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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문(3)

by Outis

“네. 이전엔 만난 적 없습니다. 당연히 걔가 누군지도 모르고요.”


방심하면 금방이라도 딸꾹질이 나올 것 같아서 벤은 배에 힘을 주고 말했다. 그 말에 응수하는 것처럼 소년이 했던 말이 귓가에 울렸다.


- 그래서, 넌 날 모르는 거지?


마치 자신을 아는 듯 보였던 소년의 태도. 공포스러운 상황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입장이어서 그때는 몰랐는데,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소년의 표정이 조금 침울했던 것 같기도 했다.


‘난 평범한 일반인이야. 그런 미친 살인마랑 아는 사이일 리 없어.’


벤은 마음을 다잡으며 침대 시트를 꼭 쥐었다.


“그렇습니까. 이것 참, 실망스럽군요.”


그레그가 눈썹을 위로 올리며 말했다. 실망, 벤은 그 말이 거슬렸다. 그쪽 입장에선 건진 게 없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굳이 들으란 듯이 말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다분히 의도적이란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기분이 상한 벤은 간접적으로 비꼬았다.


“죄송스럽게 됐습니다. 아무래도 전 별 도움이 안 될 거 같네요.”


이는 이제 그만 풀어달라는 완곡한 표현이기도 했다. 그레그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짓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사진을 가리키면서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이 소년은 통칭 A. 뛰어난 실력을 가진 해커로, 개인 정보 도용과 사기 등의 혐의로 잡혀 NIS에게 수사를 받았었습니다. 현재 나이는... 보아하니 16세인 거 같더군요.”


“... 예?”


“한때 NIS의 하부조직인 CSA에서 비밀 요원으로 일했죠. 세상에 떳떳하게 밝히지 못할 더러운 일에 많이 투입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타국의 기밀을 알아낸다든지, 간접적으로 내정간섭을 한다든지, 불법적으로 시민들을 도청하고 감시하는 등의 일이요.”


벤은 점점 불안함을 느꼈다. ‘떳떳하게 밝히지 못할 더러운 비밀’을 일개 시민인 자신에게 털어놓는 이유가 뭘까.


“어째서, 그런 이야기를 저한테..?”


“그야 아담슨 씨가 거짓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거짓말이라뇨? 아닙니다. 전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A가 어떻게 해커가 되었는지, 누구에게 배웠는지 아십니까?”


“...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싶은 겁니까?”


“블랙 해커 아비스, 또는 벤이라고 불리는 자.”


“?!”


“아담슨 씨, 진짜 당신은 누구입니까?”


심장이 떨어지는 느낌. 폐가 익사하는 느낌. 뜨겁게 달아오른 벤의 두 눈동자가 실재하지 않는 암흑을 마주했다.


“기억해 내십시오. 그 편이 좋을 겁니다.”


그레그가 소년의 사진을 땅에 떨어뜨리자 그 뒤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사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진하게 웃고 있는 사랑스러운 여자아이. 벤의 딸 소피아였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베이비 모니터 수신기를 들고 있는 여자의 손이 떨렸다. LoS가 비밀리에 행한 비인간적인 실험. 그 광기 어린 짓을 CSA가 되풀이했다니. 비록 완전한 선(善)은 아니어도, 최대 다수의 행복을 지키는 일이라고 믿으며 지금껏 조직에 충성을 다해 왔는데. 얼음물에 빠진 것 같은 동시에 펄펄 끓는 기름에 던져진 것 같은 기분. 여자는 치를 떨었다.


‘이건 아니야. 설령 어떤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고 해도, 이건 아니라고!’


작동을 멈춘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잠시 조용하던 모니터에서 갑자기 고함소리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새끼! 이 개새끼야!]


[히익! 아악!]


굳이 모니터가 없어도 될 정도로 요란스러운 소리가 문과 벽을 넘어 전해져 왔다. 샌드백을 두드리는 것 같은 둔탁한 소리, 의자가 넘어지면서 바닥을 치는 우당탕 소리, 거친 숨소리. 저기에 개입을 해야 하나 하고 여자는 망설였다. 그녀는 방 앞에서 서성이며 들어갈 타이밍을 재었다.


[그게 어떤 건지, 실험체가 어떻게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새끼가!]


