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S(국가정보원) 본부 지하의 한 취조실. 소년과 팰런 과장은 너비가 1미터 정도 되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과장의 뒤에는 CSA요원인 홀(Hall)이 경호원처럼 서있었다. 좌우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길게 늘어선 NIS 건물, 그 왼쪽 날개 끝에 위치한 CSA에서 벗어나 다른 곳에 와 본 것은 소년으로서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래봤자 삭막한 분위기는 변함이 없었지만.
“A, 벤을 구하고 싶지 않나?”
벤을 구한다, 그 한 마디에 소년의 심장이 반응했다. 지난 2년간 존재감이 전혀 없던 그것은 고문을 받을 때만 감전된 개구리 다리같이 팔딱였었다. 생존을 위해 제멋대로 몸부림치는 그 꼴이 소년은 너무 보기 싫었다. 그에게 심장은 수치심의 뿌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뭔가 달랐다. 산 송장인 소년을 나무라는 듯 스스로에게 수천 개의 바늘을 꽂고서 그것이 울부짖고 있었다.
푸짐한 살집에 가려진 팰런 과장의 예리한 눈이 소년의 심적 변화를 포착했다. 이만하면 상대가 충분히 동요되었는 생각에 그는 본론을 꺼내었다.
“LoS의 잔당에 대한 수사를 도와줘. 놈들을 잡아들이는 과정에서 분명 벤의 행방도 찾을 수 있을 거야.”
“... 내가 뭘 하면 돼?”
과장이 고개를 끄덕여 신호를 보내자, 홀 요원이 까만 서류가방 같은 물건을 들고 와 과장이 앉은 쪽 책상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그걸 본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역시 알아보는군. 이게 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
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LoS는 이걸 ‘Heaven’s Door(천국의 문)’라고 부른다더군.”
천국? 소년은 눈을 껌뻑였다. 벤은 분명 저것을 ‘지옥을 여는 문’이라 불렀는데. 소년은 이어지는 과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놈들의 목적이 ‘천국’에 있는 만큼, 그 문이라 불리는 이것엔 수많은 정보가 담겨 있을 게 틀림없어.”
과장이 물건을 열자 안에 든 것이 드러났다. 꼭 컴퓨터같이 생긴 그것은 화면에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보다시피 암호로 잠겨 있는데, 우리로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열 수가 없었어. 하지만 벤이 직접 가르친 너라면 다르지 않을까.”
소년은 마른침을 삼켰다. 바짝 말라있는 식도에 메마른 공기만 들어가니 목이 따끔거렸다. 소년이 저걸 보는 건 이걸로 두 번째였다. 처음 본 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벤에게 혼이 났다.
- 다시는 손대지 마.
“네가 이걸 열어서 우리 수사에 협조해 준다면,”
- 저건 절대 열어선 안돼.
“벤에게는 최대한으로 선처를 베풀 것을 약속하지.”
소년은 망설였다. 벤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그에 따를 것인가, 아니면.
“... 알겠어.”
위잉. 아무도 없는 공터, 그 허공에 검은 구멍이 열렸다.
털썩. 떠밀리듯이 구멍에서 떨어진 소년의 몸은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땅에 떨어졌다.
“아으..! 갑자기 이런데 처박다니!”
소년은 얼얼한 뒤통수를 문지르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픔보단 미처 대응하지 못하고 꼴사납게 추락한 것에 더 짜증이 났다. 소년은 애써 태연한 척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면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눈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허공의 구멍은 닫혔고, 적의 모습은 아직 확인이 안 되었다.
‘그렇다면 놈은 여기 어딘가에 숨어 있단 거겠지. 세상에, 이렇게 멀리서 나를 붙잡다니.’
소년은 주변을 살폈다. 해상도가 떨어지는 그래픽처럼 모든 게 뭉뚱그려져 보이는 스산한 풍경. 아무래도 사람이 사는 곳 같진 않았다.
‘벤이랑 똑같이 생긴 녀석한테서 날 떨어뜨려 놓으려는 심산인가? 역시 녀석에겐 뭔가 있는 게 틀림없어..?!’
순간 뒤에서 날아드는 살기를 느낀 소년은 급히 몸을 옆으로 틀었다. 날카로운 뭔가가 소년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고무호스 같은 줄 끝에 매달린 화살촉 같은 물체. 변형되어 있었지만 그것이 사람의 팔과 손이라는 걸 소년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몸을 변형시켜 싸우는 타입인가? 본체는 보이지도 않았는데. 넓은 공격 범위에 이런 스피드라니. 반칙이잖아.’
소년은 땅을 짚어 무너진 무게중심을 되찾은 뒤, 튕기듯이 일어나 팔이 날아온 궤적을 역으로 추적했다. 그곳에는 검은 양복을 입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장발의 남자가 있었다. 소년은 손등으로 뺨에 흐르고 있는 피를 닦으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무슨 맨 인 블랙이야? 센스 하고는.’
