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울한 은빛. 벤의 육체는 무중력 공간에 던져진 수은 덩어리처럼 일정한 형태를 갖지 못하고 일렁였다.
더는 인간이라 할 수 없는, 흡사 무지성 하등 동물같이 무질서한 움직임을 보이던 물체에 갑자기 움푹 구멍이 파였다. 쫙 벌어진 구멍은 가장자리에 치아 같은 구조를 만들고 가운데에 길쭉한 돌출부를 만들어 사람의 입과 같은 모습을 띄기 시작했다. 굵은 혀가 구역질을 하듯이 밖으로 쭉 뻗어 나가자 그만큼의 공간이 안쪽으로 생겨났다. 부드러운 땅을 파고드는 뿌리처럼 빈 공간이 자라나며 물체에 가늘고 긴 구멍을 내었다. 쭉 뻗어 내려간 구멍 중간에 가운데가 갈라진 얇은 막이 생겨나 성대와 같은 구조를 이루었다. 좁고 긴 터널은 끝에서 양쪽으로 갈라져 작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고, 안에서 바깥으로 물체를 밀어내어 안으로 공기를 빨아들였다. 탄성을 가진 물체는 이윽고 더 이상 팽창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랐고, 확 쪼그라들면서 모아둔 공기를 한 번에 뿜어내었다. 세게 밀려나가는 공기가 성대를 울리자 처절한 비명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아아아아!”
눈이 있었다면 뜨거운 눈물을 주르륵 흘렸으련만, 입만 가진 벤은 울부짖는 것 말고는 처참한 심정을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비록 인간의 형체를 잃었어도 벤의 의식은 물체 분자 하나하나에 새겨져 표류하고 있었다. 감각 기관을 잃었어도, 신경망을 잃었어도, 뇌를 잃었어도 그는 직관적으로 현재 자신의 처지와 주변 상황을 감지할 수 있었다. 과연 이것이 다행인지, 아니면 최고의 불행인지, 그는 알 도리가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한 가지, 그를 사로잡고 있는 단 하나의 집념.
‘죽기, 싫어..!’
어쩌다 이런 처지가 되었을까. 한때 벤, 인간의 몸을 구성했던 물체의 분자 결합, 그 속에서 공유된 전자들이 잘게 떨며 공명했다. 보잘것없는 진동이 모여 회한과 원망의 에너지를 쌓아갔다.
- 안녕히 가십시오, 넘버 10.
넘버 10이라니, 넘버 10이라니! 고작 10개 중 하나란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 당신은 매우 유용했습니다.
유용? 대체 누구에게 유용했단 거지? 존재 이유부터 가치까지, 전부 알지도 못하는 남을 위한 것이라고?
‘그럼 나는... 만들어진 거야? 내 삶도 다 가짜란 말이야?’
만약 그렇다면 주변의 모든 이들도, 그들과의 관계와 기억도 다 거짓이었나? 회사 동료, 이웃, 친구, 가족, 전부 다? 셀윈이나 기포드, 심지어 아내와 딸까지?
‘아니야!’
아내와 딸이 가짜라니, 벤은 그것만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다. 주르륵 맥없이 넘어간 도미노가 거꾸로 다시 일어서는 것처럼, 거기서부터 모든 논리가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 아담슨 씨, 진짜 당신은 누구입니까?
마지막 도미노가 세워지고, 벤은 속으로 외쳤다.
‘나는, 벤이다! 이 개자식들아!’
놈들이 원하던 자신의 옛날 기억, 그 안에 답이 있다고 벤은 확신했다. 그는 정리되지 않은 몸의 기억을 더듬었다. 그것은 마치 산 채로 땅에 묻힌 사람이 흙을 파내며 위로 올라가는 것같이 절박하고 허탈하며 괴로운 과정이었다. 그래도 그의 의식은 까맣게 부패한 두려움의 진흙을 파내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 방향이 맞는 걸까. 아니면 어쩔 건데! 달리 방도가 있나?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의구심을 옆으로 쳐내며 계속 나아가자 어느 순간 저 앞에서 빛이 보였다.
- 자, 가자. 바람이 점점 차가워진다.
벤은 손을 뻗어 빛나는 누군가의 손을 잡았다. 어른 손 같기도 하고 아이의 손 같기도 한, 신기한 손이 벤을 잡아끌었다. 그러자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검은 장막이 와르르 무너지며 처음 보는 광경이 펼쳐졌다. 탁 트인 넓은 들판, 그 한가운데 위치한 거대한 저택. 들판을 빙 둘러 진을 친 병정처럼 빽빽이 들어선 숲. 파란 하늘에 떠다니는 양떼구름과, 푸른 잔디 위를 뛰노는 하얀 옷을 입은 아이들.
