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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utis Dec 25. 2024

꿈(2)

“안녕하세요? 오후의 음악 산책, 양세라입니다.”


신나는 점심 방송 인트로 음악이 왁자지껄한 소음에 맞서 힘차게 울려 퍼졌다.  


“벚꽃잎이 우수수 떨어질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시나요?”


‘벚꽃이라... 그러고 보니 벚꽃 피어 있던데.’


소녀는 하굣길에 버스 창문을 통해 보았던, 나무에 분홍색 솜사탕으로 장식해 놓은 것 같던 풍경을 떠올렸다.


“저는 그 모습이 마치 눈이 내리는 거 같아요. 차갑지 않고 포근하고 보드라운, 보통 ‘눈’이라고 하면 우리가 으레 품게 되는 상상에 벚꽃 눈이 진짜 눈보다 더 가깝지 않을까요?”


방송 DJ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소녀는 꽃잎이 흩날리는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과연 분홍빛 달콤한 눈이 내리는 것처럼 보일 거 같았다.  


“첫 곡입니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Merry Christmas Mr. Lawrence”.”


평소와 달리 신나는 댄스곡이나 힙합 대신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흐르자, 아이들은 하나 둘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클래식?”


“지루해~!”


보컬 없는 피아노곡은 클래식, 클래식은 무조건 지루하다는 공식이 머리에 박힌 아이들은 반사적으로 올라오는 거부감에 얼굴을 찌푸렸다. 소녀와 같이 밥을 먹는 친구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4월에 무슨 크리스마스래? 차라리 “벚꽃엔딩”을 틀지.”


“맞아! 그게 더 어울리지 않아?”


“봄바람 휘날리며~ 흩날리는 벚꽃잎이~”


소녀의 친구들은 자체 BGM을 틀면서 몸을 들썩였다.  


‘나쁘지 않은데...’


지금 흐르는 곡이 마음에 들었던 소녀는 그들이 좀 조용히 해주기를 바라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떠들썩한 친구들에게서 눈을 돌려 교실 저 뒤쪽을 바라본 순간, 그녀는 보았다.  


‘...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구나.’


 퉁명스럽기만 한 소년이 지그시 눈을 감고 미소 짓고 있는 걸.   

그 의외의 면모에 놀란 소녀는 음악이 끝날 때까지 그를 쳐다보았다. 마치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그 얼굴을.   





<그날 저녁>


평소 하던 대로 동생과 마주 앉아 과일을 먹고 있자니, 오늘 있었던 일들이 더욱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아무리 내가 쿨하고 편견이나 고정관념 같은 게 적은 편이라지만, 하루 만에 이렇게 바뀌다니.’


웃고, 약 올리고, 짜증 내고, 화내고, 사과하고, 또 웃고. 마치 1년 치 볼 걸 오늘 하루 만에 다 본 느낌. 과부하가 걸릴만하다.  

동생 아현이가 큼지막한 딸기를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말했다.  


“달다.”


“응, 그러네. 딸기 맛있다.”


나도 맞장구를 치며 딸기를 한입 베어 물었다. 새콤달콤한 향과 맛이 입안에 감돌면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 ‘Sweet’에 나쁜 뜻이 있던가?”


“어? 뭔 소리야?”


“오늘 누가 나한테 “So sweet”라고 쪽지를 보냈거든.”


“오~ 근데?”


“그런데 그 상대랑 상황이... 절대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었거든?”


순간 동생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뭐야, 벌써 미움받고 있어?”


“아니거든? 그 자식이 이상한 놈이라 그래.”


“그 ‘절대 좋은 소리가 나올 리 없는 상황’이란 게 뭔데?”


“수업 중에 걔가 교과서에 낙서하고 있길래 딴짓하지 말고 집중하라고 쪽지를 써서 던졌는데, 그렇게 적어서 나한테 다시 보낸 거 있지.”


“흐음~?”


동생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굴렸다. 딸기물이 빨갛게 든 손가락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sweet라는 단어 자체에 나쁜 의미는 없는데.”


