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아침, 약속시간 40분 전. 채비를 마치고 막 나가려는 내게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동생 아현이가 물었다.
“도서관.”
“어, 그래? 잘 됐다. 나 빌린 책 좀 대신 반납해 줘.”
“몇 권인데?”
“하나.”
아현이는 벌떡 일어나 자기 방에서 책을 꺼내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네? 고상하긴.”
“고마워~”
자기 대신 책을 반납해 줘서 고맙단 건지, 고상한 취향이라는 말에 대한 인사인지, 아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얼른 다시 소파로 가 앉았다. 거실 창문 너머 하늘이 잿빛인 걸 본 나는 현관에 놓인 우산을 힐끔 쳐다보며 기상정보 앱을 켰다.
“어디... 오늘 날씨는 흐림, 비 올 확률 50프로? 이래서야 비가 온다는 건지 안 온다는 건지 알 수가 없잖아. 우으~ 우산 가져가기 귀찮은데.”
내가 중얼거리는 걸 들은 동생이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거 알아? 기상청 소풍 얘기?”
“기상청 소풍?”
“기상청 소풍날 비가 왔다는 소문.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몰라도, 그만큼 일기예보의 신뢰도가 떨어진다는 소리지. 아하하하~”
텔레비전에서 우스운 장면이라도 나온 듯 아현이가 소파 팔걸이까지 두드리며 큰 소리로 웃었다. 나도 보려고 돌아봤지만 이미 재미있는 장면은 다 지나간 후였다. 나는 입술을 비죽 내밀고 괜스레 우산 꽂이에 꽂혀 있는 검은색 장우산을 흘겨보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끝내 우산 없이 집을 나섰다.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고 있는데 서서히 회색빛 구름 사이로 햇빛이 비쳐 들었다. 밝아지는 세상만큼 내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역시, 안 가져오길 잘했어.’
도서관 쪽으로 가는 버스를 탄 나는 뒤쪽 창가 자리에 앉아 움직이는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목적지에 점점 가까워지자, 마치 흔들리는 유리잔에 담긴 물처럼 기분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과연 오늘은 어떤 모습을 보게 될까.’
오늘따라 버스가 유난히 덜컹거려서인지 멀미가 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버스에서 내려서 조금 걸으니 긴 계단이 나왔다. 양옆에 분홍색 진달래가 수줍게 피어 있는 하얀 계단, 그 끝에는 도서관 건물과,
‘있다.’
그의 뒷모습이 있었다. 계단을 올라오는 내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가 날 돌아보았다. 연한 회색 바지와 하얀 셔츠, 그 위에 걸친 군청색 조끼. 분명 사복인데 왠지 다른 학교 교복 같았다. 덕분에 학교가 아닌데 학교에 있는 거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왔네?”
“어. 일찍 왔네?”
그가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끔 보며 말했다.
“그런가. 원래 약속시간 10분 전에는 오니까.”
‘나도 5분 전에 도착한 건데.’
나는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서 물었다.
“어디가 좋을까? 좀 시끄럽게 해도 되는 곳이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너무 시끄러운 것도 싫고.”
“난 여기 처음이니까 네가 정해.”
그는 딱히 어디든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잘 모르는 상대를 위해 뭘 정하는 건 딱 질색인데, 처음이라니 할 수 없었다. 나는 자유롭게 떠들 수 있는 장소 두 곳을 떠올렸다.
“그럼 지하 매점이나 1층 카페 어때?”
“그래.”
“... 그래 라면, 어느 쪽?”
“......”
‘뭐야, 얘도 뭐 고르는 거 잘 못하나?’
난처한 기색을 비추며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슬금슬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속이 한결 편해진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카페로 갈까? 비도 안 오는데 야외 좌석 어때? 남들 눈치도 덜 보이고.”
“그래.”
내가 정해준 것이 내심 반가웠는지 그가 얼른 대답했다. 의외로 알기 쉬운 녀석이다 싶어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음이 나와버렸다. 나는 카페가 있는 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이쪽이야.”
카페 안에는 사람이 제법 있었지만 다행히 야외 자리는 아직 한산했다. 그 덕에 우리는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내가 의자에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대뜸 그가 물었다.
“뭐 마실래?”
“같이 가지 뭐.”
“넌 자리 지키고 있어. 뭐 마실 건데?”
‘딱히 지키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나는 휑한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그러나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딸기 스무디.”
“만약 없으면?”
“어... 그럼 레모네이드.”
참 철저한 성격이다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지갑을 꺼내려고 가방을 뒤적이고 있는데, 그가 휑하고 가버렸다. 키가 커서 걸음도 빠른가. 그는 말릴 틈도 없이 금방 카페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른 건 둘러보지도 않고 바로 주문대로 향하는 그의 모습이 유리로 만든 카페 벽 너머로 보였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 속에서 의자에 앉았다.
‘그래 뭐... 오면 주자.’
주문한 음료를 기다리며 냅킨과 빨대를 챙기는 모습. 나온 음료를 받아 들고 점원에게 웃는 얼굴로 인사하는 모습. 좀 더 안드로이드 같은 짓을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너무 정상적이었다.
조금 뒤 그가 레모네이드 하나만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딸기 스무디는 없대.”
“어, 고마워. 근데 너는?”
“뭐가?”
“넌 안 마셔?”
