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햇살. 회색 구름. 축축한 비. 차가운 눈. 계절에 따라 성질이 다른 바람.
울퉁불퉁 다듬어지지 않은 돌길.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들. 창가에 놓인 화분.
황금빛 조명. 오색찬란한 잔에 담긴 사연들. 감미로운 노랫소리. 황금빛, 시간.
누군가의 일상이 눈을 통해 A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눈으로 본 것만이 아니라 귀로 들는 것, 피부에 닿은 것, 코로 맡은 것, 혀로 맛본 것, 그리고 가슴으로 느낀 것까지 직접 경험한 것처럼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건... 이 녀석의 기억?’
불어난 강물처럼 세차게 밀려드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주입당하는 건 매우 버거운 일이었다. 까딱 잘못했다간 자아에 대한 자각을 잃어버릴 것 같았다. 그랬다간 풀려날 때까지 자신이 누군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조차 잊은 채 실종된 시간 감각 속에서 영원에 가까운 세월 동안 남의 기억 속을 표류할 것이었다.
‘마치 ‘시스템’이 하는 짓 같잖아.’
A는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더욱 현실감이 느껴지는 기억의 홍수 속에서 자아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붉은 머리 남자의 의도를 A는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는 특별한 추억일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정보 투성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이런 불만을 알아챈 것처럼, 갑자기 드라마틱하게 변한 장면들이 거칠게 굽이쳐 들어오기 시작했다.
- 나 대신 그 녀석을... 잘 부탁해, 셀윈.
‘벤?!’
“흐! 으..!”
의식을 붙잡힌 이후 꼼짝도 하지 못하던 A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붉은 머리 남자는 속으로 감탄했다.
‘대단하네. 원래라면 아무 반응도 못하는 게 맞는데. 과연 바깥세상에서 오신 분은 급이 다르시다 이건가? 아니면... 벤에 대한 반응?’
기억 속 세상이 슬슬 파멸로 접어들 차례였다. 남자는 가능한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 애썼다. 아무리 강한 저항력을 보이는 A라도 자신이 겪은 트라우마에 그대로 노출되었다간 정신에 큰 대미지를 입을 터였다. 둑을 무너뜨릴 정도로 불어난 물을 열린 수문으로 조금씩 흘려보내는 것처럼, 남자는 조심스레 기억을 전달했다.
- 네게 의지 따윈... 없어...
재로 변해 사라져 가면서도 끝까지 얼굴에서 비웃음을 지우지 않는 소녀.
‘저 얼굴은! 샌디 던(Sandy Dunn)?’
사람들의 기억을 빼앗고 왜곡하는 미지의 존재. 그들과의 지리멸렬한 싸움이 계속되던 어느 날, 하늘로부터 검은 재앙이 내려왔다. 땅은 피로 물들었고, 몸을 잃은 코어들이 색색깔 비눗방울처럼 하늘로 떠올랐다. 이토록 아름다운 종말의 날, 신이 버린 땅은 ‘림보(Limbo)’가 되었고, 하늘에 새로운 ‘천국’이 세워졌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같이 덤덤히 펼쳐지는 그 광경을 A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아주 미약한, 어떤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 셀... 윈....
A는 소리가 난 곳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둠 속에서 한 여자가 힘겹게 기어 오고 있었다. 반짝이는 금발과 하얀 얼굴, 원피스와 목에 두른 녹색 비단 스카프, 늘씬한 팔다리, 그녀는 전신에 붉은 피 칠을 하고 있었다. 도와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달려도 A는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이것 또한 붉은 머리 남자의 기억이란 것을. 그녀와는 건널 수 없는 시간의 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것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한참을 기어가던 여자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시커먼 무언가를 끌어다 자신의 무릎 위에 놓더니, 고개를 숙여 키스를 했다. 그녀는 그것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잔잔한 호수 같은 눈에 투명한 슬픔이 맺혔다.
그 이상 봐서는 안된다는 서늘한 예감이 A의 몸을 휘감았다. 여자의 가느다란 손이 그녀의 가슴께로 향하는 걸 보고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푸욱. 섬찟한 소리가 그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A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가슴이 타는 것처럼 아파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흐윽, 흐으, 흡!”
- 사랑... 해요...
“컥... 케엑! 우웩!”
A는 가슴을 움켜쥐고 앞으로 쓰러졌다. 눈을 감은 채 무릎을 꿇고 구역질을 해댔다. 뜨거운 눈물과 콧물, 끈적한 침으로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 그는 속으로 절규했다.
‘더는 싫어! 제발 여기서 나가게 해 줘!’
“괜찮아?”
A는 붉은 머리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그동안 눈 한번 못 깜빡인 것처럼 눈이 뻑뻑하고 따가웠지만, 그보단 오래 물에 빠졌다가 갓 건져진 것처럼 숨이 찬 것이 더 괴로웠다.
“후아, 컥! 쿨럭쿨럭!”
A는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닿은 손에 차가운 시멘트 감촉이 느껴졌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 속에는 케케묵은 먼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A는 황급히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자신의 몸과 어두운 창고 내부가 등불에 비치고 있었다.
‘돌아왔어. 의식도, 감각도, 그리고 마비되었던 운동신경도.’
붉은 머리 남자는 양반다리를 하고서 편안히 앉아 있었다. 그새 다시 썼는지 검은 안대가 한쪽 눈을 가리고 있었다. A는 또 그와 눈이 마주치지 않으려 조심하며 조금 거리를 벌려 앉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남자가 너털웃음을 쳤다.
“아하하! 걱정 마, 이젠 안 할게.”
“......”
