[아 민망해... 난 진짜로 그쪽이 잘못되는 줄 알았단 말이지.]
“아이들은 자연과 함께 자라야 한다”는 아빠의 신조에 따라 우리 가족은 줄곧 이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애완동물도 많이 키웠다. 흔히들 키우는 강아지와 햄스터는 물론이고, 심지어 병아리를 닭이 될 때까지 키워본 적도 있다.
그렇게 나는 나와 다른 속도로 시간을 세는 생명을 키우고, 함께하며, 먼저 보냈다. 그래서 알고 있다. 마지막이 가까워져 온 동물의 모습을. 다시는 깨지 못할 잠으로 빠져드는 그 눈을.
그런데 하필 내가 돌아본 순간 그가 그런 눈을 하고 있었던 거다.
- 저기!
정작 그는 너무 멀쩡한 얼굴로 날 돌아보았다. 정말 당황스러웠다. “네가 잘못된 줄 알고 불렀어”라고 처음 보는, 그것도 남자애한테 말할 수는 없었기에 난 숙제를 보여달라고 대충 둘러댔다.
‘근데 짜식이 무시하는 티를 팍팍 내고 말이야! 나도 참 너무 상냥해서 문제지. 걔가 잘못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람.’
나는 일기장을 덮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런 주제에 자기는 수업도 안 듣고, 교과서에 낙서나 하고.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잖아?’
따지고 보니 점점 더 어이가 없었다. 뒤늦게 부글부글 화가 끓어오르는데, 갑자기 생긴 궁금증이 그 위에 찬물을 부었다.
‘그런데 왜 하필 고래일까? 그것도 매번 같은. 무슨 고래지?’
나는 일기장을 다시 서랍에 넣은 다음 전화기를 들고 검색을 시작했다.
“혹시 모비 딕에 나오는 그건가? 어디, 향유고래? 아냐. 이런 모양이 아니었어. 그럼 이거? 이것도 아닌데. 음... 아!”
몇 번 내리기를 반복하자 그가 그린 고래와 비슷한 사진이 나왔다. 대왕 고래. 세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란다.
‘이게 뭐길래 계속 그리는 걸까? 게다가 하필 그런 눈을 하고 웃을 게 뭐람. 꼭 그때처럼. 마치 영원한 꿈에 빠져드는 것 같은...’
“뭐 해! 안 와?”
갑자기 동생이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라 나는 하마터면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가, 가! 금방 가!”
나는 전화기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후다닥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방에서 나가려던 찰나, 전화기 생각이 나서 뒤로 돌았다. 화면이 서서히 꺼지면서 대왕 고래가 검은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까맣게 잠들어버린 전화기를 집어 들고 생각했다.
‘일요일에 만나서 한번 물어볼까?’
“안 오면 내가 다 먹는다!”
“안돼!”
절대 농담일 리 없는 동생의 협박에 나는 허둥지둥 방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