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사라지는지 모르는 시간이 하루 이틀 쌓이더니, 어느새 주말이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시장 덕분에 거리는 아침부터 활기차다.
주말에는 평일보다 일찍 바를 열어야 해서 나는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왔다.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가게들과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에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뭐, 급할 거 없지.’
비한의 가게에서 식재료 배달이 오는 건 정오 무렵. 아직 오전 10시니까 2시간 남짓의 여유가 있었다. 나는 가게에서 쓸만한 향초나 새로이 도전해 볼 수 있는 향신료가 없는지 둘러보았다. 레시피에 관한 일은 주방장인 밥이 나서야 할 테지만, 그 게으름뱅이 녀석이 그런 열정을 보일 리가 없으니 어쩌겠는가. 사장인 나라도 나설 수밖에.
나는 비누와 향초를 파는 가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을 분위기 물씬 풍기는 계피와 말린 오렌지 향이 제일 먼저 손님을 반기었다.
“어서 오세요. 둘러보세요.”
하도 구경만 하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가게 주인은 심드렁하게 인사를 했다. 그녀는 세상 그 어떤 것에도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목구비나 얼굴형이 둥글둥글하고 입고 있는 옷도 부드러운 털실 재질이라 좀 웃기만 해도 인상이 아주 좋을 텐데, 아쉬웠다.
나는 가게를 죽 둘러보았다. 물건들은 대체적으로 낙엽을 떠올리게 하는 차분한 색상이었다. 며칠 전에 비한이 벤 얘기를 꺼내서 그런가. 어쩐지 분위기가 벤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갈색과 주황색이 섞인 작은 향초 세트를 샀다. 그냥 갈 줄 알았던 손님이 제법 물건을 사자 주인은 그제야 웃었다. 역시, 괜찮은 인상이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많이 파세요.”
그녀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웃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는 덕담처럼 인사를 건넸다. 가벼워진 마음에 묵직한 봉투를 괜히 살짝 들었다 내렸다 해 본다.
‘이걸로 바 분위기를 바꿀 수 있겠어. 그렇지, 다른 가을 느낌의 소품들도 슬슬 꺼내야겠다. 작은 호박 모형이랑...’
머릿속에서 가게가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되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까 그 가게에서 제법 멀리 왔다. 이렇게 깊이 생각에 잠겨 있어도 넘어지거나 부딪히는 일 없이 계속 걸을 수 있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일일이 인식하지 않아도 눈과 발이 알아서 제 역할을 한 덕이겠지. 이 정도면 진짜 삶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자동 프로그램이 아닐까. 싱거운 생각을 하며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햄이랑 치즈도 좀 살까?’
지역 농장에서 온 상품들이 저 앞에 보였다. 모래시계의 모레처럼 점점 줄어가는 여유 속에 발걸음을 재촉하려던 그때, 아름다운 녹색이 내 눈길을 끌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그쪽을 돌아보았다. 황금색 수가 놓인 비단 스카프였다.
‘우와, 예쁘다.’
‘예쁘다’는 개념을 받은 자동 프로그램은 곧바로 한 얼굴을 내놓았다. 제니. 스카프는 그녀의 눈부신 금빛 머리카락과 맑은 푸른 눈, 하얀 피부에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만큼 비쌀 게 분명했다. 나는 수중의 돈을 세어 보았다. 계획에 없는 지출을 하기엔 살짝 빠듯했다.
‘그깟 햄이나 치즈 뭐 필요해? 다른 것도 안 사도 돼.’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스카프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가게 주인이 사근사근 웃으며 나를 반겼다.
“어서 와요. 아유, 이렇게 잘생긴 청년이 온 거 보니 애인 선물 찾으러 왔구먼?”
“아 예, 뭐... 하하.”
애인이란 말에 나는 뒷목을 긁적이며 바보같이 웃었다. 아까 향초 가게 주인과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데, 여기 주인은 장사 수완이 전혀 달랐다. 살살 간을 보는 듯한 눈웃음과 빨판 달린 말솜씨로 손님 여럿 구웠겠다 싶었다.
“그래, 어떤 거 찾으셔?”
“이거 얼만가요?”
“어머, 우리 총각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더니 안목도 높으셔! 애인이 엄청 미인인가 봐. 이거 진짜 비단이거든? 한번 만져 볼래요? 얼마나 부드러운지~”
주인은 냅다 스카프로 내 손을 잡아끌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대응할 틈도 없었다. 당황한 나는 그녀가 이끄는 대로 두 번 스카프를 쓰다듬었다. 과연 결이 아주 좋았다. 다소 과장스러운 주인의 말투 때문에 솟구쳤던 의심이 쑥 들어갈 정도로 상품 자체는 괜찮았다. 나는 얼른 손을 빼고 물었다.