“어.”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고서, 내 앞에 냅킨 한 장을 깔더니 그 위에 레모네이드가 담긴 컵과 빨대를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그 모습에 잠깐 감동할 뻔했다가, 문득 ‘그저 매뉴얼대로 행동할 뿐인 거 아냐?’ 하는 생각이 들어 헷갈렸다. 치과에 가면 놔주는 마취주사를 머리에 맞은 것처럼 얼얼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계산 생각이 나서 나는 얼른 지갑을 열며 물었다.
“얼마야?”
“몰라.”
“... 뭐?”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람.
“뭐야, 그런 게 어딨어. 빨리 말해.”
“진짜 모른다니까.”
“그럼 영수증 줘봐.”
“안 받았는데.”
당황스럽다. 평소랑 같은 얼굴을 하고서 하는 짓이 왜 이렇게 다른 거야. 갭이 너무 커서 적응이 안 되잖아.
“... 다음엔 내가 살 거야.”
“그러던가. 그럼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
“응.”
그는 가방에서 A4 종이 몇 장을 꺼냈다.
“네가 보내준 거 읽어봤는데, 의외로 잘했더라. 일목요연하고.”
‘의외로?’
나는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시큼한 첫맛에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긴, 거의 다 아현이 아이디어니까 할 말은 없네.'
“대충 네 거랑 내 걸 맞춰서 정리해 봤는데, 여기.”
나는 그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들고 내용을 죽 훑었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흐름이었다.
‘진짜 얘한테 다 맡겨도 될 뻔했네. 만날 필요도 없었잖아.’
나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심드렁하게 종이를 돌려주었다.
“괜찮은 거 같아.”
“그럼 본문은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영어로 바꾸는 건 각자 알아서 하면 되고. 아, 생각해 봤는데...”
그는 잠시 말을 끊고서, 아주 작은 얼룩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종이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집중하면 날카로워지는 인상, 이전에도 몇 번 본 적 있는 표정이다.
‘그래도 예전만큼 불편한 느낌은 안 드네?’
이윽고 생각을 정리했는지 그가 말을 이었다.
“토론 마지막에 각자 자기주장을 간략히 정리하는 부분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럼 자연스럽게 마무리 지을 수도 있고, 청중을 위한 요약도 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에 찬성했다.
“응, 그거 좋다.”
내가 너무 순순히 나와서 놀랐나. 깜빡이는 그의 눈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얼른 다시 종이로 시선을 돌렸다. 고작 몇 센티미터, 찰나의 일이었지만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래놓고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종이를 접어 가방에 넣으며 그가 말했다.
“그럼 그건 각자 알아서 하기로 할까. 어차피 상대 파트에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니까.”
“그래, 그러자.”
오늘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과연 일이 잘 풀릴까 걱정했었는데,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러다 문득 내가 한 게 너무 없다 싶어서, 나는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내었다.
“참, 우리 대본을 프린트해서 시작 전에 선생님이랑 애들한테 미리 나눠주는 건 어때? 그럼 우리가 말하는 걸 좀 더 편하게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아예 안 듣던가.”
그는 피식하고 빈정대듯이 혼잣말을 흘리다가, 갑자기 내 눈치를 보며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아니, 내 말은... 좋다고 생각해. 청중도 우리도 덜 부담스럽고...”
나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프린트는 내가 할게. 예쁘게 꾸미는 건 자신 있거든.”
“응.”
그는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월요일 밤 11시까지 내 파트 영어로 바꿔서 보낼게.”
“응. 그럼 대본 만들 시간도 충분하겠다.”
“그럼...”
“응?”
“이제 다 끝난 거네.”
“어, 그러네...”
모든 게 생각보다 너무 쉽고 빨랐다. 나는 아직 3분의 1도 못 마신 레모네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현이가 빌린 책을 갖다 주러 도서관에 들어가야 하는데, 컵을 들고 가자니 좀 귀찮았다.
‘그렇게까지 하고 싶을 정도로 맛있지도 않고. 그냥 버릴까?’
그때였다.
“마실 거면 서두르지 않아도 돼.”
“응?”
“다 마실 때까지 여기 있을게. 물론 네가 싫지 않을 때의 얘기지만...”
파라솔 위로 환한 햇빛이 쏟아지고, 바닥에 선명한 그늘이 졌다.
“... 안 싫어.”
오늘 날씨는 정말 변덕스럽다.
<7년 후>
“그 사람, 눈의 여왕을 찾기 위해 네가 필요해.”
청년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진지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눈의 여왕’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의 가슴 한 구석에 깊이 묻어 두었던 애절함이 긴 손톱을 세우고 연약한 분홍 살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머리와 가슴의 아픔에 몰려서, 청년은 스스로도 바보 같다고 생각하면서 남자에게 말했다.
“그 ‘눈의 여왕’이라는 거, 혹시...”
“응?”
“...... 아니, 아무것도 아냐.”
“응.”
청년은 차마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못했다. 예스든 노든, 그 이름에 대해 뭐라도 들었다간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였다. 그는 도망치듯 말을 돌렸다.
“그런데 날 데리고 가려고? 내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아, 그러네.”
“내가 어디서 뭘 하다 왔는지, 사람을 죽였는지 어떤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청년은 일부러 흉측한 말을 골랐다. 이로써 상대의 마음이 바뀌어, 약간의 딜레이는 있겠지만 정해진 목적지에 다다를 것인지. 아니면 난데없이 나타나 자신의 계획을 방해한 이 남자가 선로를 완전히 틀어버릴 것인지. 청년은 자기도 알지 못한 사이에 자신의 운명을 처음 보는 상대에게 맡기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