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바로 보여주지.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안대를 벗은 다음, 휘둥그레 떠진 회청색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마음의 창, 그 너머로 나의 기억이 흘러들어 갈 테다. 굳이 표현하자면 뉴런과 뉴런 사이의 공간, 시냅스를 통해 자극이 전달되는 것과 비슷하려나.
아무 곳에도 기록되지 않은, 원래라면 이 세상과 함께 지워질 이야기인데. 목적 달성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일까, 아니면 이것 또한 존재의 흔적을 남기려는 생명의 본성일까.
하긴, 어차피 죽고 나면 나와는 상관없을 일. 깊이 생각할 것 없나.
그나저나 얼마만이지. ‘그때’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건.
딸각. 다이아몬드 덩어리 같은 얼음이 롱글라스 안으로 떨어지며 투명한 소리를 낸다. 절도 있는 손놀림은 정확한 비율로 최고의 조화를 빚는다.
“주문하신 조니진저하이볼(Johnnie & Ginger Highball) 나왔습니다.”
나른한 불빛, 드라이 마티니(Dry Martini)처럼 깔끔한 건배, 매너 있는 미소, 귀를 간질이는 소곤거림과 나지막한 웃음소리. 황금빛 필름에 찍힌 고전 영화와 같은 이곳은 바 문 버스트 (Bar Moon Burst).
끼익. 문이 열리고,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한 남자가 다가온다. 단정히 빚은 갈색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 적당히 빈티지한 회색 양복.
그를 본 순간 나는 깨닫는다. 아, 오늘이 수요일이었구나 하고.
“여어, 벤.”
“셀윈. 장사 잘돼?”
“평소랑 같지 뭐. 오늘도 같은 걸로?”
“응, 부탁해.”
털실뭉치 같은 주변 소음과 흐릿한 구릿빛 전등이 그의 등장과 함께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나는 안 그래도 빠른 손을 더 부지런히 움직여 칵테일을 만든다. 보드카와 크렌베리 주스, 그레나딘(Grenadine) 시럽을 잔에 넣고 휘저은 다음, 푸른색을 더 강조하기 위해 원래보다 양을 더 늘린 블루 큐라소(Blue Curacao)를 붓는다. 붉은 음료에 푸른 액체가 섞여 들면서 보랏빛 비가 내리는, 이름 그대로 퍼플레인(Purple Rain)이 완성된다.
셰이커에 넣지 않고 잔에서 섞은 것은 이 장면을 보고 싶어 하는 벤을 위해서다. 남보랏빛 팬지로 장식한 잔을 벤에게 건네면, 그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서로를 탐하며 전혀 다른 색으로 변해 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리고 잔을 조심스레 흔들면서 남보랏빛 결말을 만족스러운 미소로 맞이한다.
이윽고 하루 종일 목이 빠져라 기다려온 순간이 찾아왔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제니가 무대에 서고, 모두가 그녀의 목소리에 매료되었다. 짓궂은 시간은 이때만 유독 빨리 흘러간다.
노래가 모두 끝난 후에도 손님들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조금만 더, 한 곡만 더. 나도 그들과 함께 속으로 외쳤다. 끝없이 보채는 앙코르 요청에 제니는 막무가내인 동생을 나무라는 큰 누나 같은 미소를 짓고서 이젠 정말 마지막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녀가 이쪽을, 벤을 바라보았다. 벤은 보랏빛 잔을 들고 미리 감사를 표했다. 마지막 곡이 정해졌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무지개 너머 어딘가, 저 높은 곳에는 언젠가 자장가에서 들었던 곳이 있답니다)...”
“... 그거 알아, 셀윈?”
벤이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렇게 시작할 때는 내가 모르는 얘기가 나온다는 걸 경험상 잘 알기 때문이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무지개를 상징하는 여신이 있어. 이름은 ‘이리스(Iris)’, 영어권에서는 아이리스라고 불려. 주신 제우스와 그의 아내 헤라의 전령인데,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제우스를 잘 피해 다녀서 헤라가 아주 아꼈대. 바람둥이 남편 탓에 질투의 화신이 된 헤라가 보기에 자기 남편과 사고 치지 않는 이리스가 얼마나 예뻤겠어. 헤라는 총애하는 이리스에게 축복의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고, 그것이 땅에 닿아 꽃이 되었지. 그게 이리스의 이름을 딴 아이리스, 즉 붓꽃이야.”
벤은 잔을 들어 남보랏빛 칵테일을 불빛에 비추었다.
“붓꽃 중에 딱 이런 색을 가진 게 있어. 제비붓꽃.”
