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터.]
마더의 부름에 시스터는 잠시 머뭇거렸다. 잠깐 자리를 비우겠노라고 앞의 세 사람에게 말해야 하나. 왠지 번거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여기선 눈 깜짝할 새일 테니까.’
시스터의 긴 속눈썹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우아하게 내려앉았고, 그 궤적을 따라 고운 우윳빛 눈꺼풀이 신비로운 자수정빛 눈동자를 덮었다. 서서히 가늘어지던 시야가 완전히 어둠에 잠기자,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면서 끝도 없이 이어진 새하얀 공간이 펼쳐졌다. 그곳은 빛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그 외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구석구석 안 미친 곳이 없으되 홀로 있으니 빛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 유(有)와 무(無)가 뒤섞인 혼돈 속 그 어딘가에 시스터의 사유(思惟)가 떠올라 스스로의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그 이미지는 차츰 주변과 분리되며 또렷한 경계를 찾아갔다. 이내 예배당에 있는 시스터와 똑같이 생긴 그녀의 자아상이 완전히 구현되었다.
조금 뒤 시스터 앞에 또 다른 인간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시스터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마더.”
“시스터.”
무표정하게 서로의 타이틀을 호명하는 것으로 끝난 짧은 인사. 오랜만이라느니, 그동안 잘 있었냐느니, 둘 사이에 그런 허례허식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시스터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더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영 못마땅한지 퉁명스럽게 말했다.
“또 그 모습인가요?”
마더의 자아상은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목부터 발끝까지 검은 드레스와 레이스 장갑, 구두로 치장하여 하얀 수녀복을 입은 시스터와 대조를 이루었다. 윤기 나는 갈색 웨이브진 머리카락은 품위 있게 어깨를 거쳐서 가슴께까지 내려와 있었고, 도도한 분위기의 이목구비는 백옥 같은 얼굴에 그려진 완벽한 그림이었다. 특히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흡인력이 있었다.
시스터의 핀잔을 듣고 마더는 눈을 살짝 내리깔며 눈썹을 위로 올렸다. 너의 하찮은 시비에 시간을 낭비하기는 싫으나 너를 위해 알려주긴 하겠다는 뜻을 표정으로 전하는 듯했다.
“이 또한 내가 선택한 사랑, ‘아가페(Agape; 거룩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발현입니다. ‘에로스(Eros; 육체적이고 충동적인 사랑)’를 택한 당신은 이해하기 힘들겠지만요.”
이번에는 시스터의 눈썹이 움찔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듣기 거북하군요. 아가페도 에로스도 모두 사랑의 일면이거늘. 꼭 사랑에 위계가 있는 것처럼, 당신의 사랑이 더 우월한 것처럼 들리는데요.”
“그렇게 들으셨다니 유감입니다. 나 또한 그저 다름에 대해 얘기했을 뿐. 잘 이해했다면 내 의도가 당신의 뜻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요. 당신이야 말로 편견에,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 아닌가요?”
시스터는 입술이 우그러질 정도로 입을 꾹 다물었다. 거만한 것! 윌리엄(William) 그 작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알랑방구나 뀌는 주제에 잘난 척은! 저 꼴도 그 변태자식의 취향에 맞춘 것 아닌가.
후드득 정신없이 떨어지는 빗줄기를 흔적도 없이 삼켜버리는 사막 모래처럼, 쏟아져 나오는 불만을 시스터는 나오는 족족 바로 삼켰다. 이런 생각들을 마더에게 들켜서는 안 되었다. 지금은 마더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시스터가 천국에서 벌이고 있는 계획은 마더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니꼬워서 그렇지, 마더의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자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는 일. 과연 아가페였다.
“보자고 하신 이유가 따로 있나요?”
마더의 볼일이야 불 보듯 뻔한 일. 모른 척 물으면서 시스터는 입안이 바짝 말랐다. 굳이 ‘따로’라는 말을 붙인 것은 혹시, 만의 하나라도 피하고 싶은 그 얘기 말고 다른 일이 아닐까 하는 헛된 바람에서였다.
“앞으로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합니까?”
역시나. 예상대로 가장 껄끄러운 얘기가 나왔다. 시스터는 마더의 표정을 살피며 머뭇머뭇 입을 뗐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 하아.”
구체적인 건 하나도 없는 애매한 대답. 기대도 안 했지만 막상 실제로도 답이 없자 마더는 한숨을 쉬었다.
정확히 언제까지라고 시원하게 말 못 하는 시스터도 마더만큼이나 답답함을 느꼈다. 하지만 독촉하는 자와 독촉당하는 자는 엄연히 입장이 다른 법. 제아무리 천국을 주름잡는 시스터라도 마더의 일거수일투족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건 인간의 목숨이 나약한 육체에 붙어 있기 때문. 시스터는 속으로 그 불완전한 세상에 저주를 퍼부었다.