‘여기가... 어디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가까이서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무지개 너머 어딘가, 저 높은 곳에는 언젠가 자장가에서 들었던 곳이 있답니다).”
언덕 위에 선 한 어린 소녀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불안정한 음정마저 귀여울 정도로 소녀는 사랑스러웠다. 벤은 딸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아니, 몸이 있다면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콜록콜록! 아, 아. 음! 목이 안 좋아서 그런가, 뭔가 다르네...”
수줍게 웃는 앵두빛 입술, 부끄러워서 달아오른 복숭아 뺨, 보랏빛이 깃든 진한 남색 눈동자. 따스한 산들바람이 불어와 소녀의 고동색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건드렸다.
벤은 순간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그는 무의식 중에 손을 들어 뺨으로 가져갔다. 보드라운 살이 만져졌다. 작은 얼굴, 벤은 어린아이의 몸을 하고 있었다.
‘이게, 나?’
그때, 마치 깊은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것처럼 눈앞의 모든 것들이 작게 멀어졌다. 어둠 속에서 벤은 한 아이를 만났다. 아까 보았던 아이들처럼 하얀 옷을 입은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갈색 정수리만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얼굴도 안 보여주는 하얀 옷을 입은 아이와 단 둘이 있는데, 어쩐지 벤은 두려움 보단 반가움이 컸다. 저 머리카락 참 부드러워 보이네, 한 번 흐트러뜨려 보고 싶다, 이런 바보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벤은 그 얼굴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그는 어린 벤, 자신이었다.
“... 네가, 어릴 적 나였구나?”
“......”
“난 기억을 잃었어. 너에 대해, 우리에 대해서 얘기해 줄래?”
“......”
[듀이, 왜 그래?]
동굴 속의 메아리처럼 웬 어린 소년의 부드러운 음성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그에 답하려는지 소년이 위로 고개를 들었다. 벤도 따라서 위를 올려다보았고, 다시 소년의 시점으로 돌아왔다. 소년이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벤.”
소리가 웅웅 울려서 벤은 귀가 있다면 손으로 귀를 막고 싶을 지경이었다. 벤은 자신이 깃든 소년의 손을 잡고 있는 또 다른 소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또한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저건... 나?’
‘너는 내가 아니야.’
소년의 음성이 들리고, 벤의 의식이 소년의 몸에서 튕겨나갔다. 그는 로켓에 실려 날아가는 것처럼 소년으로부터, 들판 풍경으로부터 멀어졌다. 똑같이 생긴 두 명의 소년, 그리고 한 소녀. 벤이 몸을 빌렸던 소년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다른 소년도 같이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무표정과 여유로운 미소. 같은 녹색인데도 극명하게 다른 두 눈빛이 미지로 향하는 벤의 뇌리에 선명히 찍혔다.
‘...... 여기가 어디지.’
기절해 있던 A가 눈을 떴다. 어둠에 익은 눈이 캄캄한 가운데 잡동사니와 박스 더미의 실루엣을 찾아냈다. 그는 지하 창고 바닥에 똑바로 누워 있는 상태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그의 몸은 차갑고 거친 시멘트 바닥이 주는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후우... 흡!”
A는 몸을 일으키려고 배에 힘을 주고 애를 썼다. 그러나 허리만 조금 들릴 뿐 약에 취한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노이즈가 회로 중간에서 뇌의 신호를 방해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젠장, 아직 마비가 다 안 풀렸나.’
그것 조금 움직이는 것도 무리였는지 눈앞에 회색 소용돌이가 빙글빙글 돌았다. A는 몸에서 힘을 빼고 눈을 감았다. 너무 방심했다 자책하며 그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 자식들, 날 대체 어쩔 셈이지?”
그는 정신을 잃기 직전 들은 말을 떠올렸다.
- 걱정 마, 죽이지는 않아. 네가 우리에게 필요한 채로 남는 한.
‘필요라. LoS라면 몰라도 레지스탕스가 이 몸을 탐낼 이유가 뭘까? 양복쟁이랑 싸울 때 보니까 자기들끼리도 충분할 거 같던데.’
- 원하는 게 뭐야?
- 시스템과 싸운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 우리도 회심의 반격을 먹일 뭔가가 필요하달까? 이를테면 네가 가지고 있는 그거 말이야...