“그치? 그럼 대체 뭐였을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이번엔 새카만 캠벨포도로 손을 뻗었다. 동생이 손도 안 댔는지 포도는 처음 놓인 그대로 있었다.  


“넌 이거 안 먹지?”


“어. 너무 달아.”


아현이 이 녀석은 사탕이나 과자는 물론이고, 과일도 달기만 한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가 썩을 것처럼 단 건 나도 별로지만, 과일은 괜찮던데.  


‘별난 녀석. 뭐, 덕분에 맛있는 포도는 나 혼자...’


그때, 한 아이디어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속으로 유레카를 외치며 탁자를 탁 쳤다.  


“그거다!”


“뭐, 뭐?”


“그거야! 걔도 너처럼 단 걸 싫어하는 게 틀림없어. 그래서 내가 싫다는 걸 ‘너무 달다’고 돌려 말한 거라고!”


그래, 이거지. 머리가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한창 만족감에 젖어 있는데, 동생이 떨떠름한 얼굴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so’ sweet라고 했다며.”


“어. 그거 많이 달다는 소리잖아.”


“너무 달다는 건 ‘too’ sweet 아냐?”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so와 too의 차이점에 대해 얼핏 들은 기억이 난다.


“...... 그러네.”


아현이가 쭈글거리고 있는 나를 오렌지 조각으로 가리키며 히죽거렸다.  


“라고, 고등학생이 중학생에게 말했습니다.”


“... 시끄러.”


아, 정말 싫다. 분명 내가 언니인데. 어째서 난 늘 얘한테 이런 식으로 당하는 걸까... 가만, 그러고 보니.


“너랑 닮았다.”


“어?”


“그 재수 없는 애.”


“... 죽을래?”


“어? 왜?”


“그 말은 나도 재수 없단 뜻이잖아.”


“뭘 새삼스레. 이제 알았어?”


아현이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잠시 날 흘겨보더니, 갑자기 눈을 빛냈다.  


“아, 그거네.”


“뭐?”


“사카즘(sarcasm).”


“사카즘?”


“‘So sweet’. 니가 잔소리한 걸 아니꼽게 여기고 비꼰 거지. ‘참으로 친절도 하시네요’, 이렇게.”


“아..?!”


“한소리 들을만했네. 저나 잘하지 뭔 오지랖이래. 게다가 너도 앞이 아니라 옆을 보고 있었으니까 그 사람이 낙서하는 걸 알 수 있었던 거 아냐? 자기도 한눈팔았으면서.”


“그런... 그게 그렇게 되는 거야?”


“응. 근데...”


“어?”


“재수 없다면서 왜 그렇게 신경 써? 답지 않게.”  


“......”


그러네. 왜일까.  


“음. 뭐랄까, 재수는 없는데 아주 무시는 못 하겠는... 왠지 자꾸 눈이 간달까?”


“으음~?”


“나도 잘 모르겠어. 그냥,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불편은 한데, 막상 보면 또 그렇게 불편하지도 않은 느낌?”


“...... 뭐야, 사람 말로 해.”


“그러니까, 싫은데, 그냥 그 자체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느낌이랄까?”


“흠...”


아현이는 오렌지 조각을 들고 알갱이를 하나하나 관찰하는 것처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한참을 있더니 마침내 툭 던지듯이 말을 꺼냈다.

 

“마음에 드는 상대가 있으면 자주 얼굴을 내비치란 말, 알아?”


“뭐야 그게? 그런 게 있었어?”


“뭔 효과인지 정확한 명칭은 잘 모르는데, 그런 거 있잖아. 사람은 익숙한 상대에게는 점점 호감을 갖게 된다던가? 처음 만났을 때 보였던 단점이 잘 안 보이게 되고,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고. 아마 같은 자극에 계속 노출된 뇌가 경계심을 푸는 거 아닐까. 처음만큼 활발하게 정보를 처리하지 않는 거지. 그런데 여기서 재밌는 건, 이게 꼭 그 상대가 실제로 만나왔던 사람이 아니어도 적용이 된단 거야.”