문손잡이를 잡은 여자의 손이 움찔했다. 저 말은 마치 아르고스 자신도 캠벨만큼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깊은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가 생각의 갈피를 따라 이리저리 굴렀다. 여자는 좀 더 지켜보면서 엿듣기로 했다.


[어, 어쩔 수 없었어. 안 했으면 놈들이 날 죽였을 거라고.]


[그럼 네가 죽었어야지! 너 살자고 고작 18살짜리를 희생양으로 삼아?!]


[흐으, 흐으, 어차피 사형수랬어. 죽어도 괜찮은 인간쓰레기, 살인자라고 했다고!]


[뭐..? 그러는 너는? 넌 아냐? 네 실험으로 인해 망가진 사람들을 생각해 봐.]


[내 실험이라니! 아냐, 벤이 책임자였으니까 벤의 실험이지. 그리고 전부 식물인간이 되긴 했지만 죽지는 않았단 말이야.]


[정말 끝까지 역겹군. LoS가 그런 소모품을 잘도 살려 뒀겠냐?]


[그건..! 내 탓이 아냐. 나도 피해자란 말이야, 훌쩍. 태어나면서부터 이용당한 피해자라고, 훌쩍.]


[... 넌 전혀 변하지 않았구나, 캠벨. 내 잘못이야. 역시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저게 무슨 소리지?’


여자와 같은 생각을 한 캠벨이 물었다.


[너 대체 누구..? 설마... 푸른 눈동자에 갈색 머리, 헛간에 살던 악령 들린 남자! 컥! 켁!]


아르고스가 캠벨의 목을 조르고 있음을 알아챈 여자는 지체 없이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 문을 열었다.


“멈춰, 아르고스! 손들고 천천히 일어나!”


“후우...”


아르고스는 거칠어진 숨을 고른 뒤 잠자코 손을 들고 일어났다. 여자는 아르고스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캠벨의 얼굴이 보일 때까지 천천히 옆으로 걸어갔다. 그는 기절은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캠벨의 상태를 확인한 그녀는 아르고스를 쏘아보았다.


“당신도 LoS였군요.”


아르고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담담히 허공을 응시했다. 여자는 왼손으로 수갑을 꺼내며 말했다.


“아르고스,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당신이 한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훗, 그딴 보여주기식 놀음 집어치워. 방금 들었잖아? A가 어떻게 되었는지. 너희에게 인권 같은 건 아무 의미 없는 거 잘 알아.”


아르고스는 여자를 향해 돌아섰다. 그의 입가에는 기름종이처럼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당신 상관한테 무슨 말을 하면서 날 붙잡아갈 건데? 내가 아까 말했지? 여기서 알게 될 걸 솔직하게 다 보고하지 말라고. 당신네 조직이 어떤 곳인지 이젠 눈치채지 않았어? 자신들의 추잡한 비밀을 덮기 위해선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놈들이야. 부디 데이비스나 홀처럼 개죽음당하진 말아.”


“상관없어요. 사회의 안전을 위해 범죄자를 잡는 게 내 일이고, 난 내 일을 할 뿐이니까.”


“사회의 안전? 그럼 더더욱 나와 함께 해야지.”


“뭐라고요?”


“게다가 범죄자라고 했는데, 당신도 LoS의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어.”


“하, 내가요? 왜요?”


“왜냐하면 앨리스, 당신은 ‘가와사키 아이(川崎 愛)’니까. 재일조선인인 ‘가와사키 에이지(川崎 英二)’가 미국인 여성과 결혼해 낳은 딸.”


“?!”


“당신 아버지는 어릴 적 가족을 따라 북한에 갔고, ‘천영이(川英二)’란 이름으로 개명한 후 유능한 해커로서 당을 위해 활약했지. 이후 탈북해서 일본으로 돌아와 조용히 지내다가 당신 어머니를 만나 결혼, 미국으로 이주해 당신을 낳았어. 그리고 20여 년 전 어느 날 홀연히 사라졌지.”


여자, 앨리스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은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숨이 가빠지면서 동공이 커지고, 총을 든 손과 팔에서 힘이 빠졌다. 아버지. 한때 물려받은 검은 머리카락을 다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던,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배신자.


“난 그가 행방불명된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어.”


“당신, 대체 누구야?”