“정말이야. 딴 뜻은 없었어. 말보다 더 빠르고 편한 방법이라 한번 해봤는데, 생각보다 힘들더라고. 나도 또 하긴 싫어.”
“생각보다? 그럼 설마 이번이 처음이야?”
“응.”
“맙소사...”
다 끝난 일이지만 A는 엄습해 오는 께름칙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무경험자한테 이런 무지막지하고 위험천만한 짓을 당하다니. 하마터면 폐인이 될 뻔하지 않았는가. 정말 막무가내인 놈이다, 단단히 잘못 걸렸다는 생각에 그는 절로 한숨이 나왔다.
“미안, 끝에 불필요한 기억이 들어가서. 미처 조절을 못했어.”
“... 그 여자는?”
“중요하지 않아. 알 필요도 없고.”
한 마디 한 마디, 남자의 얼굴에서 표정이 지워지고 있었다. 보여줄 때는 언제고 이렇게 벽을 친담. 그토록 격한 감정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데, 아무것도 아닐 리가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A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알 필요 없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A가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상황은 대충 이해됐어. 너희들의 피 위에 세워진 천국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것도, 그를 위해 지옥문을 열고 싶어 하는 마음도.”
“이해한다라. 난 좀 더 확실한 대답이 필요한데. 우리와 함께 싸울 건지 아닌지.”
“그전에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어.”
“뭔데?”
“첫째, 아까 천국이 시스터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했지?”
“어, 그래.”
“그는 처음부터 천국에 있었던 존재가 아니지? 네 기억 속의 하얀 옷을 입은 소녀처럼. 그리고 그들은 같은 시기에 나타났어. 맞지?”
“내가 알기론 그래.”
“그들이 어디서 왔는지, 정체가 뭔지 알고 싶어.”
“애석하게도 나도 전혀 아는 바가 없어. 난 오히려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했는데.”
A는 눈을 내리깔고 생각에 잠겼다. 긴 속눈썹이 등불 빛을 받아 깊은 그늘을 만들었다. 꼭 붙어 있던 그의 두 입술이 느릿느릿 떨어졌다.
“... 그럼 두 번째 질문. 내가 만난, 지금 천국에 있는 ‘벤’은 누구지?”
붉은 머리 남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잘은 몰라도 내가 알던 벤은 아냐. 그는 완전히 시스템에 휘둘리고 있거든.”
“그게 무슨 뜻이야?”
“천국에의 잠입이 가능해지고 조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우린 알았지. 그곳은 거대한 실험장이란 것을.”
“실험?”
“지금까지 본 바로 그들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벤이 죽지 않을 것인가, 어떤 세상을 만들면 그가 계속 살고 싶어 할까?’ 같던데.”
“더 자세히 얘기해 봐.”
“우리가 천국에서 처음 본 벤은 나날이 삶의 의지를 잃어가는, 빈 껍데기 같았어. 놀랍게도 그에겐 아무 문제가 없었지. 생활은 윤택했고 모두가 그에게 친절했어. 매일매일 어제와 같은 행복의 연속이었고, 내일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는데, 그토록 완벽한 삶 속에서 어째서인지 그는 점점 시들어 가더군. 그리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뭐라고?”
“실패를 경험한 시스템은 그다음에 나타난 벤에게는 힘든 시련을 주었어. 그러나 수위 조절에 실패했는지 그 벤도 죽어버리더군. 다음, 또 그다음, 시스템은 계속 실패를 거듭했지.”
“그럼 지금의 벤은 대체..?”
“그나마 제일 성공에 가까운 실험체가 아닐까? 네 공격을 맞받아칠 정도로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운 거 보면.”
A는 눈살을 찌푸렸다. 나름 공들여 만든 자신의 공간을 벤이란 그놈이 아주 손쉽게 깨버리던 것이 생각나서였다.
‘이 세상의 본질을 완전히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 그런 녀석이 시스템의 손에 놀아나는 인형에 지나지 않는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어.’
A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 단순히 시스템이 만들어낸 복제품이라고 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 그의 정체와 저들이 그를 이용해 뭘 하려 하는지, 그 목적을 제대로 파악하기 전까진 지옥문 작전은 보류하고 싶은데.”
“좋아. 나도 신중한 편이 낫다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그 벤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무모한 미친놈이라고만 여겼는데 남자가 의외로 유연한 구석을 보이자 A는 눈을 껌뻑였다.
“왜?”
“아니, 너무 쉽게 그러자고 하니까 좀... 당황스럽달까.”
“내가 무슨 제멋대로 만 구는 폭군인 줄 알았어?”
“어.”
“너 사람 보는 눈이 없구나? 난 나보다 적합한 사람이 나타나면 얼마든지 지휘관 자리를 내어줄 수도 있다고?”
남자는 품에서 담뱃대를 꺼내어 그 끝을 A의 얼굴에 겨누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설령 그게 너라고 해도 말이야.”
“네가 그렇게 증오하는 시스템을 만든 자와 내가 동류여도?”
“말했잖아. 너에게선 죽음이 느껴진다고. 영원에 갇힌 우리에게 너만 한 구세주가 없지.”
바람도 없는데 등불이 몸을 떨자 남자와 소년의 그림자가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으로 상대를 응시하고 있는 남자와 대조적으로, A는 머뭇머뭇 시선을 떨구었다.
“... 나머지 두 조건을 듣고도 과연 그런 말을 할까?”
“아직 더 있어? 뭔데?”
“인간의 형태를 잃은 코어,”
코어, 그 말이 얹히자 기우는 저울처럼 두 사람의 태도가 역전되었다. 가벼워진 쪽, 소년의 무심한 말투는 남자의 신념에 뜨거운 생채기를 내었다.
“몇 ‘개’나 가지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