“내가 가진 그거. 내가 가진 거라... 나는 있고 저쪽엔 없는 것.”
한창 중얼거리며 생각하던 A가 눈을 떴다. 그리고 아직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향해 말을 걸었다.
“너희 ‘천국’의 주민에게 없는 것. 그건 ‘지옥’에서 태어난 인간 본연의 죄악심.”
“바로 맞혔어.”
저벅저벅저벅. 작은 등불이 큼직한 발소리에 맞추어 흔들리며 A에게 다가왔다. 발걸음은 A로부터 너무 멀지도, 그렇다고 A를 겁줄 정도로 너무 가깝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멈추었다. 등불이 위로 올라가더니 소유자의 얼굴을 비추었다. 안대를 쓴 남자였다. 그는 시원스러운 미소를 띠고서 물었다.
“몸은 좀 어때?”
“물어봐 주셔서 영광이네. 이 꼴로 만들어 놓고 말이야. 보시다시피 아직 안 움직여. 어지간히 센 걸 집어넣었나 봐?”
“귀한 손님한테는 그에 맞는 대접을 해드려야지. 맘에 들었다니 다행이야.”
“하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이게 무슨 거래야? 납치, 감금, 범죄지.”
“무슨 소리야? 원하는 건 제대로 건네줬는데. 아직 확인 안 해봤어?”
“......”
“아! 못하는구나?”
“이 꼴이 됐는데 그럼, 그럴 겨를이나 있었어?!”
“흐음~ 그렇구나. 못하는구나. 그렇단 말이지?”
안대를 쓴 남자는 쭈그려 앉으면서 바닥에 등불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턱을 손에 괴고서 흥미롭다는 얼굴로 A를 바라보았다.
A도 덩달아 남자의 생김새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지금 보니 다부진 근육질 몸과 대조적으로 남자의 얼굴은 왠지 중성적인 느낌을 주었다. 어깨에 걸친 진녹색 비단옷과 붉은 머리카락은 서로 대비되며 선명한 인상을 남겼다. 검은 바지는 A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동양 어느 나라의 고전 의상과 비슷한 펑퍼짐한 스타일이었고, 무릎과 팔에 가려 일부분만 보이는 가슴은 검은 터틀넥 탱크톱이 덮고 있었다. A는 남자의 가슴 한가운데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역시, 처음 봤을 때처럼 안대에 가려진 눈과 비슷한 에너지 파동이 느껴졌다.
“뭘 그렇게 봐? 응큼하게.”
“뭐? 그쪽이야 말로 남의 얼굴을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A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남자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쳤다. 신기하고 진귀한 무언가를 보는 듯한 그 눈은 절대 우위를 점지한 맹수의 그것처럼 조용한 동시에 강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이걸 뭐라고 하지? 순수한 광기? 숨이 막힐 정도야.’
A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레지스탕스가 됐다지만, 천국의 주민이 저 정도로 위험한 눈빛을 하고 있다니.
‘마치 살기 같잖아.’
이 녀석들은 어쩌다가 시스템에 저항할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아니, 애초에 그런 게 가능할 줄이야. ‘벤’은 대체 무슨 꿍꿍이로 그런 짓을 한 걸까. A의 머릿속에 궁금증이 마구 떠올랐다.
“아무튼 물건을 확인 못한 건 네 사정이고, 거래는 거래야. 내가 원하는 건 너. 우릴 위해 싸워줘야겠어.”
“... 날 이용해서 하려는 거, 그게 네가 말한 ‘회심의 반격’이야?”
“그래.”
“그런 짓을 했다간 너희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도?”
“바라는 바야.”
“나 참, 레지스탕스가 아니라 자살 특공대였군.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에 얽히고 말았어.”
A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남자가 턱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그러게. 이런 일에 끼어들여서 미안하게 됐어.”
“... 뭐?”
방금 뭘 잘못 들었나, A는 놀라서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하다못해 마지막만이라도 우린 우리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싶어. 그게 ‘인간’이잖아?”
“......”
“누군가가 연출한 광극(狂劇) 속 꼭두각시 인형으로서 영원히 웃을 것인가, 아니면 끝이 있고 불행이 있어도 내 손으로 삶을 쓸 것인가. 너라면 어떤 걸 택할래?”
숨김없는 작은 태양이 회색빛 하늘 속에서 일렁였다. 남자가 안대를 벗으며 말했다.
“못 봤다니 지금 바로 보여주지.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