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방인

by Outis

미국 웨스트버지니아(West Virginia) 주에 위치한 어느 산골마을. 애팔래치아 산맥(Appalachian Mountains)의 수려한 자연경관과 온천욕을 즐기러 찾아오는 관광객을 제외하면 그 얼굴이 그 얼굴인 조용한 동네였다.


출근 시간도 통학 시간도 훌쩍 넘긴 오전의 어느 한 자락, 자그마한 호텔 앞 공원 벤치에 어떤 남루한 행색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스스로 자른 것처럼 비뚤비뚤한 그의 갈색 머리카락은 어깨에 지저분하게 늘어뜨려져 있었고, 얼굴에는 수염이 덥수룩했다. 원래 그런 색인지 아니면 세탁을 자주 하지 않아 때가 탄 건지, 그가 입은 얇은 버버리 코트는 마치 피단의 가운데 부분 같은 녹색을 띠고 있었고, 소매 끝은 닳아 있었다. 코트 안에는 대충 구색이나 맞추려고 서랍에서 아무거나 꺼내 입은 듯한 체크무늬 셔츠가 보였다. 그 밑으로는 물 빠진 느슨한 청바지와 낡은 고동색 구두가 있었는데, 유난히 길고 펑퍼짐한 바지자락이 구두 위를 덮고 있었다.

앞으로 상체를 쭉 내밀고 쩍 벌린 무릎 위에 팔꿈치를 얹은 그는 다리를 잘게 떨었다. 흐리멍덩한 갈색 눈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마을 아이들과 엄마들의 일상을 무심히 담고 있었다. 공원에 있는 사람들은 그의 존재가 익숙한지 크게 경계하지는 않았지만, 몇몇 엄마들은 달갑지 않은 눈으로 가끔 그를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


남자가 앉은 벤치 뒤로 회색 지프 한 대가 노랫가락을 흘리며 지나갔다.


“Country roads, take me home to the place I belong(시골길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 줘요, 나의 보금자리로)~ West Virginia Mountain Momma. Take me home, Country road(웨스트버지니아의 어머니 산이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 줘요, 시골길이여)...”


잘못도 없이 지프의 무거운 바퀴에 눌린 자갈들이 바드득 이를 갈았다. 남자는 허리를 펴고 지프가 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는 공원 뒤에 위치한 호텔로 가고 있었다. 어쩐지 못 보던 차다 싶었는데 역시 관광객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작게 흔들며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투덜거렸다.


“허, 시골길. 더럽게 시골이지. 기왕이면 화려한 도시가 좋으련만, 젠장할!”


그는 손에 든 은빛 수통의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혀와 목으로 알싸한 맛이 흘러들었다.


미국의 대표적 컨트리 싱어송라이터인 ‘존 덴버(John Denver)’가 부른 불후의 명곡이자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공식 주가(州哥), “Take Me Home, Country Roads”.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그 노래가 남자는 유난히 싫었다. 공식 주가인 탓에 무슨 행사만 있으면 여기저기서 그 노래를 틀어대는 데다가, 시골이랑은 전혀 인연도 없을 거 같은 관광객들이 가짜 향수에 젖어서 불러대는 것이 가짢기도 했지만, 그가 정말로 싫어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리운 고향 웨스트버지니아로 향하는 노래 속 주인공의 벅찬 감정은 지난 4년간 이곳에 감금되다시피 살고 있는 그에게 짜증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에게 그리운 고향은 진작에 사라진 지 오래였기 때문이었다.


‘그날’, 그 끔찍한 학살이 있었던 날, 그가 믿고 사랑했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는 괜스레 시골 탓을 하며 술로 괴로운 기억을 묻었다.