“무슨 뜻이야?”


“예를 들면 ‘우리 아빠 닮은 사람’.”


“아!”


“흔히 여자들은 자기 아빠 닮은 남자를 선호한다잖아.”


“어, 뭔 말인지 확 와닿는다. 나도 그렇잖아.”


“그러니까 결국, 그 사람이 날 닮았다며? 나한테서 느끼는 익숙함을 그 사람한테서도 느끼는 거지. 나를 재수 없다 여겨도 자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한 집에 살면서 부딪혀 왔고, 그러면서 쌓여온 나쁘고 좋았던 경험들이 나에 대한 기억과 감정을 만들었는데, 나랑 비슷한 사람한테 그게 투영된 거야.”


“오! 정말 그럴듯해.”


나는 감동의 물개 박수를 쳤다. 아현이는 씩 입꼬리를 올리고는 들고 있던 오렌지 조각을 날름 입에 넣었다.

  

“정말 그렇네. 나 너 같은 타입한테 약한 건지도? 뭐랄까, 약간... 시크한 길냥이?”


“... 길냥이?”


내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동생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굳이 부를 거면 호랑이라던가 표범이라던가, 좀 더 근사한 게 있지 않아?”


“아냐. 길냥이가 딱 좋아. 쓸데없이 도도한 점이.”


“죽을래?”


고작해야 잽 정도밖에 안 되는 타격감이겠지만, 그래도 반격을 한 방 먹여주었다는 것에 만족하며 나는 포도를 입에 쏙 넣었다.  


‘그러고 보니 한 명 더 있네, 이런 타입.’


과일을 다 먹은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영어 과제를 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는데 좀처럼 집중이 잘 안 되었다. 나는 괜스레 자고 있는 전화기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깨웠다. 아까 찾은 대왕 고래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고 보니 모른 척 계속 봐왔다. 늘 한 마리에, 슬픈 눈을 한, 늘 같은 고래 그림.


“... 아아~ 집중이 안 돼!”


나는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로 갔다. 침대에 누워 뒹굴뒹굴하다가 머리만 밖으로 떨어뜨리고서 방안 풍경을 거꾸로 바라보았다. 피가 몰리면서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이렇게 하면 머리가 좀 더 잘 돌아가려나? 내일까지 써서 걔한테 이메일로 보내야 하는데.  


“하필이면 ‘대학에 가야 한다’가 걸릴 게 뭐람. 대학 같은 건 진짜 가야 할 사람만 가면 되는 거 아냐?”


애초에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은 너무 과열되어 있다. 대학에 가지 못하면 마치 낙오자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는 사회 분위기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찜통에 불을 더 지피고 있다.  


‘대학에서 꼭 써먹을 수 있는 걸 배우는 것도 아니잖아? 그럼 왜 그렇게들 공무원 시험에 목숨을 거는데? 오히려 비싼 등록금만 내고, 아깝잖아.’


예전부터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 주의로 우릴 키우신 부모님은 아마 내가 대학에 안 간다고 해도 뭐라 하지 않으실 거다. 지금껏 내가 시험에서 몇 점을 받아오든 신경 한번 쓰신 적 없는 데다, 오히려 “시험 기간에는 학교 일찍 끝나서 좋겠네”라고 하실 정도니까.

어렸을 때 나름 신동 소리를 들었던 나에 대해 욕심을 부릴 법도 한데, 어쩜 그렇게 자식 교육에 무심할 수 있는지. 내가 다 걱정이 될 정도다.  


‘그렇다고 공부할 마음은 없지만~’


역시, 애들은 간사한 법이다.  


“하고 싶은 거라...”


장래희망, 꿈이라.  


- 오, 아랑이는 작가가 되고 싶구나?


그래, 그렇게 썼었지.  


