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troubles melt like lemon drops, away above the chimney tops (모든 괴로움이 레몬 사탕처럼 녹아내리는 곳, 굴뚝 꼭대기보다도 높은 곳).
That’s where you’ll find me(그곳에서 나를 만날 수 있어).
Somewhere over the rainbow(무지개 너머 어딘가)...”
달콤한 목소리가 자아내는 꿈결 같은 노랫소리. 저 앞에서 빛을 등지고 선 그녀가 벤에게 손을 내밀었다.
“날 데리러 와 준거야?”
더 이상 그녀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란 걸 벤은 잘 알았다. 그러나 그녀와 다시 함께 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그는 어디든 따라갈 생각이었다. 설령 그곳이 지옥이래도 상관없었다. 그에겐 그녀의 곁이 천국이므로.
“보고 싶었어, $Ɵ₱ħ...?”
벤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마치 글리치(glitch)가 생기는 것처럼 그의 목소리에 노이즈가 섞여 들었다.
“어라? #&₱ħÎ(지직)... (치지직)... 아?”
그의 입에 담기는 순간 그녀의 이름은 불쾌한 소음으로 바뀌었다. 노이즈는 이제 눈에 보이기까지 했다. 고장 난 텔레비전 화면같이 벤의 눈앞에 회색 줄이 생기면서 시야가 지그재그로 일그러졌다. 깜짝 놀란 벤은 그녀를 향해 급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 이름을 부르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젠 이름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름... 당신 이름이..? 아, 잠시만!”
벤이 쩔쩔매는 사이 그녀가 매정하게 돌아섰다. 벤은 그녀를 쫓아가려 했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기다려! 가지 마!”
벤은 절규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베인 것처럼 아픈 저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 가는데, 이대로 보냈다간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텐데. 이름, 이름을 부르면 돌아봐 줄 텐데.
“잊지 않았어! 잊지 않았다고! 너는, 너는!”
중저음인 벤의 목소리가 점점 가늘게 갈라지더니, 끝에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로 변했다.
“S [치직- 지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이익----------------------]!”
벤은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 어?”
분명 눈은 뜨고 있는데 앞이 뿌옇게 흐려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니 따스한 무언가가 얼굴 양옆으로 흘러내리면서 시야가 또렷해졌다. 처음 보인 것은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얀 천장. 귓바퀴에 고여 있는 미지근한 감촉만큼 거슬린다고 벤은 생각했다.
“... 뭐였지?”
자다가 울 정도로 슬픈 꿈인가 본데, 벤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눈을 뜨고 있는 지금이 현실인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오래 무릎을 꿇고 있으면 피가 잘 안 통해서 다리가 내 것처럼 안 느껴지듯이, 어깨 위에 달린 것이 꼭 남의 머리 같았다.
멍하니 천장을 응시하고 있던 벤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소름이 돋았다. 격자 모양으로 나뉜 새하얀 천장, 밝고 차가운 불빛, 등에 닿은 매트리스의 단단함과 면직류의 뻣뻣한 감촉. 어느 것 하나 익숙지 않았다. 그는 모르는 곳에서 눈을 뜬 것이었다.
머리가 쭈뼛 서면서 섬찟한 기운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보니 그곳은 처음 보는 정방형의 작은 방이었다. 방에는 문 하나와 커다란 거울이 있었고, 침대 외에 가구는 없었다. 벽과 바닥은 천장과 똑같이 하얀색이었다. 벤은 거울 맞은편 벽에 바짝 붙여진 침대에 누워 있었고, 하얀 시트를 덮고 있었다. 침대는 일반 가정용 침대가 아니라 병실에서 쓰는 것 같았다. 침대 측면에는 낙상을 예방하기 위한 사이드 레일이 세워져 있었고, 머리맡 한쪽 코너에는 수액팩이 걸려 있었다.
‘여긴, 병원? 나 입원한 건가?’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벤은 기억을 더듬었다. 수요일, 공원 벤치, 파스텔빛 노을, 복숭아 향, 문 버스트, 퍼플 레인 칵테일, 라디오, 비스듬히 기운 달 그리고, 비명.
“윽!”
순간 극심한 두통과 함께 벤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누가 드릴로 심장에 구멍을 내어 그 안에 용암을 들이부은 것 같았다. 벤은 얼굴을 찡그리고는 본능적으로 옆으로 돌아누우면서 몸을 움츠렸다. 아픈 가슴에 손을 가져간 그때, 스르륵 하고 차가운 이물질이 그의 허리와 옆구리를 쓸었다.
“?!”