남자는 입가에 묻은 위스키를 코트 소매로 훔치고는, 이번엔 어떤 바보가 찾아왔나 보려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키가 큰 금발머리의 여자가 운전석에서 내리더니 뒷좌석에 앉은 절름발이 노인이 차에서 내릴 수 있도록 부축했다. 아마도 건강상의 이유로 깨끗한 공기와 온천을 찾은 할아버지와 그를 모시고 온 손녀 또는 간병인인 것 같았다. 멀어서 얼굴 이목구비까진 뚜렷이 안 보였지만, 여자는 하얗고 깨끗한 피부와 늘씬한 몸매의 소유자였다. 의외로 미인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남자의 화가 조금 누그러졌다.


남자는 자기 옆에 앉아 있는 다른 남자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는 자신과 달리 말끔히 옷을 차려입고 신문을 읽고 있었다. 멀리서는 하루라도 남 얘기를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치는 아줌마들이 자신을 입방아에 올리고 찧어대고 있었다. 안 들려도 내용은 뻔했다. 하필이면 이 마을에 굴러들어 와서는 애들 편하게 놀리지도 못하게 꼭 저기 앉아 있담, 음흉한 눈 좀 보소, 어쩌면 성범죄자일지도, 아동성애자면 어쩌지, 쓰레기 자식.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위스키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발목에 전자발찌를 채운 죄, 그에 대한 기억이 알싸한 맛을 따라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런 주제에 여자는 무슨.’





산골 마을의 작은 호텔 ‘페어 마운틴 인(Fair Mountain Inn)’. 프런트 데스크에는 황갈색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 묶고 호텔 유니폼을 입은 20대 중반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달린 명찰에는 엘리사벳 그린(Elisabeth Green)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엘리사벳, 통칭 리즈(Liz)는 평소처럼 책을 읽으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책은 삼류 취급을 받는 서스펜스 소설이었지만, 취향에만 맞으면 세간의 평가 같은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리즈에게 쉽게 읽히고 다소 자극적인 내용은 시간 죽이기용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한창 그녀가 소설에 심취해 있는데, 한가로운 호텔 로비 안으로 손님이 들어왔다. 리즈는 책을 덮고 두꺼운 안경 너머로 손님을 바라보았다. 여자와 절름발이 노인이었다. 여자는 노인을 소파 의자에 앉힌 후 프런트 데스크로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체크인을 하려 하는데요.”


그녀는 금발머리와 깨끗한 하얀 피부, 갈색 눈을 가진 미인이었다. 그냥 예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몸짓과 말투에도 기품이 흘렀다. 그녀가 입고 있으니 편한 캐주얼 의상조차 품격이 느껴질 정도였다. 분위기나 억양을 보아 도시에서 자란 상류층 자제일 것 같다고 생각하며, 리즈는 평생 이 시골마을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더욱 초라하게 여겼다.


“성함은요?”


“엘리사벳 그레이(Elisabeth Gray) 요.”


리즈는 순간 멈칫했다. 엘리사벳? 자신과 같은 이름이 아닌가. 게다가 성씨도 초록(Green)과 회색(Gray)으로 색 이름인 데다, 둘 다 알파벳 G로 시작해서 이니셜이 ‘E.G.’로 같았다. 우연도 이렇게나 절묘한 우연이 또 없을 터였다. 이런 손님이 예약을 했는데 모르고 있었다니. 아마 호텔 주인인 부모님이 예약을 받은 모양이었다. 뭔가 운명적인 예감이 들었지만 리즈는 티를 내지 않고 업무를 계속했다.


“스위트룸 하나에 싱글 침대 둘, 맞으신가요?”


“네.”


“여기 열쇠요. 짐은 올려다 드릴까요?”


“아니요. 제가 직접 할게요.”


“알겠습니다. 부디 편안한 시간 보내세요, 미스 그레이.”


“아, 그냥 리즈라고 불러줘요. 그쪽은 성함이... 어머?”


얼굴만큼이나 말투도 사근사근 예쁜 여자 손님은 리즈의 명찰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저랑 같은 이름이네요?”


“네! 저도 리즈예요.”


리즈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이 자기를 알아 봐준 기쁨, 공통점으로 그와 동등하게 얽힌 뿌듯함. 그 흥분 속에서 리즈의 질투심은 금세 호감으로 바뀌었다.