“그래? 그럼 다음엔 팬지 말고 붓꽃을 준비해야겠군.”
“아 그게, 독이 있을지도 모른다던데.”
“아.”
“뭐 죽을 정도는 아니겠지만.”
그렇게 말하고서 벤은 욱여넣듯이 칵테일을 들이켰다. 그러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만든 사람 입장에서 보기엔 속이 상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가 안쓰러웠다. 술을 음미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억지로 맞추는 느낌이랄까. 맞출 사람도 없는데 왜 저렇게 무리하나 싶을 정도였다.
벤이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리스에게는 ‘아르케(Arche)’라는 쌍둥이 자매가 있었대. 제우스가 아버지인 크로노스에게 반기를 들어 신계에 큰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르케는 크로노스와 티탄들의 편을 들었어. 전쟁은 제우스 편의 승리로 끝났고, 노여움을 산 아르케는 처벌을 받게 돼. 무지갯빛 날개를 잘리고 명계에서도 가장 밑바닥, 나락에 갇히고 말지. ‘아르케’라는 이름은 시작, 기원, 그리고 첫 번째 원칙이라는 뜻인데, 참 아이러니한 결말이지? 배신자가 충신이 되고, 충신이 배신자가 되고, 무지개라는 상징마저 빼앗겨...”
“If happy little bluebirds fly beyond the rainbow, why, oh why can't I(행복한 작은 파랑새가 무지개 너머로 날아간다면, 나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마침 제니의 노래가 끝나고, 벤의 마지막 말은 박수갈채 속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제니의 퇴장과 함께 무대 조명이 꺼졌다. 그걸 본 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도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우린 친구잖아.”
“친구...”
평소라면 말없이 손을 흔들며 떠났을 텐데, 그날의 벤은 달랐다. 그는 내 말을 곱씹으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나와 똑같이 생긴 누군가가 찾아오면, 지금까지 나한테 해주었던 것처럼 잘 부탁해.”
“똑같이 생겼다고? 혹시 쌍둥이?”
벤은 내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해댔다.
“쓸데없는 생각도 많고, 마음도 여리고, 그래서 고민도 많아. 자네 같은 친구가 필요할 거야.”
“... 이름은?”
벤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 대신 그 녀석을... 잘 부탁해, 셀윈.”
편지 봉투에 붉은 인을 찍듯이,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래서일까. 그의 목소리와 뒷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날 이후, 벤이 가게에 오는 일은 없었다.
“She got solar power(그녀는 태양처럼 빛나).
Minutes feel like hours(일 분이 한 시간처럼 느껴져).
She knew she was the baddest(그녀도 자기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알고 있지).
Can you even imagine fallin' like I did for the love of my life (운명적 사랑에 이토록 푹 빠지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어)?
She's got glow on her face(그녀는 빛나는 얼굴과)
A glorious look in her eyes(거룩한 두 눈을 가졌지).
My angel of light(나의 빛의 천사).”
운명이니 사랑이니, 감히 입에 담기 무서울 정도로 아름다운 그대.
당신이 노래를 부르면 그 볼품없는 무대가 성스러워 보일 정도야. 그저 당신의 노래를 들으며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싶어.
“Shine! It’s your golden hour(빛나줘! 지금이 그대의 골든아워야).
You slow down time in your golden hour(네가 빛나는 순간, 시간마저 느리게 흐르네).”
제발 시간이 이대로 계속 머물렀으면. 지금 이 순간, 당신의 골든아워(golden hour; 일출 직후 또는 일몰 직전, 하늘이 붉은빛과 황금빛으로 물드는 때)에. 영원히.
아냐, 미안. 말실수였어. 지금이 당신의 골든아워라니. 당신은 앞으로도 더 아름다워지고 행복해질 거야.
‘그리고 제니, 당신만 괜찮다면... 언젠가 우리 함께,’
“어이, 셀윈. 내 위스키는?”
“... 예?”
“저 사람도 주문한 칵테일 언제 나오나 기다리고 있는 거 같은데.”
“아, 죄송합니다. 얼른 드릴게요.”
완전히 잊고 있었던 칵테일을 얼른 마저 만들고, 나는 단골 거래처인 식료품점 주인 비한(Vihaan)에게 위스키 한 잔을 내밀었다. 알코올향을 들이마셔서 그런가, 뺨이 화끈거리고 몸에 닿는 모든 것에 쿠션감이 느껴진다. 비한이 반달눈을 하고는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인간에게는 숨길 수 없는 것 세 가지가 있다지. 재채기, 가난, 그리고 사랑.”
