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nseless years thunder by(인식하지 못한 수많은 격정의 세월이 흐르고).
Millions are willing to give their lives for you(수백만이 당신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으려 해).
Does nothing live on(계속 존재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거야)?”
때로는 기꺼이 온몸을 던져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처럼,
“Learning to cope with feelings aroused in me(내 안에서 깨어나는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우고).
My hands in the soil, buried inside of myself(내 두 손은 흙 속에, 나의 내면에 묻혀 있어).
My love wears forbidden colours(나의 사랑은 금단의 색을 입고).
My life believes in you once again(내 생명은 다시 한번, 당신을 믿네).”
때로는 잔잔히 일렁이는 물결같이, 추가 그네를 타듯이 이어지던 노래는 어느덧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다.
“I'll go walking in circles while doubting the very ground beneath me(발 밑의 땅까지 의심하면서 난 계속 제자리걸음을 걷겠지).
Trying to show unquestioning faith in everything(모든 것에 대해 맹목적인 믿음을 보이려 애쓰면서).”
순수한 무기질에 탁한 상념이 섞여 들어가는 것처럼, 평온한 무(無)로 향하던 발걸음이 거꾸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Here am I, a lifetime away from you(난 여기, 당신으로부터 일평생 떨어진 곳에 있어).
The blood of Christ, or a change of heart(구세주의 피인가, 아니면 변심인가).”
고장 난 태엽이 되살아나고 망가진 심장이 다시 뛰자, 순결하진 않지만 뜨거운 피가 청년의 메마른 동맥을 타고 흘렀다. 이윽고 절정에 오르기 전, 청년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아, My love wears forbidden colours(나의 사랑은 금단의 색을 입고).
My life believes(내 생명은 믿어).
My love wears forbidden colours(나의 사랑은 금단의 색을 입고).
My life believes in you once again(내 생명은 다시 한번, 당신을 믿어).”
노래가 끝나고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드라마틱한 후주(outro)가 없어 못내 아쉬운 끝자락의 여운 속에서, 남자는 시끄러운 마음을 잠재우며 입을 열었다.
“일평생 떨어진 곳에 있다니, 너무 서글프잖아. 아무래도 노래를 잘못 고른 거 같아. 안 그래?”
“또 시키려는 수작이면 관둬.”
“... 쳇.”
<11년 전>
“대왕 고래가 점점 사라져서 마지막 한 마리만 남았을 때, 그 한 마리가 죽는 날, 다들 아직도 바다 어딘가에 그 거대한 생명체가 헤엄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 나중엔 다들 알게 되지 않을까? 지구상 가장 거대한 동물의 멸종인데, 아무리 그래도 설마 모르겠어?”
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히 모두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지.
- 쓸데없이 감정이입하지 마.
실은 타당성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다. 그저 다들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안 그러면 고래가 너무 불쌍하니까. 아무도 모르는 쓸쓸한 마지막이라니, 그런 건 너무 슬프니까.
“그렇겠지. 다들 관심이 있으니까.”
그는 딱히 찬성하는 것도 반대하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짓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그림 속 고래를 보는 그의 눈빛이 이전과 사뭇 달라졌다. 조금 냉담해졌다고 해야 할까, 아니, 거리를 뒀다는 표현이 더 맞을 거 같다.
그가 말을 계속 이었다.
“하지만 아마 꽤 오랫동안은 믿지 못하지 않을까. ‘분명 어딘가에 한 마리 정도는’ 이러면서.”
나는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무관심 속에서 잊히는 게 아니라면, 비록 죽었지만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 속에서 잠시 숨을 쉬는 거라면, 그럼 고래도 기뻐하지 않을까.
“바다가 너무 커서?”
“응. 결론짓는데 상당히 오래 걸릴 거야. 무한대에 가까운 0의 집합이 진짜 전부 0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증명하는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
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엑스트라 다크 초콜릿처럼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러나 금방 뒤를 이은 목소리는 어쩐지시원스러워서 부자연스러웠다.
