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필요악(1)

by Outis

밤하늘에 뜬 유일한 광원, 풍만한 보름달이 어둠으로부터의 영원한 가호를 약속하듯 교회를 비추었다. 달은 밝기가 가히 태양빛에 견줄만했으나, 위압적이지 않고 온화한 느낌을 주었다.


교회는 메인 건물인 예배당 뒤에 세 채의 별당이 죽 이어져 있는 구조로, 위에서 내려다보면 ‘ㅁ’자 모양으로 보였다. 중앙의 빈 공간에는 옆으로 긴 직사각형 모양의 정원이 허전함을 채웠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탐스러운 포도송이와 덩굴이 조각된 분수대가 있었는데, 3단으로 뿜어대는 물줄기에 달빛이 어려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분수 주변에 심어진 키 작은 꽃들은 한 붓 한 붓 정성스레 찍은 점처럼, 그 분포가 아주 인위적이지 않으면서도 너무 과하거나 심심한 곳이 없이 조화로웠다.

정원 쪽으로 열린, 각 건물의 복도는 이렇다 할 장식 없이 밋밋했다. 그러나 바닥과 벽, 기둥이 하얀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서, 굳이 화장으로 덮을 필요 없는 고운 살결같이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위잉. 예배당으로 이어진 복도 중간에 갑자기 터널 입구 같은 검은 구멍이 나타났다. 그 안에서 하얀 원피스를 입은 한 가녀린 소녀가 타박타박 맨발로 걸어 나왔다. 마치 제집 거닐듯이 자연스러운 소녀의 발걸음이 예배당 문 앞에서 멈추었다. 끼이익. 소녀는 제법 두꺼운 문 두 짝을 얇은 팔과 손목으로 별 무리 없이 밀어젖혔다. 그러고는 예배당 앞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눈부시게 하얀 수녀복을 입은 시스터가 제단을 내려다보고 서있었다. 달을 반기는 달맞이꽃처럼, 소녀의 시선은 줄곧 시스터의 뒷모습에 붙박여 있었다. 분홍빛 뺨에 어린 설렘의 미소는 시스터 뒤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두 그림자를 발견한 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여왕의 명을 기다리는 기사처럼 무릎을 꿇은, 각각 회색과 검은색 수도복을 입은 여자와 남자. 소녀는 후드로 가린 두 사람의 정수리를 한 번씩 쏘아보고는, 둘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고는 바로 자신의 도착을 고하려다가 제단 위에 뭔가 있음을 알고 멈칫했다. 하마터면 큰 실수를 할 뻔했다, 소녀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바짝 말라오는 입술을 살짝 혀로 훑었다.


잠시 후 시스터가 허리를 펴고 똑바로 섰다. 사라락. 옷자락 스치는 소리의 끝자락에 소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시스터. 당신의 종,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시스터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기뻐해야 할 일인가 아니면 걱정해야 할 일인가. 목소리만으로는 시스터의 기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름다워만 보였던 순백색의 뒷모습은 소녀에게 점점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목에 납덩이가 걸린 기분을 느끼며 소녀는 떨리는 눈을 들었다. 어느새 고개를 돌린 시스터가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 얼굴을 보자 소녀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자신은 시스터의 총애를 받는 특별한 존재이다.

이런 우월감을 착각이라고 치부하기엔 소녀의 용모는 확실히 특별했다. 긴 갈색 머리카락과 오묘한 자수정빛 눈동자, 하얀 피부. 양 옆의 회색 옷을 입은 중년 여자와 검은 옷을 입은 젊은 남자와 달리, 새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생김새가 시스터와 매우 닮아 있었다. 굳이 둘이 다른 점을 꼽으라면 소녀가 막 피기 직전인 꽃봉오리인 반면 시스터는 절정에 이른 만개화라는 것, 소녀는 아직 다듬을 부분이 남아 있는 조각품인데 비해 시스터는 흠잡을 곳 없는 완성작이라는 것, 소녀는 님프에 가깝고 시스터는 여신에 빗댈 만한 오오라를 가졌다는 것이었다.


“여서 오세요, 샌디.”