신기한 듯 손님도 눈을 반짝였다.


“어쩜 이런 우연이 있죠? 지금 보니까 나이도 비슷할 거 같은데,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스물일곱이에요.”


“어머! 저도 스물일곱이에요. 설마 별자리까지 같진 않겠죠?”


“설마요...”


안 그래도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는데, 그런 미신은 거들떠도 안 볼 것처럼 이지적으로 생긴 사람이, 그것도 먼저 물어봐 주다니. 리즈는 경이로움마저 느꼈다.


“그럼 우리 동시에 말해 볼까요? 하나 둘 셋, 전갈자리!”


“전갈자리.”


“말도 안 돼!”


미모의 여자 손님은 팔짝팔짝 뛰면서 주먹으로 데스크를 콩콩 찧었다. 그 솔직하고 서민적인 모습에 리즈는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이 정도면 운명 아닌가요? 당신을 만나게 돼서 너무 기뻐요!”


손님은 한껏 고양되었던 목소리를 낮추며 슬며시 리즈에게 속삭였다.


“실은 저희 할아버지 요양 때문에 왔거든요. 앞으로 한 달이나 이런 곳에... 아, 미안해요.”


혹 ‘이런 곳’이란 말이 리즈에게 실례가 될까 걱정되었는지 손님은 당황하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분홍빛으로 달아오른 뺨이 참 예쁘다고 리즈는 생각했다.


“아니에요. 저도 뛰쳐나가고 싶은걸요.”


유쾌하게 넘어가준 리즈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은 미소를 지으며 손님이 물었다.


“몇 시에 퇴근해요? 괜찮으면 언제 같이 한잔하러 가지 않을래요?”


리즈는 기뻐서 얼른 대답했다.


“근처에 그나마 괜찮은 바가 있어요. 제가 안내할게요.”


“그래요? 거기 마을 분들도 많이 오시나요?”


“아, 네. 여기서 제일 인기 있는 곳이라서요. 시끄러운 거 싫으시면 다른 곳을...”


“아니에요. 시끌시끌한 거 완전 좋아해요.”


두 리즈는 서로를 향해 방긋 웃었다.


“그럼 이따가 9시에 만날까요?”





일찍 농익은 산골마을의 밤. 바는 무료함을 잊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북적였다.

리즈 그린은 뜨끈하게 익은 볼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정마알~ 이런 촌구석, 오늘 밤에라도 당장 떠나고 싶어요. 부모님은 제가 그 망할 호텔을 물려받길 원하시는데, 끅! 난 죽기보다 싫다고요.”


리즈 그레이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를 위로했다.


“너~무 싫죠, 그런 거.”


“알 거 같아요, 내 기분?”


“알아요. 나도 무려 4년이나 할아버지 전담 간병인으로 살아왔는걸요.”


“4년?! 미쳤어요?”


“할아버지께서 나 아니면 안 된다고 성화셔서...”


막 맥주잔을 들어 올리려는 리즈 그레이의 손을 붙잡고 리즈 그린이 진지하게 물었다.


“남자친구는 있어요?”


“아, 아니요. 간병 시작하면서 전 남친이랑 헤어지고, 그 이후로는 전혀...”


“안 되겠네, 당장 그만둬요! 이렇게 이쁜데! 나 같으면 열 명이고 백 명이고 막 사귀었을 텐데.”


“무슨,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깝지도 않아요? 청춘은 한번 가면 다신 돌아오지 않는다고요. 무슨 노인네가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아... 아마 유산은 두둑이 챙겨주시지 않을까.”


“닥쳐요.”


리즈 그린은 눈을 부릅뜨고서 리즈 그레이의 어깨를 잡았다.


“언제 가실지도 모르는 사람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좋은 시절 다 날리지 말고, 오늘이라도 사고 한번 쳐봐요.”


“네? 오늘요?”


