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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1)

by Outis

미시간(Michigan) 주 구시가지에 위치한 어느 허름한 한약방. 가게의 절반은 약재나 건강식품, 연고 등 한약방이라는 구실을 세울만한 물품들이, 나머지 절반은 담배와 생필품이 채우고 있었다. 낡은 문에 달린 방울이 하루에 서너 번 울리면 그날은 운수가 좋은 편, 그나마 찾아오는 손님들도 대부분 생필품 코너로 향하기 마련이라, 뭔 뜻인지도 모를 한자로 쓰인 약병들 위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여태 손님 얼굴 한 번 못 본 한약방 주인은 해탈한 표정으로 계산대 안쪽 의자에 앉아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동그란 안경을 쓴 아담한 체격의 동양인으로, 이제 막 60대에 접어든 그의 진회색 머리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꼼꼼하게 땋은 머리는 숱이 적어서 밑으로 내려갈수록 졸졸 새는 수돗물 줄기처럼 얇아졌고, 회색 비니 모자가 점점 비어 가는 정수리를 덮고 있었다. 보푸라기가 난 V넥 카디건은 그간 주인과 함께한 세월을 보여주듯, 원래는 알록달록했을 색이 바래면서 패치워크의 경계선이 흐릿했다.

불상처럼 눈을 지그시 뜨고 앉아 있는 주인과 조용한 가게. 암울한 그림의 완전성은 벌컥 열린 문과 함께 와장창 깨졌다.


“여~ 우(Wu) 선생. 오랜만!”


찰랑! 요란스럽게 등장한 손님이 주인에게 반가이 인사를 건넸다. 드디어 손님이 왔는데 주인은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리프컷 진갈색 머리와 코발트블루 빛깔 눈동자, 검은 후드티와 바지를 입은 훤칠한 키의 남자가 사람 한 명은 족히 들어갈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며 곧장 계산대로 다가왔다.


“오늘도 파리만 날리고 있는 거야? 나 없으면 어쩔 뻔했어 이 가게, 그렇지?”


남자가 넉살 좋게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가게 주인 우 선생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벌레 씹은 얼굴을 하고서 남자가 끌고 온 여행 가방을 턱으로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시체 처리는 안돼. 딴 데 가봐.”


“아, 걱정 마. 살아 있으니까. 아직은... 아마도..?”


남자는 어깨에 메고 있던 검은 더플백을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현금으로 십만 달러. 석 달 대여비로 충분하지?”


줄곧 구겨져 있던 우 선생의 얼굴이 그제야 펴지기 시작했다. 그는 가방 지퍼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현금다발을 어림짐작으로 세었다. 그리고 품 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어 그중 하나를 남자에게 내밀었다. 남자는 열쇠를 받아 들고 씩 웃었다.


“고마워. 참, 이따가 어떤 여자가 와서 날 찾거든 밑으로 오라고 알려줘.”


귀찮은 손님이 하나 더 있다는 말에 우 선생은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델 용케 구했네요.”


막 도착한 금발머리 여자가 지하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자그마한 가게 크기에 비해 지하실은 제법 널찍했고, 방 하나와 화장실까지 있었다. 남자는 낡은 소파에 앉아 그녀를 맞이했다.


“주인이랑 인연이 있어서. 그나저나 차는? 내가 말한 대로 잘 처리하고 왔어?”


여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알려준 폐차장에 가서 당신 가명을 대니까 묻지도 않고 바로 분해해 줬어요. 비용은 당신이 준 현금으로 다 지불했고요.”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이곳 미시간까지 오면서 그들은 추적을 피하기 위해 차를 총 네 번 갈아탔다. 마지막 차는 산산이 뜯긴 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폐기되었다. 그 모든 도주 과정에는 남자의 지인들이 있었다. 여자는 남자가 앉은 소파 옆에 의자 하나를 갖다 놓고 앉으며 말했다.


“생각보다 아는 사람이 많더군요?”


“자본의 힘이지. 특히 이런 동네일수록 돈의 상대적 가치가 커지고 잡을 약점이 많아서 좋아.”


역시 쓰레기 자식. 얼마나 더 이런 놈이랑 행동을 같이 해야 하나. 여자는 속으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캠벨은 어디다 뒀어요?”


“저 비품실 안에. 아직 자고 있어.”


“혼자 뒀다고요? 감시 카메라도 없이?”


그렇게 어렵게 잡아왔는데 혹시나 잘못되면 어쩌려고 이리 태평한지, 여자는 어이가 없었다. 남자는 블루투스 같은 게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시절 출시된 구형 베이비 모니터 수신기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보니까 이런 게 있길래 안에 하나 뒀는데. 의자에 잘 묶어 놨으니까 걱정 마. 어차피 도주로도 저 문 하나뿐이고.”


그래도 명색이 세계 최고의 해커라길래 좀 더 빈틈없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 정도로 뇌에 구멍이 숭숭 뚫렸을 줄이야. 여자는 앞으로 자기가 더 긴장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일어나서 비품실 쪽으로 가려는 그녀를 남자가 막았다.