시스터께서 친히 이름을 부르셨다, 소녀는 감격했다. 온 세상에 시스터와 자신만 남은 기분에 휩싸인 소녀는, 자신이 시스터의 다른 두 종을 깔보는 것과 똑같은 눈으로 시스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시스터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서 힐끔 제단 쪽에 눈길을 주었다. 제단 위에는 황홀한 표정으로 넋이 나간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날카롭게 빛나던 그의 푸른 눈은 흐리멍덩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환희에 차 다물어지지 않는 입은 안 그래도 후덕한 턱을 더 늘어져 보이게 했다. 옆으로 빗어 넘겼던 회색 머리칼이 한 가닥 한 가닥 이마로 미끄러져 내려와 프로페셔널하던 그의 모습을 흐트러뜨려 놓았다. 여유롭게 벤을 도발하던 이와 동일인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망가진 그는 그레그 수사관이었다. 시스터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수고 많았어요. 이만 가보셔도 좋습니다.”


아직 남아 있는 여운이 못내 아쉬워 느릿느릿 움직이는 그에게 회색 수도복을 입은 여자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레그! 얼른 물러나지 못할까!”


천국의 주민들 사이에 숨어들어 자연스레 벤을 감시하고, 천국에 어떤 이변이 일어나는지 계속 주시하는 집단 ‘오큘러스’. 회색 수도복을 입은 여자는 오큘러스의 수장이자, 중간 관리자인 그레그의 상관이었다. 익숙한 고함소리에 혼쭐이 나고서야 정신을 차린 그레그는 허겁지겁 제단에서 내려왔다. 급하게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자빠질 뻔했으나 가까스로 부끄러운 꼴은 면했다. 꾸벅 절을 하고는 뒤뚱뒤뚱 물러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소녀와 검은 수도복의 남자가 실실 비웃음을 흘렸다. 주제넘게 시스터를 가까이서 뵌 것도 못마땅한데, 저런 추태를 보여 자신에게까지 이런 굴욕을 주다니! 여자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꾹 참으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시스터. 일개 오큘러스 따위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또 이런 일이 없도록 다음부턴 무조건 제가 보고 드리는 걸로 하심이...”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내 눈으로.”


시스터가 딱 잘라 말하자 여자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시스터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허공에 대고 말했다.


“벌써 열 번째.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아요. ‘마더’가 얼마나 더 시간을 벌어줄지, 계속 우리에게 협조할지도 불확실하고요.”


그리고 또 하나, 어쩌면 지금까지 해온 모든 수고를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를 위협적인 변수. 시스터는 ‘그’에 대한 언급을 삼갔다. “말이 씨가 된다.”는, ‘자신들’보다 열등한 존재가 만든 말 따위를 믿어서가 아니었다. 그럴 시간에 다른 할 수 있는 걸 하는 편이 낫다는 합리적인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도 이번엔 살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보이지 않았습니까. 너무 심려치 마옵소서.”


주인의 기분을 달래려 여자가 긍정적인 측면을 강조했다. 효과가 있었는지 시스터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그래요. 기억을 되찾았을 때도 과연 계속 살고자 할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확실히 눈여겨 볼만한 성과였어요.”


“아직 기억을 거부하고 있습니까?”


검은 옷을 입은 남자의 물음에 시스터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애써 밥을 지어놨더니 재를 뿌려? 회색 옷을 입은 여자가 눈치도 없이 끼어든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물었다.


“그럼 ‘놈’은요? 지금처럼 계속 두고 보십니까?”


남자가 언급한 ‘놈’이 누구인지 그 자리에 있는 모두는 잘 알았다. 천국에 들어온 침입자, 하얀 머리의 소년이었다.