쯧, 하고 소년은 혀를 차며 고운 미간을 구겼다. 사실 생김새야 아무 상관없었다. 문제는 상대와 자신의 상성이 너무 안 맞는다는 것이었다. 소년은 직접적인 물리공격보단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법칙’에 간섭하여 실력을 행사하는 타입인 데다, ‘천국’의 안위를 위협할 수준의 힘은 쓸 수 없다는 제한이 걸려 있었다. 현재 그가 조작할 수 있는 힘은 가장 약한 힘인 중력. 그것도 결계를 쳐서 외부와 차단된 공간을 만들지 못하면 시간에는 손을 댈 수 없어 공간 밖에 비틀 수 없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러한 거리 조작의 이점을 상쇄시킬 능력을 가진 적을 만난 것이다. 그 외의 능력은 눈을 통한 정신 교란과 큐브를 이용한 ‘코어’에의 직접적인 공격인데, 선글라스에 막혀 남자의 눈은 볼 수 없을뿐더러 큐브는 벤의 반격으로 고장이 난 상태였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방도를 생각할 여유 따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남자가 말도 안 되는 속력으로 소년에게 뛰어들었다. 소년은 공간을 늘려 최대한 남자와 거리를 벌리며 그의 펀치를 팔로 막아냈지만,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튕겨져 나갔다.
“큭!”
남자는 용케 넘어지지 않고 버틴 소년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그의 다리가 창으로 변해 소년을 향해 꽂혀 들었다. 소년은 공간 조작으로 시간을 벌어 가까스로 피했으나, 늘어난 남자의 팔에 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커억!”
남자는 발버둥 치는 소년을 한 손으로 가뿐히 들어 올렸다. 소년은 우악스러운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점점 힘이 빠지면서 그가 할 수 있는 건 손톱으로 남자의 손과 팔을 긁어대는 것이 전부였고, 그나마 낼 수 있는 생채기도 새끼 고양이가 나무 기둥에 남긴 가느다란 발톱 자국처럼 타격감 없는 것이었다. 이윽고 소년의 양팔마저 밑으로 툭 떨어졌다.
소년이 저항을 멈추자 남자는 다른 한 손을 치켜들었다. 뾰족한 꼬챙이 모양으로 변한 남자의 손이 소년의 가슴 정중앙을 노렸다. 마치 신에게 심장을 바치는 고대 의식의 한 장면 같았다. 남자의 손이 소년을 찌르려는 찰나, 가엾은 제물을 구하기 위해 또 다른 신이 보낸 사자처럼 황금빛 채찍이 날아들었다. 휘익. 채찍에 붙잡힌 남자의 팔이 전기에 감전된 것같이 부르르 떨렸다. 팔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자 여태껏 무표정이던 남자가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는 채찍이 날아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하얀 늑대 탈을 쓴 남자가 채찍을 쥐고 있었다. 그는 물이 빠져 허옇게 얼룩덜룩한 연회색 카고 바지에 소매가 떨어져 티셔츠에서 탱크톱이 된 것 같은 하얀 윗도리를 입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여기저기가 찢어져 있었다. 민소매라서 훤히 드러난 그의 팔근육은 채찍을 팽팽히 당기고 있는데도 여유로워 보였다.
“이 정도 시간 벌기면 되겠습니까?”
늑대 탈을 쓴 남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년의 목을 틀어쥐고 있던 남자의 손가락이 하나씩 뒤로 구부러지기 시작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방해꾼에게 정신이 팔려 다 잡은 소년은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던 남자는 얼른 소년을 돌아보았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두 눈이 크게 떠지고,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이 벌어지면서 앙다문 이빨이 드러났다. 열 손가락이 뒤로 꺾일 때까지, 꽤나 고통스러울 텐데 남자는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채찍에 잡힌 팔뿐만 아니라 소년을 잡고 있던 손부터 시작해서 남자의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이렇다 할 반격도 하지 못한 채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웬 위험천만한 짓을 하는 놈이 다 있네.”
남자의 손에서 해방된 소년이 시퍼렇게 멍든 목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 늑대 탈을 쓴 남자는 자신을 두고 한 말임을 알고 어깨를 으쓱했다.
“이런 신체변형 타입은 신경을 마비시키는 게 제일이니까요. 방금 당신도 했잖아요.”
“나야 어쩔 수 없이...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까딱 잘못하면 ‘최종 보스’를 깨울 수도 있다고. 언제부터 이런 짓을 해온 거야?”
“언제부터? 잘은 몰라도 꽤 됐는데요.”
소년은 금방이라도 공격할 태세를 취하며 늑대 탈을 쓴 남자를 노려보았다.
“너, 누구야?”
“이거야 원. 도와준 사람한테는 인사가 먼저 아닙니까?”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자세를 풀고 양복 입은 남자를 가리켰다.
“이 녀석은 내가 처리해도 상관없겠지?”