소스라치게 놀란 벤은 튀어 오르듯이 일어나 앉았다. 시트를 걷어보니 하얀 환자복과 사지를 구속하고 있는 수갑이 드러났다. 양손목과 발목에 채워진 수갑은 각각 한쪽이 침대에 연결되어 있었다. 침대에 고정된 쪽과 벤을 잡고 있는 쪽 사이는 긴 쇠사슬로 이어져 있었다. 아까 그의 몸에 닿은 것은 그 사슬이었다.
“이게 뭐야!”
벤은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너무 놀라서인지 아까까지 있었던 두통과 흉통이 단숨에 사라졌다. 잔뜩 날카로워진 벤의 감각이 등 뒤의 어떤 기척을 감지해 냈다. 돌아보기 전까지 사각지대였던 뒤쪽 천장 코너에 감시 카메라와 스피커가 달려 있었다. 새카만 카메라 렌즈는 감정은 없고 호기심만 남은 동물의 눈처럼 보였다.
‘누가 날 감시하고 있어. 여긴 보통 병원이 아냐.’
벤은 문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요! 대체 여기가 어디예요? 왜 날 묶어둔 거예요! 어서 풀어 줘요!”
그러나 밖에선 아무 응답도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자 벤은 수갑에서 손을 빼려고 애써 보았다.
“으으, 아. 이익!”
애초에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 피부가 발갛게 부어올라 아프기만 할 뿐 손은 빠지지 않았다. 그래도 벤은 포기하지 않았다. 한참을 수갑과 씨름하던 그는 이번엔 사슬을 공략했다. 그러나 아무리 세게 당겨봐도 소용없었다.
“으, 아! 하아... 이걸 어쩌지?”
이렇듯 하나도 어려운데 네 개나 있다니. 벤은 화끈거리는 손을 어루만지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벤이 저항을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이 거울이 새카맣게 변했다. 시야 끝자락에서 거울 속 사람의 형상을 본 벤은 천천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처음 보는 풍채 좋은 남자가 서있었다. 단정하게 옆가르마를 탄 회색빛 머리칼과 넓은 이마, 주름진 얼굴로 보아 남자는 대략 60대 초반 정도일 것 같았다. 하얀 셔츠의 넓은 칼라는 풍만한 턱에 덮여 안 그래도 짧은 목을 다 가리고 있었다. 그에 더해 회색 줄무늬가 들어간 연두색 넥타이의 두툼한 매듭은 목언저리를 더욱 답답하게 보이게 했다. 남자는 검은 양복 재킷을 입었는데, 단추를 잠그지 않은 데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있어서 둥그런 몸매가 다 드러났다. 다소 둔해 보이는 몸과 달리 그의 푸른 눈은 진회색 눈썹 밑에서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입에 보일 듯 말 듯 머금은 미소는 원래 얼굴이 그렇게 생긴 건지 헷갈릴 정도로 옅었다.
‘특수 유리? 그럼 계속 날 보고 있었단 말이야?’
벤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거울 안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많이 놀라셨군요.”
스피커를 통해 두툼하고 살짝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공감이나 위로 따위가 아니라 관찰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느낌이었다. 무미건조한 말투는 푸근해 보이는 외모와 비교되어 소름 끼치는 괴리감을 낳았다. 벤은 경계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대체 여기가 어딥니까?”
“실례, 소개가 늦었습니다. 제 이름은 그레그(Greg)입니다. NIS의 수사관이죠.”
남자는 양복 품 안에서 ID 배지를 슬쩍 꺼냈다가 바로 다시 집어넣었다. 자세히 보지도 못한 그 배지가 진짜일까 의심하는 동시에, 벤은 NIS가 어떤 곳인지 생각했다. NIS(국가정보원). 평생 뉴스나 영화에서만 볼 줄 알았건만, 그런 데서 왜 자기를 잡아두고 있단 말인가. 다른 나라의 스파이나 국가 안위에 위협이 될 범죄자들만 잡는 곳 아니었나? 남자는 벤의 마음을 읽었는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아담슨(Adamson)씨. 당신이 무슨 잘못을 한 게 아니니까요.”
“그럼 저는 왜 여기에...”
“현재 아담슨 씨는 주요 참고인으로서 저희 보호하에 계십니다.”
참고인? 보호? 벤은 선뜻 납득하기 어려웠다.
‘보통 참고인을 이런 식으로 가둬두나? 날 보호하기 위해서라면서 왜 나한테 수갑을 채운 거지?’
“이해합니다. 혼란스러우시겠죠. 참고인이라면서 마치 죄인처럼 수갑을 채우고 이런 수상한 공간에 두다니요.”
그레그 수사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양복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이 소년을 아십니까?”
