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2)

by Outis

쪼옥.

음료수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서 나는 컵을 다시 내려놓았다.


잘그락. 그새 제법 녹아 둥글어진 얼음들이 서로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매끈한 플라스틱 표면에 맺힌 물방울들이 주르륵 흘러내려 밑에 깔린 냅킨은 점점 울상을 지었다.

시큼한 레모네이드를 바로 삼키지 않고 입에 머금은 채, 나는 앞에 앉아 있는 녀석을 힐끔 쳐다보았다.


‘불편해.’


다 마실 때까지 같이 있어주겠다더니, 정말로 ‘같이 있어만’ 줄 줄이야.


어림잡아 10여 분 동안 우린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서, 나는 음료수만 마시고 쟤는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같은 자세로 꼼짝 않고 있는 게 꼭 마네킹이랑 앉아 있는 기분이다.


말을 걸어 볼래도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타이밍조차 모르겠다. 이러다가 딱히 다 마시고 싶지도 않았던 레모네이드만 끝내게 생겼다.

컵을 비우면 그제야 “다 마셨으면 이제 가자” 하고 움직이는 거 아냐? 나는 이제 절반 정도 남은 연노랑 음료수를 바라보며 그 장면을 상상했다. 쟤라면 충분히 그럴만한데. 실제로 그러면 난 어떤 기분이 들까.


‘뭔가 열받을 거 같아.’


아직 일어난 일도 아닌데 벌써부터 기가 찬다.

꿀꺽. 나는 음료수를 삼키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그가 눈만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억지로 안 있어도 돼.”


“... 어?”


조금 놀랐는지 그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들었다.


“지루해 보여서. 나 때문에 일부러 안 있어도 돼.”


그는 잠시 멍하니 나를 쳐다보다가, 몸을 뒤로 젖히며 말했다.


“지루하지 않은데.”


‘엄청 지루해 보이던데 뭘!’


왠지 오기가 생긴다. 사회성 부족한 거야 진작 알고 있었지만, 사람이 계속 그런 핑계 뒤에 숨으면 안 되지. 본인이 얼마나 눈치가 없는지, 얼마나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지, 얘를 위해서도 알려줘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마저 느껴졌다.


“그래? 난 또 테이블만 보고 있길래 되게 싫은가 보다 했지.”


“아닌데.”


“말없이 앉아만 있으니까 불편해 보여. 별로 할 말도 없는 거 같고.”


“네가 아무 말도 안 하길래. 난 하나도 안 불편해.”


“... 너 효율 엄청 좋아하잖아. 이러고 있으면 시간낭비 아냐?”


“시간낭비? 왜?”


“여기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만 보내고 있잖아.”


“아~ 아니야. 머릿속으로 영작 중이거든.”


“......”


뭐 이런 게 다 있담. 이건 눈치가 없는 정도가 아니잖아. 그런데 어쩐지 논리로는 파고들 틈이 없다.

이제 남은 방법은 “네가 그러고 있어서 나는 기분이 나빴어”라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저런 놈한테 그랬다간 “그게 왜 기분이 나쁘지?” 하고 되려 날 이상한 사람 취급할 게 뻔하다.

결국, 종 자체가 틀린 거다.


내가 지금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알 리 없는 그는 자기만의 착각에 빠져 부연설명을 해댔다.


“어제 정리하면서 영작은 미리 다 해놔서, 아까 하기로 한 마지막 파트만 남았어. 이미 나온 표현만 잘 가다듬으면 되니까 어렵지 않아.”


“... 미리 다 했다고?”


“어.”


“나랑 대본 완성하기도 전에?”


“어. 어차피 오늘 만나도 별로 달라질 건 없을 거 같아서.”


뭔 놈의 근자감이람. 살짝 멋쩍어하면서 피식 웃는 게 더 열받는다.


‘으윽~ 재수 없어!’


한참 속으로 흉을 보고 있는데, 예상외의 한 마디가 훅 하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안 싫어.”


그의 시선이 다시 테이블 위로 향했다.


“......”


비겁해. 그런 말을 하고서 그렇게 도망가면 나는 어떡하라고.


목에 걸린 어색함을 넘겨줄 뭔가가 필요해서 나는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딸그락. 그새 얼음이 또 녹았는지 맛이 아까보다 더 밍밍해졌다.

표면적으로는 전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지만, 안에서는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뾰족한 얼음이 둥글게 녹아가는 것처럼, 내가 느꼈던 불편함도 조금씩 녹아내렸다.


뭔가 껍질이 한 겹 벗겨진 느낌이 든다.


어렸을 적부터 사람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두꺼운 껍질에 싸여 있는 상상을 해왔다. 그 껍질에 가려져서 서로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게 아닐까, 그래서 사람들은 ‘이해’라는 ‘오해’를 쌓아가는 게 아닐까, 하고.

안에 있는 마음을 보려면 껍질을 벗겨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거다. 부딪혀서 깨버렸다간 알맹이인 마음도 멍들 수 있다.

먼저 자기 껍질을 벗어 보이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상대가 그에 응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자칫 잘못하면 자기만 바보가 될 뿐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어렵다. 그리고 뭣보다 가장 난감한 건,


“하나 물어도 돼?”


“뭔데?”


“고래 그림은 왜 그리는 거야?”


내가 상대한테 내민 손이 그에게 맹렬한 펀치가 될지, 화합을 구하는 손길이 될지, 난 알 도리가 없다는 것.