“게다가 인간은 사실보다는 믿고 싶은 걸 보려 하기 마련이라서. 고래가 좋아서 고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그 고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쉽게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 전설 속 괴물이 진짜 있다고 믿는 사람들같이, 확인이 안 되었을 뿐이지 어딘가 고래는 살아 있다고 계속 믿을지도 몰라. 그럼 고래는 영원히 죽었으면서 살아 있는 꼴이 되는 거야.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어? 슈 뭐?”
내가 묻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레 되물었다.
“... 슈뢰딩거의 고양이?”
“그게 뭔데?”
“그, 한 마디로 말하면 상자를 열기 전까진 상자 속 고양이가 죽은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건데...”
“진짜? 그런 게 있어?”
“아니, 이론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상태가 관측 전에는 동시에 존재한다는 양자역학의 이론을 비판하기 위해 에르빈 슈뢰딩거가 제안한 실험이야. 결과적으로는 양자역학을 증명하고 말았지만...”
난 나름 재미있게 듣고 있는데, 내가 싫어한다고 오해했는지 갑자기 그가 손을 저으며 멋쩍게 웃었다.
“미안, 이상한 소리 해서. 잊어버려.”
“어? 왜? 계속해 봐.”
“응?”
“재밌는데 왜? 그러니까 열기 전까진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 있다고?”
“어...”
“상자를 열어야 비로소 고양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결정된다는 거야?”
“어, 맞아.”
“그럼 동시에 존재하는데 하나만 볼 수 있으면, 내가 보지 못한 건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질문을 계속해댔다. 이런 내 반응이 의외라는 듯 그가 되려 내게 물었다.
“이런 거 좋아해?”
“응, 재밌어! 그래서 어떻게 되는데?”
“... 평행우주라고 들어봤어?”
그는 쭈뼛쭈뼛 새로운 단어를 꺼내면서 양손을 손바닥이 마주 보도록 나란히 세웠다.
“이렇게 절대 만나지 않는 상태를 평행이라고 하듯이, 우주가 여럿 동시에 존재하는데 서로 만나지 않는 걸 뜻해.”
“으음~”
“평행우주 가설에 따르면 상자를 연 순간 세상이 고양이가 살아 있는 세상 A-1와 죽어 있는 세상 A-2로 나뉘는데, 같은 세상에서 분화했지만 양립할 수 없기에 둘의 관계는 평행우주가 돼. 이때 관측자인 ‘나’도 ‘A-1의 나’와 ‘A-2의 나’로 나뉘게 되고, 당연히 ‘A-1에서의 현상’ 아니면 ‘A-2에서의 현상’ 둘 중 하나만 볼 수 있는 거야. 다른 세상에서 일어난 일은 알지 못한 채.”
“아, 뭔 말인지 알 거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말로 옮겨 보았다.
“마치 나무 같네. 같은 기둥에서 나온 가지들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라는 거. 그렇게 나뉘고 나뉘다 보면 정말, 나중엔 서로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겠는데?”
그는 열등생이라 여겼던 학생에게서 놀라운 재능을 발견한 선생님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칭찬했다.
“정확해. 너 이해가 되게 빠르구나?”
우쭐해진 나는 계속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재밌겠다! 그 모든 세상을 다 볼 수 있다면 어떨까? 다른 세상에는 다른 내가 살고 있겠지? 그 나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이렇게 도서관 카페에 앉아서 맹탕이 된 음료수를 마시고 있을까 하고 생각하며, 나는 거의 안 남은 레모네이드를 입안으로 빨아들였다. 그때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글쎄. 너는 모르지만 아마 난 없을지도.”
음료수가 한 번에 넘어가면서 목에 둔탁하고 깔깔한 느낌을 남겼다. 나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며 아까 그 말의 의도를 물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말을 돌려버렸다.