“놀리지 마요.”
비한은 껄껄 웃으며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마치 한 잔을 스트레이트로 들이켠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크으~ 역시 잘 익은 술은 좋아. 인생의 맛이 느껴진다구.”
“하하, 위스키 한 모금이 인생이면 한 잔은 뭐가 되는 거죠?”
“뭐긴, 똑같이 인생이지. 첫 한 모금의 맛을 떠올리기 위해 계속 들이붓는 거.”
다시 입술을 적신 비한은 아까만큼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취한 것 같은 그의 손가락이 무대 위의 제니와 나를 번갈아 가리켰다.
“그래, 결혼은 언제 하나?”
“쿨럭쿨럭!”
“둘이 서로 좋아하잖아. 뭘 더 기다리는데?”
“결혼이라니, 한 번에 너무 멀리 갔잖아요.”
“쯧쯧쯧, 그러다가 다른 놈이 냉큼 채가면 어쩌게? 죽 쒀서 개 줄 일 있나?”
“에이, 설마...”
“설마, 이러고 있네. 세상은 요지경이라고. 생각대로만 흘러가질 않아요.”
“그런가요?”
“자네 저 동생 때문에 그러지?”
나는 구석 자리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이제 막 성인이 된 청년을 힐끔 쳐다보았다. 제니의 동생 에드(Ed)였다.
“... 지금껏 누나랑 단둘이 살았는데, 제가 갑자기 끼어들면 속상하지 않겠어요.”
어리고 여린 그가 겪을 상실감을 생각하면 안쓰럽다. 그래서 가능한 천천히, 나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그 둘에게 다가갔었다. 그러나 에드는 아직 나에 대한 경계심을 풀지 않고 있다.
‘조금만 마음을 열어주면 내가 대신 좋은 형이 되어줄 텐데. 가족이, 되어 줄 텐데.’
비한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유리잔을 휘휘 돌렸다. 투명한 잔 안에 잔잔한 갈색 파도가 일었다.
“그래 뭐, 본인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다만 옆에서 보고 있자니 안타까워서 그래. 난 자네 편이니까 말이야.”
“알아요. 고마워요.”
“어이구. 자네 같은 젊은이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지간히 답답했던지, 비한은 말을 하다 말고 한 모금 한 모금 아껴 마시던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켰다. 술에 약한 그로서는 매우 이례적이고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크으~! 인생은 이 술처럼,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새 빈 잔이라고? 딸꾹!”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빈 잔을 내려다보았다. 그때 노래를 마친 제니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비한! 또 무리한 거예요?”
“딸꾹. 무리라니! 딱 한 잔 마셨어, 한 잔.”
비한은 제니에게 보란 듯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러나 꼬일 대로 꼬여버린 혀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전혀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나는 그를 두둔하고 나섰다.
“너무 급하게 드셔서 취기가 갑자기 오른 모양이야.”
“아이 참, 술도 약하면서 한꺼번에 마시면 어떡해요.”
“그러게, 누가 그렇게 애태우래?!”
“예?”
“이제 그만 질질 끌고 둘이, 읍, 읍.”
“하하, 비한. 많이 취하신 거 같은데 오늘은 그만하시죠.”
나는 얼른 손으로 비한의 입을 막았다. 제니는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며 나와 비한을 번갈아 보았다. 조금 뒤 비한의 말뜻을 이해한 그녀는 고운 얼굴을 붉혔다. 붉은 뺨과 입술을 가린 손가락에서 그녀의 눈동자를 닮은 아쿠아마린 반지가 반짝였다. 내가 그녀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가슴이 뛰었다. 급발진한 심장이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숨이 찬 비한이 버둥대며 내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푸하! 알았어, 알았어! 안 하면 되잖아.”
민망해진 나와 제니는 서로 눈을 피하며 웃었다. 비한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런데 그 양반, 끝내 안 오는구먼?”
비한의 말대로였다. 매주 수요일마다 찾아오던 벤은 오늘도 오지 않았다. 제니가 그를 위해 아껴두고 있는 “Over the Rainbow”를 듣지 못한 지 이제 꽤 되었다.
“벤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제니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설마.”
함께 어울리긴 했어도 벤은 왠지 우리와는 격이 다른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에 대해서는 근거 없는 긍정 회로를 돌리게 된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건, 작별 인사처럼 그가 남긴 당부의 말.
- 혹시 나와 똑같이 생긴 누군가가 찾아오면, 지금까지 나한테 해주었던 것처럼 잘 부탁해.
벤이 말한 그때에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드는 건, 그저 기우일까.
“... 별일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