“이번에 들인 외부인은 어떻습니까? 쓸모가 있을 거 같나요?”
“네. 그로 인해 눈에 띌 만한 성과가 있었습니다.”
반쯤 포기한 마더와 절박한 시스터. 둘 사이의 갈등은 전혀 진전이 없는 퍼즐 놀이에 새로이 추가한 한 조각, 소년을 통해 가까스로 화합에 이르렀다.
“그렇습니까. 윌리엄도 그에게 흥미를 보이더군요. 덕분에 시간을 좀 더 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거 잘됐네요.”
“하지만 그만큼 기대하는 바도 클 것이니, 조만간 그럴듯한 실적을 올려야 할 거예요.”
“그러죠.”
의외로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자 시스터는 얼른 이대로 대화가 마무리되었으면 싶었다. 조급한 마음 탓에 짧아진 그녀의 말은 다소 가볍고 건성으로 하는 소리같이 들렸다. 이로 인해 다시 심기가 불편해진 마더가 으름장을 놓았다.
“시스터,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당신과 생각이 달라요. ‘그’의 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난 주저 없이 당신을 배신할 겁니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마더의 경고는 그저 유예기간이 주어졌을 뿐이라는 사실을 시스터에게 각인시켰다.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시간과의 숨 막히는 싸움.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먼저일까, 아니면...
시스터는 다른 결말은 생각하기도 싫었다. 생각해서도 안 되었다. 빨리 돌아가서 계획을 마저 진행해야 했다.
“그 외에 더 하실 말 있나요?”
“아니요. 그게 전부입니다. 어떻게, 온 김에 아버지를 뵙고 가겠어요?”
“... 그러고 싶지만 저쪽에 준비를 안 하고 와서요. 다음에 뵙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시스터 소피아.”
시스터는 인사 나눌 시간도 아까워 고개만 까딱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예배당에 돌아와 있었다. 마더와 만나는 동안 예배당에서 흐른 시간은 고작 눈 한 번 깜짝할 새. 모든 건 아까 눈을 감기 전 그대로였다.
앞의 세 사람에게 시스터가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한 번째, 진행하세요.”
시스터에 이어서 순수한 사유의 공간을 벗어난 마더는 모니터로 한 병실을 지켜보고 있었다. 병실 침대 위에는 온갖 기계에 둘러싸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낙엽같이 말라버린 한 육체가 있었다. 빈 껍데기 같은 저것이 인간이라니. 유한의 감옥에 갇힌 지성, 미처 다 피지도 못한 가능성. 이 얼마나 비통한가! 이리 보면 시스터의 생각이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마더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육체는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필요조건이었다. 비록 그것이 족쇄일지라도, 쓰디쓴 숙명일지라도. 더 나아가 악의 근원일지라도.
“그렇다고 해도 나는 ‘당신’을 살리고 싶어요.”
[소피아.]
저 목소리. 윌리엄이 부르고 있었다. 마더는 한 번 더 침상 위의 그에게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고서, 적장에게 끌려가는 공주처럼 눈을 감았다.
마더는 다시 새로운 공간에서 눈을 떴다. 고풍스러운 문양의 카펫이 제일 먼저 보였다. 고개를 들자 카펫과 잘 어울리는 벽지와 고급스러운, 실제로도 고가인 가구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책장을 빽빽이 채우고 있는 색색깔의 고서들은 이곳이 한 저택의 서재라는 걸 알려주었다. 화려한 금장식이 둘러진 벽난로에서는 두툼한 장작에 뿌리내린 오렌지색 불이 방 안에 어스름한 빛과 열기를 내어주고 있었다.
마더가 자신을 찾은 이, 윌리엄의 소재를 알아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맞은편에 위치한 책상에 걸터앉아 그녀를 감상하고 있었다. 60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주 잘 관리된 그의 몸은 선이 젊은이의 그것처럼 매력적이어서 가운만 걸치고 있어도 한 장의 화보 같았다. 유전자의 힘인지, 아니면 넘치는 돈으로 육체의 시간을 거꾸로 돌린 것인지, 얼굴도 본래 나이보다 적어도 20년은 젊어 보였다. 생긴 것만 보면 부잣집 도련님이 고생 한 번 안 하고 곱게 나이 든 사례의 정석이나, 그의 푸른 눈에는 그런 순진하고 뻔한 동화를 찢어 발길만큼 날카로운 빛이 서려 있었다.
마더는 미세하게 눈동자만 움직여 책상 뒤 벽에 걸린 커다란 인물화를 바라보았다. 먼지 한 톨 묻어 있지 않은 액자 속에 고이 모셔진 인물은 오직 한 명, 윌리엄의 단 하나뿐인 여인이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과 도발적인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전신에 검은 옷을 걸치고 있어 꼭 미망인같이 보였다.
“부르셨어요, 윌리엄?”
그림 속의 그녀가 그대로 걸어 나온 것 같은 모습. 마더가 윌리엄을 향해 고고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