“결국 평행우주 같은 건 모든 가능성에 동일한 의미를 부여하고 마는, 어딘가에는 분명 존재한다고 믿어야 속이 풀리는, 인간의 미련한 집착이 만들어낸 망상에 불과할지도 몰라.”
“......”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세상에서 우리 할 일을 해야 되겠지? 이제 그만 일어날까?”
거진 비어 있는 컵을 보고 그가 일어설 준비를 했다. 그가 앉은 의자가 끼익 하고 뒤로 밀려났다. 나는 그 거슬리는 소리를 들으며 얇은 플라스틱이 살짝 구겨질 정도로 컵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그에게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대왕 고래가 모두 없어지면, 넌 어떡할 거야?”
“어?”
“왜, 상자 속의 고양이처럼. 어느 날부터 고래가 한 마리도 안 보이게 되면, 너도 어딘가 하나 정도는 있겠지 하고 믿을 거야?”
“... 처음엔 아마 그러겠지.”
“만약 할 수 있으면, 넌 찾으러 갈 거야?”
“찾으러 가는 나와 찾으러 가지 않는 나, 두 세상 중 나는 과연 어느 쪽에 있으려나?”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고, 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뭐야, 인간의 미련한 집착이 어쩌고 하더니. 결국 그 뒤에 숨는 거야?”
“나도 결국 무지하고 미련한 인간이니까. 그러는 너는 어때?”
“뭐가?”
“너는 찾으러 갈래?”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대면서 잡고 있던 컵을 놓고 팔짱을 꼈다.
“좋아하는 거라면 당연히 찾으러 가야지.”
“... 그렇구나.”
그는 들릴락 말락 중얼거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뭔가 끝이 개운하지 않았다. 나는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 연필 좀 줘봐.”
그가 멍하니 내 손바닥만 내려다볼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기에 나는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재촉했다. 그제야 그는 가방에서 필통을 꺼내 내게 건넸다. 빨간 볼펜, 검은 볼펜, 샤프, 샤프심, 지우개, 자, 그리고 커터칼. 얇은 필통에는 정말 필요할 만한 것들만 들어있었다. 맞는 필통이 없어 주머니에다 오만가지 색의 색연필과 펜을 들고 다니는 나로서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는 대왕 고래 그림 옆에 작은 고래 한 마리를 그려 넣은 다음 그에게 보여주었다.
“짜잔~”
“... 그건 대왕 고래가 아니잖아.”
그의 말대로 내가 그린 아기 고래는 대왕 고래라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스티커나 과자 상자에서 볼 법한, ‘고래 그림’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는 그것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나름 내 스타일대로 열심히 그렸는데 핀잔을 주다니.
“그래? 그럼 이렇게 하면 되겠네.”
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아기 고래의 머리 위에 왕관을 그려 넣었다.
“자, 이제 ‘대왕’ 고래지?”
“......”
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어서 나는 두 고래 사이에 하트도 하나 그려 넣었다.
“엄마 고래, 아기 고래, 하트~♡”
“이게 뭐야.”
“어차피 나 준 거니까 내 거잖아. 내 맘이야~ 그리고 평행우주 중엔 이런 해피엔딩도 있지 않겠어?”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의 침묵에 힘입어, 나는 말이 되든 안 되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꺼내었다.
“근데 생각해 보면 신기하지 않아? 그 많고 많은 평행우주 중에 우리가 하필 여기 있다는 게. 셀 수도 없이 갈라졌는데, 그 수많은 나 중에 지금 여기, 이곳에 있는 내가 나라니. 그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어?”
“... 그래봤자 모든 경우의 수를 전부 다 합치면 확률은 1이야. 내가 어느 세상에 있든 어차피 그중 하나일 거고, 거기 있는 게 별로 특별한 것도 아니잖아.”
“으휴~ 정말. 이런 비관론자. 그럼 반대로, 평행우주가 없다면 어때? 우리가 이렇게 있는 건 필연이란 거지? 그럼 대단한 거 맞지?”