“당신이 현재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 잘 들어. 난 ‘인류’의 편인 동시에 ‘당신’ 편이야.”





딸의 사진을 본 벤은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 망할 놈들이 왜 딸을 거들먹거리는지, 이유야 불 보듯 뻔했다. 벤의 눈에 점점 독기가 차오르는 걸 보고 그레그가 껄껄 웃었다.


“이런, 뭔가 단단히 오해하신 것 같군요. 저희는 아담슨 씨, 당신 편입니다.”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란 겁니까? 딸을 볼모로 날 협박하고 있으면서?”


“그럼요. 이 모든 건 당신을 위한 겁니다. ‘그’를 기억해내지 못하면 당신은 아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겁니다.”


과거에 뭔 짓을 했길래, 그 애랑 무슨 관계였길래 이런 처지에 놓인 걸까. 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앞의 그레그에 대해, 더 나아가 딸에게 위협이 되는 모든 인간들에 대해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감히 소중한 딸을 이런 일에 끼워 들이다니. 들끓는 분노는 끔찍하게 죽이겠다는 협박이 주는 두려움을 상회했다.


“그 앤 놔둬. 내 딸을 건드렸다간 너희야 말로 죽을 줄 알아.”


이빨을 세운 호랑이가 으르렁대는 것처럼 벤이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동요한 벤의 마음에 공명하며 방 안 공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선풍기도 없는 사방이 막힌 방에서 서서히 바람이 일고 있었다. 그레그가 흥분하며 눈을 빛냈다.


“바로 그거예요. 당신 마음속에 있는 분노와 증오를 꺼내세요. 안 그러면 딸이 사라질 겁니다.”


“뭐? 이 개자식아! 그 애는 건드리지 말라고!”


벤을 중심으로 생겨난 강한 회오리바람이 그레그가 있는 쪽을 덮쳤다. 유리에 조금씩 금이 가고는 있었지만 완전히 부서뜨리기엔 바람의 세기가 아직 부족했다. 그레그는 여유롭게 껄껄 웃으며 벤을 도발했다.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허나 결의만 가지고는 제게 닿는 것조차 어려울 겁니다. 진정한 당신의 모습으로 거듭나세요. 그것만이 딸을 살리는 길입니다.”


“이익!”


벤은 까득하고 이를 악물며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제발 좀 기억나라, 기억나라고! 진짜 내가 뭐든 상관없어. 살인자든 괴물이든 뭐든 다 좋으니까, 딸을 구할 힘을 줘. 이제 내게 남은 건 그 애뿐이란 말이야!’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면서 동시에 시원한 느낌이 들더니, 지금껏 넘지 못했던 기억의 장벽이 뻥 뚫렸다.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간 벤의 의식은 꾸물거리는 회색빛에 다다랐다.


- 안녕, 꼬마야. 여기서 뭐 하니?


“흡!”


벤은 더 이상 기억을 마주하지 못하고 눈을 떴다. 그러자 그렇게 세게 불던 바람이 마치 없었던 일처럼 사라졌다. 벤은 어쩔 줄 몰라하며 절규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그는 필사적으로 다시 바람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방안은 잠잠하기만 했다. 몸을 일으켰다가 주저앉았다가, 양 손바닥을 번갈아 보다가 손으로 머리를 싸매는 등,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는 벤을 보고 그레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거부반응인가요. 이번에는 기대가 컸는데,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반쯤 넋이 나갔던 벤은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딸은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예? 그 애가 무슨 죄입니까? 저는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부디 딸은 살려주세요, 네? 선생님, 흐흑...”


“그러죠.”


“정말...입니까?”


“네. ‘딸’의 존재는 여전히 쓸모 있다는 게 확인되었으니까요.”


“... 뭐라고?”


“안녕히 가십시오, ‘넘버 10’. 당신은 매우 유용했습니다.”


유리가 거울로 바뀌어 퀭한 벤의 모습을 담았다. 벤은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 방을 불안한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같이 있는 것 같은, 방을 꽉 채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그에게 극한의 공포를 심어주었다.


“으, 으? 흡!”


점점 가빠진 숨이 턱까지 찬 무렵, 벤의 가슴에서 빛이 나더니 몸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악!”


거울에는 더 이상 사람이라 부를 수 없는 형체가 소용돌이치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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