“아, 그 녀석!”
사진 속 인물을 알아본 벤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는 아랫집 아저씨를 죽이고 벤 자신도 죽이려고 했던 그 소년이었다.
“역시 아시는군요. 언제부터입니까?”
“예?”
“이 소년과 처음 만나신 게 언제냐고 물은 겁니다.”
‘그야 어제... 아니, 그날 밤이지.’
그 사건을 떠올리자 공포스러운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벤은 떨리는 손을 깍지 끼었다. 수갑의 딱딱한 감촉이 손목에 다시금 새겨졌다.
차근차근 생각해 보니 자신이 왜 이런 취급을 받고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하나, 저들은 그 소년을 쫓고 있다. 둘, 그는 괴상한 초능력을 가진 잔혹한 범죄자다. 셋, 자신은 소년을 만나고도 살아남았다. 아마도 저들은 그 연유가 궁금할 것이다. 또한 소년을 직접 목격한 생존자인 자신을 통해 소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을 거다. 이전부터 그와 아는 사이이지 않느냐는 뉘앙스를 풍기는 저 질문도 그걸 위한 유도신문일 테지.
벤은 입술 안쪽 살을 살짝 깨물었다. 뭐, 참고인? 이유가 뭐든 간에 사람을 다짜고짜 데려와 이렇게 쇠사슬로 묶어 가둬 두고는 신문을 하다니. 이쪽은 일개 개인이고 저쪽은 대단하신 정부 기관이라 이건가. 아무리 그래도 인권이란 게 있지 않나. 현대 사회에서 이런 건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반발심을 부추겼다.
벤은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입을 놀리는 것은 신중히 해야 했다. 어쨌든 자신은 힘없는 일개 시민이다. 정부를 상대로 치기를 부렸다간 어떤 꼴을 당할지 모른다. 정의니 뭐니 힘이 있을 때의 얘기지. 자신은 꼭 무사히 돌아가야 했다. 의식도 없이 병원에 누워 있는 딸에게로.
벤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저들은 과연 주변 사람들에게 뭐라고 하고 자기를 여기로 데려왔을까. 설마 아무 말도 안 한건 아니겠지. 그럼 회사는? 딸은? 매일 찾아오던 아빠가 오지 않으면 애가 얼마나 불안해할까.
‘가능한 한 빨리 여기서 나갈 수 있도록 적당히 둘러대자.’
벤은 결심을 굳혔다. 목표를 위해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지 그는 대략적으로 계획을 세워 보았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그 녀석이 누군지도 모르고, 능력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다고. 그러니 그날 본 걸 괜히 아는 척하지 말자. 자칫 잘못하면 비밀 유지니 뭐니 해서 제거당할지도 몰라.’
복잡했던 머리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여유를 되찾은 벤은 차분히 대답했다.
“아랫집 사건이 일어난 그날입니다. 경찰에 신고도 했으니 조사해 보시면 정확한 기록이 나올 겁니다.”
“그렇군요. 그 이전에는요?”
“만난 적 없습니다. 그날 처음 봤습니다.”
벤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목이 훤히 드러난 환자복을 입고 있어서 침 삼키는 게 다 보이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는 속으로 자신은 진실을 말하는 중이라고 되뇌었다. 초조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그레그 수사관이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정말입니까? 이 소년과 이전에 만난 적이 없다고요?”
모래성이 가장자리부터 바스스 무너지는 것처럼, 끈질긴 추궁에 벤의 확신이 약해지고 있었다. 기억의 막다른 길에서 ‘확실히’가 ‘아마도’로 바뀌었다.
아내의 목숨과 딸의 의식을 앗아간 것도 모자라 사고는 벤의 인생의 연속성과 완전성을 깨뜨려 버렸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그로 인한 기억상실증, 연락할 가족이 있는지 묻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그에게 내려진 진단이었다. 사고를 당하기 전에 일어난 일들은 마치 스냅사진처럼 드문드문 이미지로 떠오르는 게 전부였고, 그나마도 아내를 만나기 이전의 기억은 거진 남아 있는 게 없었다. 전에 누구와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벤은 알지 못했다.
PTSD라면서, 그 극심한 스트레스를 남긴 사고는 한 컷 한 컷 선명하게 기억하는데 어째서 다른 기억은 사라진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부조리 속에서 살아온 지난 1년이었다.
‘그래서 뭐, 그게 무슨 상관이야.’
벤은 우물쭈물하는 스스로를 다그쳤다. 무사히 딸에게 돌아가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러기 위해서라면.
‘설령 거짓말인들 어때. 난 영혼도 팔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