“그러네요. 그래서 가격은 얼마예요?”
“이게, 좀 비싼데...”
주인은 뜸을 들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손가락 세 개를 들어 보였다.
“삼백 골드.”
“삼백, 이요...”
나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아침에 면도를 해서 걸리는 건 없었지만, 아까 만진 비단의 느낌이 손가락에 남아 있어서 그런지 살결이 거칠게 느껴졌다. 내가 망설이고만 있자 주인이 큰 인심 쓰는 것처럼 외쳤다.
“그래, 애인 선물이라는데 내 좋은 일 좀 하지 뭐. 십 프로 깎아서 이백 칠십!”
“음... 기왕 인심 써주시는 거 한 번만 더 써주시면 안 될까요?”
“아이, 이 이상은 안 돼. 난 어떡하라고. 이거 원래 오백도 더 받고 하던 거예요.”
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장사하는 입장에서 너무 깐깐하게 굴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제니에게 줄 선물을 누구 기분 나쁘게 하면서 사고 싶진 않았다. 혹 마가 낄까 싶어서였다.
“알겠습니다. 이백 칠십에 살게요.”
“잘 생각했어요. 애인이 아주 좋아할 거야. 포장도 해줄까요?”
“네. 잘 부탁드려요.”
주인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작은 선물 박스와 포장지를 꺼냈다. 분홍색 포장지를 보자 덩달아 가슴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 있는데, 갑자기 뒤쪽에서 우당탕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악!”
“아이고! 젊은이, 괜찮아... 이게 누구야, 벤?”
그 이름을 듣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건너편에 한 남자가 넘어져 있었다. 그를 본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벤..?”
틀림없이 벤이었다. 그는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자신을 알아보고 손을 내미는 행인을 밀치고 골목으로 달아났다.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나는 들고 있던 봉투도 내팽개치고 그가 도망친 쪽으로 뛰어갔다. 뒤에서 스카프 가게 주인이 소리쳤다.
“총각! 이거 안 사?”
“죄송해요! 이따가 다시 올게요!”
나는 그를 찾아 골목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도 그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문 버스트 뒷문으로 이어지는 골목에 다다른 나는 잠시 멈춰서 숨을 골랐다. 땀이 빗방울처럼 떨어져 땅에 얼룩을 만들었다.
“헉, 헉, 대체 뭐야? 한동안 안 보인 주제에 갑자기 나타나서 안 어울리는 짓이나 하고...”
내가 제대로 본 게 맞나? 그렇게 당황해서 도망가는 벤이라니, 아직도 실감이 안 났다.
- 혹시 나와 똑같이 생긴 누군가가 찾아오면, 지금까지 나한테 해주었던 것처럼 잘 부탁해.
“... 설마.”
그럼 벤이 아니라 쌍둥이 형제? 쫓기는 것처럼 절박해 보이던데, 무슨 위험한 상황에 처한 거 아닐까?
- 나 대신 그 녀석을... 잘 부탁해, 셀윈.
“... 나참,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있나. ‘나 대신’이란 말은 또 뭐고.”
나는 샤워한 것처럼 땀에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려다가 그제야 두 손이 빈 걸 깨달았다. 쯧, 스카프 가게에 향초를 놔두고 왔다. 제니에게 줄 스카프도 못 사고. 다른 사람이 사가면 어쩌지. 그 주인이라면 팔고도 남을 거 같던데. 돌아갈 시간이 있는지 보려고 시계를 찬 손목을 든 바로 그때였다.
“셀윈? 여기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어?”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비한이었다. 그가 식료품 박스를 실은 수레를 끌고 오는 걸 보고 나는 허탈감에 눈을 감았다. 어느새 12시가 된 거였다. 지금은 식료품부터 먼저 받아야 했다.
“어쩌다 보니... 아, 제가 끌게요.”
나는 마다하는 비한을 밀어내고 수레를 넘겨받았다. 원래라면 비한 밑에서 일하는 젊은 점원이 할 일이다.
“존(John)은 어디 갔어요?”
“글쎄? 어쩐 일로 오늘 무단결근을 했더라고. 그럴 애가 아닌데 말이야.”
“그러네요? 그건 존이 아니라 우리 밥이 할 일인데.”
“또 지각이야?”
“그렇겠죠. 어, 뒷문 닫혀 있는 거 보니 오늘도 예외 없음이네요.”
“사장이 너무 물러서 그래. 따끔하게 혼도 좀 내고 그러라고.”
“저라고 안 그래 봤겠어요? ‘그래, 너는 떠들어라’ 이러는데 방법이 없다라고요.”
“그럼 잘라버려.”