- 그럼 잘 관찰해 보면 어때? 좋은 이야깃거리가 될지도 몰라.   


개인 면담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그러셨다. 가리지 말고 많이 관찰해 보라고.

그래, 그래서였나. 확실히 계속 보니까 다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웃음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었고, 감정이 제각각인 게 보였다. 쓸쓸한 웃음도 있었고, 재수 없는...


“안돼! 이대로 있다간 또 무시당할 거야, 어쩐다... 그래, 아현이한테 물어봐야겠다!”


어릴 적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자라 오만방자 나태해진 나와 달리, 간단한 맞춤법도 곧잘 틀려서 바보 소리를 듣던 동생은 꾸준한 노력을 통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가 되었다. 모범생인 동생이라면 분명 한국 교육 시스템에 최적화된 사고방식이 머리에 정립되어 있을 터.

똑똑. 나는 동생 방 앞까지 가서 닫혀 있는 방문에 노크를 했다. 지금 자기 방문을 두드릴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걸 잘 아는 동생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왜?”


“숙제 좀 도와줘.”


“......”


쿵쿵쿵. 벌컥.


“지금 뭐라고?”


“숙제 좀 도와주세요.”


동생은 점점 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하고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여보세요, 고등학생님? 지금 중학생한테 숙제를 도와달라고 하시는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 들어와.”


당당한 내 태도에 동생은 마지못해 나를 방에 들였다. 동생은 자기 의자에, 나는 동생 침대에 걸터앉았다.   


“무슨 숙제인데?”


“넌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그렇지. 그게 왜?”


“왜? 왜 가야 한다고 생각해?”


“그야, 취직할 때 유리하니까?”


“왜?”


“왜냐니. 회사 입장에선 당연한 거 아냐?”


아냐, 아현아. 그걸론 부족해. 좀 더 짜내보자?  


“꼭 대학을 나와야지만 실력이 좋은 건 아니잖아.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시간을 더 알차게 보낼 수도 있는 거 아냐?”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건 극히 일부잖아. 대부분 자기 수준에 맞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어 있어. 특히 이런 사회 분위기라면 더더욱. 고졸이 되는 것보단 대졸이 되는 게 더 힘들고, 인지도가 낮은 대학보다는 명문대에 들어가는 게 더 힘들다, 지원자들을 일일이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면접관에게 이게 뜻하는 게 뭐겠어?”


“음~ 힘든 관문을 통과해 온 사람이다?”


“더 정확히는 ‘성실함’과 ‘자기 통제력’의 증명이지.”


“아, 역시~ 자기 얘기라 잘 아는구나.”


“어?”


“아냐, 계속해 봐.”


“일단 그거랑... 대학도 허가받은 교육 기관이니까, 거길 졸업함으로써 증명 가능한 게 있겠지. 검증되지 않은 곳에서 개인적으로 배운 건 아무래도 그 수준을 평가하기 어려우니까.”


“아하~ 대학 졸업장이 일종의 승인된 실력 증명서란 거구나.”


“그런 셈이지. 또한 학생 개인에게 있어서도 대학교에서 제공하는 체계화된 교육과정을 따르기만 하면 되는 이점도 있고. 뭐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 알아보지 않아도 되는 만큼, 시간과 노력을 절약할 수 있는 거지. 그리고 학교라는 인프라 자체, 즉 면학 분위기라던가 교수의 평가와 지도, 도서관이나 책자 같은 물리적 자원도 큰 이점이고.”


“으으으~~~ 음!”


“왜, 왜 그래?”


“넌 어쩜 이렇게 똑똑한 거야!”


알이 꽉 차게 잘 영근 동생이 너무 대견했던 나머지, 나는 벌떡 일어나 동생을 와락 껴안았다.  


“고마워, 사랑하는 내 동생!”


“미쳤어? 떨어져.”


나는 동생을 놓아주고 주먹을 꽉 쥐며 결의를 다졌다.  


“좋았어! 이제 그 건방진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 것도 꿈만은 아냐!”


“...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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