“심문은 나 혼자서 할 거야.”


여자는 눈썹을 추켜올리며 반대했다.


“절대 안 되죠. 내가 그쪽을 어떻게 믿고요?”


“왜 이래~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 사이에. 무려 방도 같이 썼잖아?”


여자는 역겨움을 꾹 참고, 구렁이 담 넘듯이 넘어가려는 남자의 말꼬투리를 잡았다.


그러는 당신이야 말로 왜 동료를 배제하려는 거예요? 같이 위협을 무릅쓰고 캠벨을 납치해 왔으니 나도 그가 가진 정보를 들을 권리가 있어요.”


“어차피 모니터 있으니까 여기서도 다 들릴 거 아냐. 나 혼자서 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서 그래.”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두고 보면 알게 돼. 정 캠벨을 만나고 싶으면 나 다음에 만나. 암튼, 녀석이 여기서 처음으로 만나는 건 나여야 해.”


남자는 자신을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여자에게 방긋 웃으며 덧붙였다.


“또 한 가지, 끼어들여 놓고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지금부터 알게 될 건 어느 정도 상부에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여자는 팔짱을 끼고 점점 더 의심스럽다는 듯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예요?”


“5년 전이었나? 갑자기 CSA에 공석이 두 개나 생겼지. 당신을 영입함으로써 그중 하나를 메꾸었고.”


“그랬다는 거 같아요.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데이비스와 홀, 한 명은 자동차 결함으로 인한 사고, 다른 한 명은 총기 난사 사건에 휘말려 사망. 교통사고는 그렇다 쳐도, 명색이 정부 비밀 요원인데 마피아도 아니고 훈련받은 군인도 아닌 일반인이 쏜 총에 죽었다는 게 이상하지 않아?”


“타계한 데이비스 요원은 당시 육아 휴직 중이었다고 들었어요. 깜빡 잊고 총을 안 들고나간 거 아닐까요?”


“그럼 그 총은 어디 있는데?”


“안 들고나갔으면 자택에 있었을 거고, 순직 후 회수되었겠죠.”


“내가 알기론 그거 다크웹에 올라왔다가 지금은 NIS 보관실에 있는데.”


“... 예?”


능글맞게 웃고 있는 입과 달리 남자의 눈빛은 차가웠다.


“팰런을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아. 개인마다 차이는 좀 있지만, 조직에 들어가는 순간 인간은 대부분 조직이 주는 이익과 인간성을 맞바꾸기 마련이지. 거기서 더 나아가면 조직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고, 조직을 유지하는 일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 되어 버려. 누군가는 그걸 충성심이라고 부르며 신성시하고, 자신과 같은 또 다른 누군가를 양성하지. 뭐, 어떤 조직이냐에 따라 그게 세상에 좋은 일이 될 수도, 나쁜 일이 될 수도 있지만.”


“......”


여자는 CSA에 들어오게 된 계기를 회상했다. FBI 요원이었던 그녀는 테러리스트를 급습하는 작전에서 큰 실수를 저질렀다. 자괴감에 휩싸여 있는 그녀에게 당시 CSA 과장이었던 팰런이 찾아왔다.


- 한 번의 실수로 모든 걸 내려놓을 셈인가? 자네에겐 뛰어난 재능이 있어. 그 재능, 우리와 함께 이 나라를 지키는데 쓰지 않겠나?


회상을 마친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말이 다 사실인지 알 수 없는 데다,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그 두 사람이 CSA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결론지을 수 없어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냉정함. 남자는 그것만으로 만족했다.


“그럴지도. 어쨌든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으니 몸을 사리라고. 내가 CSA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뿐이니까.”


“내가요? 왜요?”


여자는 이제 더 이상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뜨악해하며 깜빡이는 그녀의 두 눈은 곧 이어진 남자의 말에 얼어붙었다.


“실수는 의외로 그 사람에 대해 많은 걸 알려주거든. 난 당신이 ‘그날’ 실수는 했어도 틀렸다고는 생각 안 해. 그리고 머리카락, 역시 당신은 까만색이 어울리네.”


그때 모니터 수신기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 대체 여기가 어디야..?]


“깨어난 거 같네.”


남자는 소파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비품실을 향해 걸어갔다. 여자는 가만히 서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캠벨은 온몸이 쑤시는 통증 속에서 눈을 떴다.


“으...”


이내 자신이 의자에 묶여 있다는 걸 깨달은 그는 기절하기 직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노인의 품속에서 나온 권총, 그리고 총성. 그는 얼른 자신의 오른쪽 발목을 살폈다. 다행히 발은 멀쩡히 붙어 있었고, 다친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빌어먹을 노인네. 갑자기 총질을 하고... 아, 그녀는?’


