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옥. 레모네이드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나는 컵을 다시 내려놓았다. 잘그락. 컵 안에서 그새 제법 녹아 둥글어진 얼음들이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매끈한 플라스틱 표면에 맺힌 물방울들이 주르륵 흘러내려 밑에 깔린 냅킨은 점점 울상이 되었다. 입안을 시큼함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 음료를 바로 삼키지 않고, 나는 앞에 앉아 있는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불편해.’
다 마실 때까지 같이 있어주겠다더니, 정말로 ‘같이 있어만’ 주고 있다. 어림잡아 10여 분 동안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채, 나는 레모네이드만 마시고 그는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같은 자세로 꼼짝 않고 있는 게 꼭 마네킹이랑 앉아 있는 기분이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하지? 타이밍도 모르겠어.’
이러다가 딱히 끝낼 생각도 없었던 레모네이드만 다 마시게 생겼다. 컵이 비면 그제야 “다 마셨으면 이제 가자” 하고 움직이는 거 아냐? 나는 컵을 절반 정도 채우고 있는 연한 노란색을 바라보며 그 장면을 상상했다. 쟤라면 충분히 그럴만한데. 실제로 그러면 난 어떤 기분이 들까.
‘뭔가 열받을 거 같아.’
아직 일어난 일도 아닌데 벌써부터 부아가 치민다. 꿀꺽. 나는 입을 비우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그가 눈만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진지한 눈빛으로 그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억지로 안 있어도 돼.”
“... 어?”
조금 놀랐는지 그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지루해 보여서. 나 때문에 일부러 안 있어도 돼.”
그는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지루하지 않은데.”
‘엄청 지루해 보이던데 뭘!’
나는 왠지 오기가 생겼다. 사회성 부족한 거야 진작 알고 있었지만, 사람이 계속 그런 핑계 뒤에 숨으면 안 되지. 자기가 얼마나 눈치가 없는지,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지, 얘를 위해서도 알려줘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마저 느꼈다.
“그래? 난 또 테이블만 보고 있길래 되게 싫은가 보다 했지.”
“아닌데.”
“말없이 앉아만 있으니까 불편해 보여. 별로 할 말도 없는 거 같고.”
“네가 아무 말도 안 하길래. 난 하나도 안 불편해.”
“... 너 효율 엄청 좋아하잖아. 이러고 있으면 시간낭비 아냐?”
“시간낭비? 왜?”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잖아.”
“아~ 아니야. 머릿속으로 영작 중이거든.”
“......”
뭐 이런 게 다 있담. 이건 눈치가 없는 정도가 아니잖아. 그런데 어쩐지 파고들 틈이 없다. 이제 남은 방법은 “네가 그러고 있어서 나는 기분이 나빴어”라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저런 놈한테 그런 말을 했다간 “그게 왜 기분이 나쁘지?” 하고 되레 날 이상한 사람 취급할 게 뻔하다. 결국, 종 자체가 틀린 거다.
내가 지금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리가 없는 그는 자기만의 착각에 빠져 부연설명을 해댔다.
“어제 정리하면서 영작은 미리 다 해놔서, 아까 하기로 한 마지막 파트만 남았어. 이미 나온 표현만 잘 가다듬으면 되니까 어렵지 않아.”
“... 미리 다 했다고?”
“어.”
“나랑 대본 완성하기도 전에?”
“어. 어차피 오늘 만나도 별로 달라질 건 없을 거 같아서.”
뭔 놈의 근자감이람. 살짝 멋쩍어하면서 피식 웃는 게 더 열받는다.
‘으윽~ 재수 없어!’
한참 속으로 흉을 보고 있는데, 예상치 못했던 한 마디가 훅 하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안 싫어.”
“......”
그는 다시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어색함을 자연스럽게 넘겨줄 무언가가 필요해서 나는 컵을 들어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딸그락. 그새 얼음이 더 녹았는지 맛이 아까보다 밍밍해졌다.
겉으로는 아까와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지만, 안에서는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뾰족한 얼음이 점점 둥그렇게 녹아가는 것처럼, 불편했던 우리 사이도 조금씩 원만해지고 있는 게 아닐까. 뭔가 껍질이 한 겹 벗겨진 느낌이 든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 두꺼운 껍질에 싸여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예전부터 상상해 왔다. 그 껍질에 가려져서 서로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은 ‘이해’라는 ‘오해’를 쌓아가는 게 아닐까라고.
안에 있는 마음을 보려면 껍질을 벗겨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거다. 부딪혀서 깨버렸다간 알맹이인 마음도 멍들 수 있다. 다른 방법은 자기 껍질을 먼저 벗어 보이면서 상대도 그래주기를 기다리는 것, 그러나 상대가 그래주리라는 보장도 없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만 바보가 될 뿐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어렵다.
그러나 가장 난감한 건,
“하나 물어도 돼?”
“뭔데?”
“고래 그림은 왜 그리는 거야?”
상대한테 내가 내민 손이 맹렬한 펀치가 될지, 화합을 구하는 손길이 될지, 난 알 도리가 없다는 것.
얼핏 그의 눈에 놀라움과 망설임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유리물이 모양을 잡아가는 것처럼 그의 얼굴에 흠잡을 데 없는 미소가 번져나갔다.