검은 수도복을 입은 남자는 소년을 공격한 검은 양복 남자의 상관이자, ‘디스포저’의 수장이었다. 디스포저의 주요 임무는 천국에 위해를 가할 만한 존재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제거, 말 그대로 상대를 아예 없애 버리는 것으로, 이를 위해 디스포저들은 막강한 힘과 함께 잔인함과 살기를 가졌다. 천국과 어울리지 않는 이들은 보통 교회 별채에 머물면서 시스터의 명이 있을 때만 움직였다. 시스터가 예배당을 거의 떠나지 않는 까닭에 그녀의 명은 대부분 오큘러스가 전달했다. 살해 충동에 휩싸여 폭주하지 않도록 수장을 제외한 나머지 디스포저들은 자의식이란 것이 허락되지 않았으며, 명령대로 움직이는 기계에 가까웠다.

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가진 수장이어도 결국 본성은 살인기계. 검은 수도복의 남자는 하얀 머리의 소년을 생각하며 강한 살욕을 품었다. 어떻게 하면 가능한 천천히 고통스럽게 소년을 없앨 수 있을까, 상상만 해도 남자는 절로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이를 간파한 시스터가 단호한 어조로 그의 즐거운 상상을 끊었다.


“그는 그대로 두세요.”


“허나 시스터, 놈이 늑대들과 손을 잡았다간...”


“그야 그대가 여.태.껏. 레지스탕스를 소탕하지 못했기 때문 아닙니까?”


“... 송구합니다.”


회색 수도복을 입은 여자와 소녀가 피식 웃었다. 할 말이 많았지만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꽤 억울할 텐데, 그럼에도 자신에게 복종하는 그를 보고 시스터는 목소리를 한껏 누그러뜨렸다.


“그를 천국에 들일 때도 말했지요? ‘Malum necessarium’, 세상에는 ‘필요악(必要惡)’이란 것이 있다고. 비록 악(惡)이로되 그는 우리 어린양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거름입니다. 이번 성과도 사실 그가 기여한 바가 있지 않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저는 걱정이 되어서...”


시스터는 남자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두 손으로 남자의 뺨을 살포시 감싸고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다 생각이 있으니 걱정 마세요. 그는 내게 맡기고, 그대는 레지스탕스 소탕에 힘써줘요.”


아름다운 시스터의 거룩한 눈빛과 신성한 손길에 남자는 완전히 매료되었다. 그러나 실상 시스터의 속마음은 전혀 거룩하거나 신성하지 않았다. 소년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는 끓어오르는 욕정과 강한 소유욕을 느꼈다.

아무것도 모르고 옆에서 지켜보는 여자와 소녀는 남자가 부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특히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소녀는 조바심이 났다. 뭐라도 말해서 시스터의 관심을 돌려야 하는데, 고민에 빠진 그녀의 뇌리에 순간 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이 어떠한 파장을 불러일으킬지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조급한 소녀의 입 밖으로 생각이 튀어나왔다.


“시스터, 그럼 시간의 흐름은 어쩌죠? 그가 있는 한 계속 이렇게 늘어진 채로 두어야 할 텐데요?”


“... 네, 그렇게 되겠지요.”


시스터는 남자에게서 손을 거두며 허리를 폈다. 미소가 사라진 그녀의 얼굴은 주변 공기까지 얼어붙게 만들 정도로 쌀쌀맞게 변했다. 한창 누리고 있던 은총을 빼앗긴 남자는 못마땅한 눈초리로 소녀를 흘겨보았고, 여자는 심기가 불편해진 시스터의 눈치를 살피느라 안절부절못했다. 소녀 또한 분위기가 안 좋게 바뀌자 속이 까맣게 타들어갈 지경이었다.

세 사람의 마음 따위야 어떻든 시스터는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소년을 천국에 잡아 두면 시간이 느려지는 것은 불가피했다. 시간이 부족한 시스터에게 있어 이것은 크나큰 페널티였다. 하지만 둘 다 가질 수는 없는 노릇.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놓아야 했다. 모든 건 인간의 육체, 그 거추장스럽고 쓸모없는 것 때문이었다. 시스터는 불쾌함을 느꼈다. 역시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 육체를 버리고 정신만 남겨 놓았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유롭게 살 수 있다. 비록 마더는 아직도 인간이 육체 없이 살 수 없다 믿지만.


[시스터.]


말이, 아니 생각이 씨가 되었나. 마더가 시스터를 부르고 있었다.


keyword
이전 18화조우(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