캠벨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창고로 쓰이면 딱 좋을 작은 방이었다. 그는 문을 마주 보도록 앉혀져 있었고, 문까지의 거리는 꽤 되었다. 가구는 그가 앉아 있는 의자와 구석에 놓인 다른 의자, 그리고 낡고 녹슨 철제 캐비닛 하나가 전부였다. 벽은 군데군데 페인트가 떨어져 나갔고, 창문도 없었다. 천장 네 귀퉁이와 캐비닛 주변에는 얼마나 오래된 건지 짐작도 안 가는 거미줄이 뭉쳐 있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야..?”


보아하니 납치당한 거 같은데, 그럼 그 여자는 미끼였나. 그러면 그렇지, 나 같은 놈에게 그런 행운이 있을 리가 있나.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캠벨은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키가 큰 수려한 외모의 남자가 들어왔다.


“여, 일어났어?”


남자는 캠벨이 밖을 볼 수 없도록 바로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캠벨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왔다. 그는 허리를 숙여 캠벨의 눈앞에 자기 얼굴을 들이밀고는 씩 웃어 보였다. 캠벨은 처음 보는 그 얼굴에서 왠지 낯설지 않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두려울 정도로 새파란 그의 눈을 피하며 캠벨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누구야?”


“음? 하하, 일단 좋은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하고, 그럼 나쁜 사람이냐 하면... 그건 너 하기에 달렸달까.”


“뭐?”


“그럼 이번엔 내 차례. 너는 누구지?”


캠벨은 말없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목소리 톤을 나긋나긋하게 바꾸고서 대신 대답했다.


“통칭 캠벨, LoS의 ‘장원’ 출신. 장원에서 함께 자란 베네딕트를 도와 ‘프로젝트 헤븐’을 진행했었지? 그런데 그 베네딕트를 배신하고... 이야, 당신도 그다지 좋은 사람 같지는 않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을 쳐다보는 캠벨에게 남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붙잡히자마자 FBI에 술술 다 불었더구먼 뭐. 이정돈 비밀도 아니야. 게다가 우린 인연도 있고.”


“내가, 당신이랑 인연이 있다고?”


“어. 너는 벤을 배신했고, 나는 그 벤, ‘아비스’를 죽였고.”


“뭐?!”


“아, 몰랐어? NIS 놈들 정말 너무하네! 배신은 했어도 한 때 친구였는데 말이야. 부고 정도는 알려줘야지.”


“벤이... 죽었다고?”


캠벨의 떨리는 시선이 허공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남자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기뻐할 줄 알았는데, 아니야?”


“......”


남자는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렇지? 이상하지? 나도 잘 모르겠어. 베네딕트가 없는 지금 누가 LoS를 이끌고 있는지.”


“?!”


“그 얘긴 좀 있다 하기로 하고... 그나저나 너도 참 운도 지지리 없다. 벤이 없어도 LoS가 건재하다니. 그 잔인한 놈들이 배신자인 널 곱게 놔두진 않을 테고, 이렇게 도망쳐 나왔으니까 NIS도 이를 갈고 있겠지? 이거 이거, 사방에 널 죽이고 싶은 사람 투성이구만. 더 이상 ‘캠벨’로서는 못 살 거 같은데?”


이게 다 누구 탓인데 하고 원망하는 캠벨의 눈앞에 남자가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이제 너한테 남은 선택지는 둘. 다시 NIS한테 돌아가서 목숨만 살려만 달라고 빌거나, 아니면 나한테 협조하고 자유의 몸이 되거나.”


“자유?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NIS와 LoS에게 추적당하지 않을 정도로 네 신원을 조작해 줄게. 믿어도 돼. 내 전문분야거든.”


캠벨은 처음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받아들이고 어깨를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물었다.


“... 원하는 게 뭐야?”


“요새 뭔가 이상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거든? 그런데 그게 아무래도 프로젝트 헤븐이랑 연관된 거 같단 말이야. 그리고 당연히, 당신과도.”


꼿꼿이 위를 향해 서있던 남자의 손가락이 캠벨을 향했다. 캠벨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 상관없어. 프로젝트 헤븐은 벌써 15년도 더 전에 폐기되었다고. 난 줄곧 잡혀 있었고.”


남자는 자그맣게 한숨을 쉬더니 구석에 놓인 의자를 가지고 와 캠벨 앞에 앉았다.


“어이, 캠벨. 벤이 죽었는데도 굳이 NIS가 당신을 살려둔 이유에 대해 내가 모를 거 같아?”


서슬이 시퍼런 남자의 눈빛에 캠벨은 간담이 서늘했다. 그는 남자의 눈을 피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피하는 순간 남자가 성난 괴수처럼 달려들 것만 같아서였다. 차갑게 응축된 분노를 담은 남자의 목소리가 캠벨을 협박했다.


“내가 저승사자가 될지 구원의 천사가 될지는 오롯이 당신 하기에 달렸어.”


남자는 후드티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걸 본 캠벨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심장에 말뚝이라도 박힌 것처럼 찌릿한 통증이 그의 가슴에 번져나갔다. 확실한 심증을 얻은 남자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우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그를 추궁했다.


“너, 5년 전에 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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