“오늘 밤에 호텔로 돌아가지 말라고요. 여기 중 누구 하나 골라봐요. 변변찮은 데라 거기서 거기지만, 혹시 알아요? 의외로 운명의 상대가 숨어 있을지.”


“운명... 리즈를 만난 걸로 오늘 운은 다 쓴 거 같은데요.”


감동한 리즈 그린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그녀는 가엾은 친구를 꼭 구원해 주겠다는 열의에 불타 올랐다.


“하룻밤 상대라도 괜찮아요. 뭐가 됐든 할아버지로부터 벗어날 계기만 되면 충분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운명은 쟁취하는 자의 것이에요!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요. 이대로도 괜찮아요?”


과연 누구에게 하는 소리일까. 리즈 그린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자기 처지야 어떻든 리즈 그레이라도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리즈 그레이는 잠시 그녀의 말을 곱씹더니, 바에 있는 어떤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저 사람은 어때요?”


리즈 그린은 리즈 그레이의 손가락이 가리킨 쪽을 돌아보았다. 미인의 지목을 받은 행운아가 누구인지 알아본 순간, 뜨거운 아스팔트에 쏟아진 물이 금세 증발하는 것처럼 그녀의 머리에서 술기운이 확 가셨다.


“리즈! 그렇게 안 봤는데, 그런 취향이에요?”


“예? 왜요?”


“로맨스를 찍어야지, 서스펜스를 찍을 셈이에요?”


리즈 그린은 리즈 그레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저 사람 악랄한 성범죄자라는 소문이 자자해요. 누가 그러는데 발목에 발찌도 차고 있대요.”


“에이, 설마요.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진짜예요! 한 4년 전인가 이 마을에 왔는데, 저 사람 주변에는 꼭 누군가 붙어 다녀요. 마치 감시하는 것처럼요!”


리즈 그레이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디요?”


“아이 참, 잘 봐요. 저기 저 남자 뒤에 앉은 사람 보이죠? 요새 따라다니는 사람이에요. 공원에 있을 때도 꼭 옆에 붙어있는다고요.”


“공원이요?”


“저 남자 아침에는 꼭 공원에 나오거든요. 하는 일도 없는지 매일 벤치에 앉아서 애들 노는 거나 쳐다보고. 어쩌면 아동 성범죄자인지도 몰라요!”


아동 성범죄자란 말에 아연실색한 리즈 그레이는 이번엔 곁눈으로 조심스레 그를 훔쳐보았다. 남루한 차림을 한 남자는 혼자서 외로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잠시 그를 관찰하던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어 리즈 그린에게 말했다.


“그런데 행색이 저래서 그렇지, 뭔가 몸에 밴 분위기가 기품이 있달까... 어릴 때 귀하게 자란 느낌이 나는데요? 그리고 듣자 하니 일도 안 하는 거 같은데, 지금 꽤 값비싼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 걸요?”


“뭐, 돈은 좀 있을 수도 있죠. 좋은 집안에서 자랐다고 사이코가 되지 않는다는 법도 없고요.”


“그건 그렇죠. 하지만 여전히 이상해요. 일개 성범죄자에게 감시하는 사람이 계속 붙어 다닌다니. 그것도 4년이나요?”


“엄청 위험한 놈인가 보죠.”


“그 정도로 위험한 범죄자라면 뉴스에도 나왔을 텐데요. 얼굴이랑 실명도 공개되었을 거고요. 새로운 곳에 갈 때마다 꼭 검색해 보는데, 이 근처엔 성범죄자가 산다는 기록은 없었어요. 4년 전부터 있었으면 업데이트가 안 되었을 리도 없고요.”


“그럼... 뭐죠, 저 사람?”


“혹시 말이에요... 스파이인 거 아닐까요?”


“스파이요?”


리즈 그린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깜짝 놀라 얼른 입을 다물었다. 리즈 그레이가 씩 웃으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고, 두 사람의 이마가 맞닿았다.


“리즈, 우리 재밌는 놀이 안 할래요?”

keyword
이전 09화거래(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