“얼마든지요. 그럼 채찍을 거둘까요?”
“... 아니.”
소년은 쓴 약을 삼킨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처음 보는 이상한 놈에게 힘을 빌리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하지만 전자기력을 써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데다, 더 이상의 도박은 사양하고 싶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는 감전되어 몸이 잘 움직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눈앞의 소년을 해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이 들렸다가 떨어졌고, 손이 칼처럼 변하려다 다시 돌아왔다. 이어지는 실패에 대한 좌절이라든지, 과정과 결과의 의미에 대한 고민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는, 그저 프로그램된 대로 실행하고 있는 고장 난 기계 같았다. 소년은 그런 남자의 앞에 쪼그려 앉아 중얼거렸다.
“큐브가 고장 나 버려서 직접 손을 댈 수밖에 없겠네. 께름칙하게..."
그때 남자의 선글라스가 내려앉으면서 처음으로 그의 눈이 드러났다.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소년은 망설임 없이 손을 내질렀다. 푸욱. 촤악. 소년이 그의 가슴에서 푸르게 빛나는 구체를 빼내자 남자는 맥없이 앞으로 쓰러졌다. 자기에게 쓰러진 남자를 밀쳐내고 소년은 몸을 일으켰다. 땅에 엎어진 남자의 몸이 까만 재로 변해갔다.
“아 젠장, 전기 올랐어.”
괜히 짜증을 부리는 소년에게 탈을 쓴 남자가 채찍을 거두며 말했다.
“그냥 두라고 하신 건 당신입니다.”
“그랬지. 도와줘서 고마워.”
인사를 건네면서 소년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의 몸에서 빼낸 구체를 몰래 점퍼 주머니 속에 넣었다. 남자는 탈에 가려진 눈으로 이러한 소년의 행동을 다 보고 있었지만 모른척했다.
“별말씀을요.”
“인사했으니까 이제 물어도 되겠지? 넌 누구야?”
“‘저희’는 이 ‘천국’의 ‘시스템’에 저항하는 자들입니다.”
남자의 말이 바로 이해가 안 가는지 잠시 멍하니 있던 소년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삐딱하게 남자를 쳐다보았다.
“레지스탕스?”
“그런 셈이죠.”
“진짜? 정말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생겼네.”
남자는 화를 누르는 것처럼 한 톤 내려간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 보스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저와 함께 가시죠.”
그는 채찍을 들어 보이며 여차하면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잡아가겠다는 뜻을 비쳤다. 소년은 불끈거리는 그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 그 양복쟁이와 대등하게 줄다리기를 했을 정도의 힘이야. 지금 상태에서 이 녀석과 싸우는 건 리스크가 너무 커. 그렇다고 정체도 의도도 잘 모르는 자들에게 끌려가고 싶진 않은데...’
소년은 아까 벤이 있던 아파트로 통하는 문을 열 준비를 하면서 능청을 떨었다.
“보스라. 솔직히 흥미는 있는데, 지금은 선약이 있어서 말이지. 나중에 다시 오지 않을래?”
“아까 같이 계시던 분이라면 이미 놈들에게 끌려가셨습니다. 원하시면 그 집까지 같이 가드리죠.”
이미 수를 다 읽히고 있음을 깨닫고 소년은 도망칠 계획을 포기했다. 게다가 벤과 닮은 그가 잡혀갔다는 말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었다. 그와 자신을 떨어뜨려 놓기 위해 양복 입은 남자를 보낸 마당에 그를 이미 노출된 장소에 둘 리 만무했다. 그럼 이제 남은 옵션은 둘이었다. 하나는 벤을 닮은 그를 구하러 가는 것.
‘녀석을 잡아간 놈들과 그 양복쟁이는 한패. 그거 하나 처리하는데도 이렇게 대미지가 컸는데, 아무 정보도 작전도 없이 혼자 적의 본진으로 쳐들어가는 건 미친 짓이야.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정보, 그리고...’
소년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느새 밝아 오는 하늘처럼 차분한 회청색 눈이 남은 하나의 길을 향했다.
“안내해. 당신네 보스한테로.”
늑대 탈을 쓴 남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허공을 향해 팔을 뻗자 손목의 팔찌가 빛나면서 그 앞에 검은 구멍이 열렸다. 그걸 본 소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스템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랬지..? 그런데 어떻게 그런 능력을..?”
남자는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저희도 목숨을 걸고 있으니까요.”
“... 목숨이라. 과연.”
소년은 남자를 따라 검은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나온 곳은 폐허가 된, 마치 거대한 재해가 휩쓸고 간 뒤 수십 년은 족히 지난 것 같은 도시였다.
“이쪽입니다.”
늑대 탈을 쓴 남자는 웬 가게로 소년을 이끌었다. 소년은 거의 떨어지기 일보 직전인 가게 간판에 적힌 이름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읽었다.
“문 버스트(Moon Bur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