“어떻게 그래요,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그래도 솜씨는 좋아요.”
“에휴.”
곧 우리는 바 뒷문에 도착했다. 나는 열쇠로 문을 열며 비한에게 부탁했다.
“잠시만요. 앞문 열어놓고 올게요. 밥 녀석 또 열쇠 잊어버리고 올 테니까.”
“고생해.”
나는 불 꺼진 바를 가로질러 문을 열어 놓고 얼른 뒷문으로 돌아왔다. 비한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수레에서 박스를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박스를 받아 들었다.
“제가 할게요.”
“아유, 미안하네.”
“뭘요. 그런데 무슨 고민 있으세요? 존이 걱정돼서 그래요?”
“그것도 걱정이 되고...”
“그리고요?”
비한은 머뭇거리다가 내 눈치를 살피며 말을 꺼냈다.
“저기, 아무래도 벤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거 같아.”
벤. 이건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필연의 조짐인가. 나는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캐물었다.
“혹시 벤을 본 거예요? 어디서요?”
“여기 오는 길에. 막 뛰어가길래 부르니까 기겁을 해서는 더 도망가더라고.”
“정말 벤이었어요?”
“내가 잘못 본 걸 수도 있는데... 아니야, 벤이 맞아.”
저 정도 확신이면 틀림없다. 시간, 장소,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내가 본 그를 비한도 본 것이었다.
‘헛것을 본 게 아니었어.’
벤인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로써 존재 자체는 확실해졌다. 아무래도 오늘 장사는 접어야 할 것 같았다. 그를 찾아야 했다.
뭔가 잊은 게 있다는 곁다리 생각이 쓱 지나갔지만 큰 주의를 끌진 못했다. 무엇보다 이 일이 우선이다. 나는 재빨리 수레에서 박스를 내려 대충 땅에 쌓아둔 다음, 비한의 손에 식료품 값을 쥐어 주었다.
“저, 일단 돈 받으세요. 그리고 가게에 돌아가시면 주변을 잘 살펴주세요. 혹시 또 벤을 보시거나 봤다는 사람이 있으면 저한테 알려주시고요. 아셨죠?”
나는 얼른 비한을 돌려보낼 요량으로 서둘러 수레를 끌며 그의 등을 밀었다. 영문도 모르고 다른 골목 어귀까지 떠밀려간 비한은 발걸음을 멈추고 내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잠깐, 자네 뭐 하려고?”
“찾아야 할 거 같아서요.”
친구니까요,라는 말은 삼켰다. 벤은 한 번도 나를 그렇게 부른 적 없으니까. 그저 내 마음이 그렇고, 그의 부탁이 있었을 뿐. 그걸로 충분했다.
내 말 뜻을 이해한 비한은 입을 꾹 다물고 커다란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아마 자신도 가야 하나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때, 시야 한쪽 구석에 웬 하얗고 흐릿한 게 보였다.
“못 찾을 거야.”
난데없이 끼어든 가녀린 여자 아이의 음성을 따라 우리는 옆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하얀 원피스를 입은 긴 갈색 머리 소녀가 맨발로 서있었다. 나이는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활짝 피기 직전인 16세 정도로 보였다. 소녀는 어디서 주워 왔는지 한 손에 길고 가는 나무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싸늘한 무표정은 예쁘다와 두렵다는 이중적인 인상을 주고 있었다.
“뭐? 너 방금 뭐라고 했니?”
비한의 물음에 소녀가 대답했다.
“또 볼 일 없을 거라고.”
“누구? 벤을?”
벤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소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싫어하는 반찬이 식탁에 오른 걸 본, 그런 표정이었다. 아이가 풍기는 아우라는 참 기묘했다. 늙은 여왕처럼 위압적이면서도 어린 아기처럼 순진했다. 예측불가한 존재에 대한 불쾌함과 불안감을 느끼며, 나는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못 보던 앤데, 넌 누구니?”
“알 거 없어.”
소녀의 입가에 희미한 비웃음이 서렸다.
“어차피 잊을 건데 뭐.”
소녀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비한에게 달려들어 손에 든 막대기를 그의 가슴에 꽂았다. 모든 게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었다. 비한은 얼마나 놀랐던지 소리도 못 지르고 밀려갔다.
“리라이트(Rewrite)”
소녀가 주문을 읊듯이 말했다. 막대기에서 빛이 나고, 비한의 몸이 충격파를 맞은 고무처럼 출렁였다. 그는 지금껏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아악!”
“그만둬!”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나는 소녀를 떼어 놓으러 달려갔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어떤 것에 부딪혀 나가떨어졌다.
“으... 윽...”