“어. 대단하게 비극적인 일이지.”
“아우, 야!”
나는 짜증이 치밀어 올라 그에게 필통을 던졌고, 그는 실실 웃으며 내가 던진 필통을 받았다. 내가 부글거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그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방금 이 필통이 날아온 거리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해?”
“뭐야 갑자기? 그야 이 테이블 길이겠지.”
“응. 더 정확히는 네 손과 내 손 사이의 거리고.”
“그래서?”
“그게 얼마나 될 거 같아?”
나는 그의 눈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꿍꿍이를 감추고 있는, 저번에 나한테 다 뒤집어 씌워놓고 아닌 척하던 그 뻔뻔한 눈이었다. 함정인 건 알겠는데, 거기에 안 걸릴 뾰족한 수가 도통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가장 단순한 답을 내놓았다.
“대략 80cm?”
“땡.”
“그럼 뭔데?”
“평생.”
“... 뭐?”
무슨 난센스 퀴즈 같은 거겠지 하고 짐작은 했다만, 이건 답을 들어도 당최 모르겠다. 그가 필통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이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3차원이 아니라 그 이상, 즉 적어도 4차원이란 거 알아? 그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뿐이라는 거.”
“으... 응? 3차원 아녔어?”
“우리 뇌가 감각 정보를 통해 인지할 수 있는 게 3차원인 거지, 세상 자체가 3차원인 건 아니야.”
“어?”
“거리감각, 즉 얼마나 가깝고 먼지 아는 것도 사실은 오른쪽 눈과 왼쪽 눈이 각각 받아들인 평면적인 시각정보의 차이를 뇌가 계산하는 거래. 그래서 한쪽 눈이 안 보이면 거리감각이 없어진다더라.”
“아, 그렇구나.”
그는 허공에 세 개의 선을 그었다.
“x, y, z. 선, 평면, 입체. 그리고 여기에 시간을 더한 이 네 가지가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네 개의 차원이라고 들었어.”
“시간? 시간도 차원이라고?”
“응. 현대에 와서 공간과 시간을 따로 구분하지 않는 시공간이란 개념이 생겼어. 이 시공간은 늘 일정하지만은 않고, 중력의 세기에 따라 구부러지기도 한대.”
“아...”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3차원에서 봤을 땐 너와 나 사이의 거리는 네 말대로 대략 80cm 정도겠지만, 그 이상의 차원에서 보면 다를 수 있단 거야. 우리는 알지 못하는 공간의 일그러짐이나 뭐 그런 게 있을 수 있단 얘기지.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적용되는 불변의 법칙이 있으니, 바로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는 것.”
드디어 그 말도 안 되는 답의 풀이가 나오는가 싶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기대에 찬 내 눈빛을 보고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속도라는 개념에는 위치의 변화와 시간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거든. 그럼 빛이 이동한 두 지점 사이의 최단거리를 알아야 하는데, 우린 그걸 알 수가 없네? 고로 다시 원점.”
“... 어?”
왠지 사기당하는 기분. 슬슬 판을 엎을까 고민하던 찰나 그가 덧붙였다.
“그러니까 우리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건 빼고,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보면, 평생.”
“... 뭔 소린지 전혀 모르겠어.”
“네 손과 내 손이 만나는 데 걸리는 시간이야. 아, 평생보단 영원에 더 가까울까? 어차피 만날 일이 없으니까.”
나는 드디어 그가 판 함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태연하게 필통을 가방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아주 적은 가능성의 기적이니 필연이니, 그만큼 멀고 하찮은 거라고. 그런 거에 큰 의미 두지 마.”
꼭 나를 위해서 조언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결국 또 선을 그으며 그 뒤에 숨고 있는 거다. 똑똑한 척, 잘난 척, 어려운 소리 늘어놓고는 상대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휙 도망가는 거. 기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