그의 눈에 얼핏 놀라움과 망설임이 스쳤다. 그것도 잠시, 유리물이 모양을 잡아가는 것처럼 그의 얼굴에 흠잡을 데 없는 미소가 지어졌다.


“글쎄? 딱히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아마도 크고 멋있어서가 아닐까? 남자들은 원래 크고 강한 걸 좋아하잖아.”


살짝 비쳤던 마음이, 한 꺼풀 벗겨졌다고 생각했던 껍질이 단단해져 간다. 딱지처럼 굳어져서 다시는 그 안을 보여주지 않을 거 같다.

왠지 그런 건 싫다는 생각에, 나는 그만 부딪혀 버렸다.


“거짓말.”


... 어? 뭐라고?


“거짓말이야. 넌 그런 애가 아니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그가 여유롭게 웃으며 날 떠보고 있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너처럼 효율, 효율 따지고는 애가 별 의미도 없는 짓을, 그것도 수업 시간에,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을 계속한다고?”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널 많이 봐왔는지도 모른다.


“몇 번..?”


“너한테 대왕 고래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지?”


“......”


저건 틀림없이 정곡을 찔린 사람의 표정이다. 좋아,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봐야지. 설령 내가 ‘이해’라 믿는 것이 ‘오해’라 할지라도.


“좋아하거든. 네 고래 그림.”


먼저 내보이는 건 부끄럽지만, 지금 저 틈새를 뚫고 가지 않으면 오해를 이해로 바꿀 기회도 없어.


“나 하나만 그려줄 수 있어?”


“... 종이 없는데.”


도망치면 쫓아가서 잡아오면 돼.


“아까 그 프린트해 온 거 있잖아. 거기 뒷면에 그려줘.”


“... 잘 못 그리는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괜찮아. 평소에 그리던 거면 충분해.”


이미 지구 끝까지 쫓아갈 거라고 한 마당에, 뭐.




<잠시 후>


“못 그리기는! 잘만 그리잖아.”


“......”


내 칭찬을 듣고 그가 고개를 더 푹 숙인다. 나는 빨개진 그의 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

하얀 종이 위로 고래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깐깐한 샤프심으로 어떻게 저런 부드러운 선을 그려낼 수 있을까. 아마 같은 곳을 몇 번이고 두드리는 저 조심스럽고 섬세한 터치 때문이겠지.

문득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그 손길이 떠올랐다.


“자, 여기...”


그는 내 눈을 피하며 어느새 뚝딱 그려낸 그림을 내밀었다.


“와! 진짜 잘 그렸다. 고마워.”


실제로도 준수한 실력이지만, 나는 일부러 폭풍 칭찬을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더 내려갈 데 없는 그의 눈이 갈 곳을 잃고 헤매었다.


“근데 고래 눈이 좀 슬퍼 보여.”


“원래 그래.”


“그런가? 혼자 있어서 슬픈 게 아닐까?”


“무슨, 그저 그림일 뿐이야. 쓸데없이 감정이입하지 마.”


퉁명스럽고 뾰족한 말투. 숨기고 싶은 게 있어 일부러 저런다는 것쯤 이젠 안다. 나도 제법 경험치가 생겼단 말이지. 쌀쌀맞게 거리를 두는 길고양이에겐 조금씩 완급조절을 하며 다가갈 필요가 있단 걸.


“근데 정말, 왜 꼭 한 마리만 그리는 거야? 외로워 보이잖아.”


다 쓴 샤프와 지우개를 필통에 챙겨 넣으며 그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대왕 고래는 원래 혼자 다녀.”


“정말?”


“응. 번식기랑 새끼 키울 때 빼고.”


“그렇구나. 고래에 대해 잘 아네?”


“그렇지도 않아.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 것뿐이야.”


“흐음~ 근데 대왕 고래가 특별한 이유는 뭐야?”


부메랑처럼 끈질기게 되돌아온 내 질문에 그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혼자 살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찾기 힘든 거.”


그러고는 내 앞에 놓인 자기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완성된 고래를 대할 때마다 짓는, 쓸쓸함이 묻어나는 웃음을 그렸다.


“그렇게 큰데 찾기가 힘들어?”


“아무리 커봤자 바다에 비하면 보잘것없이 작으니까.”


“그래도. 과학자들이 다 추적하고 그러지 않아?”


“일일이는 모르겠지만 아마 대략적으로는 파악하고 있겠지. 멸종 위기종이니.”


“멸종 위기? 왜?”


“고래기름을 얻으려고 많이 죽였대. 국제적 제재에도 포경은 아직 계속되고 있고.”


“불쌍하다. 너무 잔인해.”


그가 눈을 들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그 의중을 알 수 없는, 텅 빈 가운데 절실함이 숨어 있는 시선에 놀라 순간 주춤했다.


“왜... 그래?”


“... 아니.”


그가 다시 그림으로 눈을 돌렸다.


“대왕 고래가 점점 사라져서 마지막 한 마리만 남았을 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의 입에 아까 그 미소가 슬며시 되돌아왔다.


“그 한 마리가 죽는 날, 다들 아직도 바다 어딘가에 그 거대한 생명체가 헤엄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나도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보았다. 과연, 저 말대로라면 이런 눈을 하고 있을 법도 하다.


- 쓸데없이 감정이입하지 마.


쓸데없다니. 그림도 결국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수단인데. 그린 사람의 감정이 그림에 실리는 것도, 보는 사람이 그걸 읽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잖아.

보여놓고 보지 말라는 건 뭔 심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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