“글쎄?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아마도 크고 멋있어서가 아닐까? 남자들은 원래 크고 강한 걸 좋아하잖아.”
살짝 비쳤던 마음이, 한 꺼풀 벗겨졌다고 생각했던 껍질이 단단해져 간다. 딱지처럼 굳어져서 다시는 그 안을 보여주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에, 왠지 그건 싫다는 생각에 나는 그만 부딪혀 버렸다.
“거짓말.”
“뭐..?”
“거짓말이야. 넌 그런 애가 아니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그가 여유롭게 웃으며 떠보고 있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서’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처럼 효율 따지는 애가 별 의미도 없는 짓을, 그것도 수업 시간에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을 반복한다고?”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널 많이 봐왔는지도 모른다.
“몇 번..?”
“너한테 대왕 고래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지?”
“......”
저건 틀림없이 정곡을 찔린 사람의 표정이다. 좋아,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봐야지. 설령 내가 ‘이해’라 믿는 것이 ‘오해’라 할지라도.
“좋아하거든. 네 고래 그림.”
먼저 내보이는 건 부끄럽지만, 지금 저 틈새를 뚫고 가지 않으면 오해를 이해로 바꿀 기회도 없어.
“나 하나만 그려줄 수 있어?”
“... 종이 없는데.”
도망치면 쫓아가서 잡아오면 돼.
“아까 그 프린트해 온 거 있잖아. 거기 뒷면에 그려줘.”
“... 잘 못 그리는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괜찮아. 평소에 그리던 거면 충분해.”
이미 지구 끝까지 쫓아갈 거라고 한 마당에, 뭐.
<잠시 후>
슥슥슥.
“못 그리기는! 잘만 그리잖아.”
“......”
내 칭찬을 듣고 그가 고개를 더 푹 숙였다. 나는 빨개진 그의 귀를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하얀 종이 위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고래에게 눈을 돌렸다. 깐깐한 샤프심으로 어떻게 저런 부드러운 선을 그려낼 수 있을까. 아마 같은 곳을 몇 번이고 두드리는 저 조심스럽고 섬세한 터치 때문이겠지. 문득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그 손길이 떠올랐다.
“자, 여기...”
그는 내 눈을 피하며 어느새 뚝딱 그려낸 그림을 내밀었다.
“와! 진짜 잘 그렸다. 고마워.”
실제로도 준수한 실력이지만, 나는 일부러 폭풍 칭찬을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자 테이블에 붙은 그의 눈이 더욱 갈 곳을 잃고 헤매었다.
“근데 고래 눈이 좀 슬퍼 보여.”
“원래 그래.”
“그런가? 혼자 있어서 슬픈 게 아닐까?”
“무슨, 그저 그림일 뿐이야. 쓸데없이 감정이입하지 마.”
퉁명스럽고 뾰족한 말투. 숨기고 싶은 게 있어 일부러 저런다는 것쯤 이젠 안다. 나도 제법 경험치가 생겼단 말이지. 쌀쌀맞게 거리를 두는 길고양이에겐 조금씩 완급조절을 하며 다가갈 필요가 있다.
“근데 정말, 왜 꼭 한 마리만 그리는 거야? 외로워 보이잖아.”
다 쓴 샤프와 지우개를 필통에 챙겨 넣으며 그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대왕 고래는 원래 혼자 다녀.”
“정말?”
“응. 번식기랑 새끼 키울 때 빼고.”
“그렇구나. 고래에 대해 잘 아네?”
그는 살짝 몸을 돌려 의자에 걸려있는 가방에 필통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렇지도 않아.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 것뿐이야.”
“흐음~ 근데 대왕 고래가 특별한 이유는 뭐야?”
끈질기게 되돌아온 내 질문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혼자 살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찾기 힘든 거.”
그러고는 내 앞에 놓인 자기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고래를 다 그리면 언제나 그랬듯이, 쓸쓸함이 묻어나는 헛웃음이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그렇게 큰데 찾기가 힘들어?”
“아무리 커봤자 바다에 비하면 보잘것없이 작으니까.”
“그래도. 과학자들이 다 추적하고 그러지 않아?”
“일일이는 모르겠지만 아마 대략적으로는 파악하고 있겠지. 멸종 위기종이니.”
“멸종 위기? 왜?”
“고래기름을 얻으려고 많이 죽였대. 국제적 제재에도 포경은 아직 계속되고 있고.”
“불쌍하다. 너무 잔인해.”
그가 눈을 들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시선에 놀라 주춤하며 물었다.
“왜... 그래?”
“... 아니.”
그는 다시 그림에 눈길을 주며 중얼거렸다.
“대왕 고래가 점점 사라져서 마지막 한 마리만 남았을 때,”
그의 입가에 슬며시 아까 그 미소가 되돌아왔다.
“그 한 마리가 죽는 날, 다들 아직도 바다 어딘가에 그 거대한 생명체가 헤엄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나는 물끄러미 대왕 고래 그림을 바라보았다. 과연, 저 말대로라면 이런 눈을 하고 있을 법도 하다.
- 쓸데없이 감정이입하지 마.
쓸데없다니. 그림도 결국 생각과 감정을 전하는 수단인데. 그린 사람의 감정이 그림에 실리는 것도, 보는 사람이 그걸 읽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보여놓고 보지 말라는 건 무슨 심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