충격 탓인지 초점이 맞지 않았다. 사물이 흐릿하고 여러 개로 보였다. 그런 와중에도 쓰러진 비한의 몸에서 소녀가 막대기를 빼는 모습은 알아볼 수 있었다. 비한은 움직임이 없었다.
“비한, 설마... ”
“죽었냐고? 아니.”
소녀가 내게 다가왔다. 초점이 또렷해지면서 소녀의 표정이 확실히 보였다. 왠지 뿌듯해하는 것 같았다.
“살짝 기억을 손 봐준 것뿐이야.”
“뭐..?”
“아, 그렇지. 너희는 아무것도 모르지.”
소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제부터 너희는 옛 주인따윈 잊고 새 시대를 살아가는 거야.”
“주인..?”
“그래. 너희가 ‘벤’이라고 부르는 자. 그는 이제 없어.”
‘이게 대체 무슨 소리지? 벤이 주인? 게다가, 이제 없다니?’
“걱정 마. 지금부터는 소피아 님께서 너희를 관리해 주실 거야. 그러니까 필요 없는 기억은, 삭.제.”
소녀는 막대기 끝을 내 눈앞에 들이댔다. 가까이서 보니 그건 그냥 평범한 나무 막대기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문자가 빼곡히 적혀 있어 무슨 마법 지팡이 같기도 하고, 끝이 뾰족한 것이 펜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물었다.
“너야?”
“응?”
“벤은 이제 없다며. 네가 벤을 없앤 거야?”
“어차피 기억도 못할 텐데 왜 물어?”
나는 소녀의 막대기를 콱 움켜쥐고 있는 힘껏 당겼다. 소녀는 순간 무게중심을 잃고 쓰러질 뻔했다가 양손으로 막대기를 잡고 버텼다. 그녀는 매우 불쾌하다는 듯 이를 갈았다.
“이 자식이, 감히?!”
“너까짓게 내 기억에 손 대게 놔둘 거 같아? 어디서 굴러와서는 뭐, 주인? 웃기지 마. 지금껏 내 삶은 내가 만들어 왔어. 내 기억도 내 거고, 나의 주인은 나야!”
“... 어리석은 놈.”
두 손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줄 알았던 소녀는 한 손으로 거뜬히 막대기를 뺏어갔다. 순식간에 허를 찔린 나는 이렇다 할 대응도 하지 못한 채 그녀에게 목을 잡히고 말았다. 도저히 그 작은 체구에서 나올 수 없는 악력이 내 숨통을 틀어쥐었다.
“컥!”
무슨 요술을 부린 건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소녀가 천천히 나를 들어 올렸고, 나는 목이 비틀린 닭처럼 소녀가 드는 대로 끌려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그러게, 반항하지 말고 얌전히 있었으면 이런 험한 꼴은 안 당했을 것을.”
눈앞이 흐려지면서 선명한 절망의 막이 내려앉았다. 이걸로 끝인 걸까. 이렇게 갑자기, 허무하게.
‘가게... 열기 전이라 다행...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듣고 싶어. 한 번만 더 보고 싶어.
‘제... 니...’
따악! 둔탁한 소리가 바로 앞에서 터졌다. 이어서 소녀의 손이 풀리고, 몸이 땅에 떨어졌다. 아프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나는 미친 듯이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흐윽! 쿨럭쿨럭쿨럭!”
타다닥. 달려 나가는 소녀의 발소리가 향한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야아! 젠장, 이 괴물아!!”
에드가 소녀를 향해 새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이제야 내가 풀려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날 구한 건 에드였다.
“에드!!”
무력감 속에 나는 죽어라 소리쳤다. 그렇게 에드를 구할 수만 있다면 목이 터져도 상관없으련만, 역시나 그런 일은 없었다.
“안 돼!!!”
평화로운 도시, 평화로운 사람들, 평화로운 삶. 에드의 가슴에서 튄 붉은 선혈은 내가 아는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듯했다. 눈앞이 핑 돌았다. 어지러워서 토할 것만 같았다. 최악이라는 생각도 잠시, 내 마음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에드!”
제니, 제니의 목소리였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내 탓이다. 내가 괜히 보고 싶다고 바라서다.
나는 짐승처럼 네 팔다리로 소녀에게 내달렸다. 그리고 하얀 치맛자락을 붙들고 사정했다.
“잘못했어요. 주인이든 신이든 뭐든, 시키시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제발 저 둘은 그냥 보내줘요, 제발!”
그때, 나를 내려다보는 소녀의 눈빛을 보고 난 깨달았다. 내가 빌고 있는 상대는 자비로운 신의 사도가 아니라 잔혹한 악마란 것을.
그래도 상관없었다. 제니와 에드만 지킬 수 있다면.
난 뭐라도 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