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필요악(3)

by Outis

“인간의 형태를 잃은 코어, 몇 ‘개’나 가지고 있지?”


“몇, 개?”


누구에게는 영혼이자 존재의 증명인 것이 다른 누구에게는 그저 이용가치가 있는 물건일 뿐. 이 아찔한 격차 속에서 양보를 모르는 두 사람이 대립했다.

남자가 분노할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알고 있기에 소년은 일부러 그런 단어를 골랐다. ‘각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 같이 어울리긴 하겠지만 난 너와 가치관이 달라, 굳이 거짓 연기를 하면서까지 너희 비위를 맞춰 줄 생각은 없어’, 이러한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 편이 상대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너도 내 솔직한 대답을 듣고 싶잖아?’


소년이 보기에 먼저 질문을 던진 건 남자 쪽이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 평범한 일상의 기억을 그토록 실감 나게 보여준 이유, 당시엔 당황해서 그 의도를 알아채지 못했으나 생각이 정리가 된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어때? 너희 세상과 많이 다르지 않지?’라고, 남자는 천국 시스템의 관리자와 동류인 자신에게 물었던 거였다.

‘아니, 본질부터가 틀려’, 눈치 빠른 남자는 소년의 저 한 마디에 숨겨진 진짜 의미를 읽어냈다. 거대한 파도처럼 일어난 분노는 곧 쓰라린 비하감을 남기고 물러갔다. 소중히 간직해 온 보물이 사실은 가짜라는 실망감과 허무함은 할퀸 자국이 드러난 해안처럼 남자의 가슴을 휑하게 했다. 그러나 그 속에 박혀 있는, 스러져간 이들의 모습과 기억이 하나 둘 반짝이고, 다시 분노가 차올랐다. 남자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저들의 인정이 뭐가 필요해? 모든 일의 원흉이 저것들인데.’


남자의 샛노란 눈이 잔뜩 독이 오른 독사처럼 소년을 노려보았다. 이에 소년은 눈썹하나 꿈쩍 않고 그 흉악한 눈빛을 맞받아쳤다. 그리고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왜 그렇게 기분 나빠하는데? 이미 코어를 도구로 쓰고 있으면서.”


‘레지스탕스에는 코어에 깃든 힘을 사용할 줄 아는 이가 있다’, 소년은 늑대 탈을 쓴 남자를 보고 이미 감을 잡았었다. 그가 쓰던 채찍과 팔찌, 특히 공간을 비틀어 이음으로써 순식간에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게 하는 팔찌는 보통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으면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설령 지식이 있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천국’이라는 이름이 주는 뉘앙스와 달리 여기선 뭐 하나 공짜로 되는 것이 없었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대가가 필요하며, 이 경우엔 막대한 에너지였다.


‘벤이 만든 제2의 ‘아지트’, 그 중심인 ‘센트럼(Centrum)’의 힘은 어디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렇다면 따로 휴대용 에너지원을 고안해 냈을 테고, 그게 뭔지는 뻔하지.’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 떠지는 걸 보고 소년은 자신의 짐작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알고는 있었어도 이렇게 확인하고 나니 놀라움이 더했다. 남자의 말과 행동이 다른 점이나 저들의 윤리적 문제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다만 여기 지식수준이 이 정도로 발전했다는 것이 감탄스러웠고, 동시에 걱정이 되었다.


한편, 남자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직 완전히 아군도 아닌 소년에게 가장 감추고 싶은 비밀을 간파당하다니.

시스터가 보낸 디스포저들에 의해 수많은 이가 희생당했고, 살던 도시는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쑥대밭이 되었다. 그날 이후 남자는 복수를 다짐하면서 먼저 간 동료들의 목숨값으로 무기와 팔찌를 만들었다. 그 가증스러운 ‘물건’들은 육체는 잃었지만 아직 생동하고 있는 그들의 생명력을 갉아먹으며 작동했다. 그런 걸 남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부하들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저 충성스럽기만 한, 자신의 말이라면 그 어떤 의문도 품지 않고 따라오는 그들의 손에.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죄책감, 자괴감, 그리고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외로움. 남자는 줄곧 그 무게를 혼자 감내해 왔다. 어쩔 수 없다고, 아니면 저들과 싸울 수 조차 없다고, 영원히 여기 지하 아지트에서 쥐새끼처럼 숨어 살 수밖에 없다고, 수없이 되뇌고 변명하며 모순 투성이인 자신을 호탕한 겉모습 속에 숨겨왔다. 그랬는데.


“... 용케 알고 있네. 네 말대로야.”


더 이상 혼자만의 비밀이 아니게 되어서인지, 의외로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며 남자는 순순히 인정했다. 알아챈 상대가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소년이란 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절대 안 돼!’라는 갑갑함에 ‘뭐 어때?’라는 여유가 비집고 들어온 느낌이었다. 망가질까 봐 전전긍긍 쥐고만 있던 완벽한 장난감에 실수로 흠이 생기자 비로소 맘껏 갖고 놀 수 있게 된 것처럼. 그간 너무 눈에 힘을 주고 있었나. 남자는 하나 밖에 안 남은 눈을 힘겹게 감았다.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한 방울이나 두 방울이나, 하얀색에 검은색이 섞이면 결국 다 회색. 더럽혀진 자신의 긍지와 탁해진 영혼은 이 세상의 끝과 함께 사라질 테다. 언젠가 끊어질 자가당착의 줄 위에서 춤사위 한 판, 나쁘지 않지 않은가. 한 번으로 끝난다면.

스르륵 다시 눈을 뜬 남자가 부탁했다.


“다른 녀석들한테는 비밀로 해주겠어?”


소년은 늑대 탈을 쓴 남자가 한 말을 떠올렸다.


- 저희도 목숨을 걸고 있으니까요.


‘적어도 하얀 늑대 그 녀석은 이미 알고 있는 거 같던데.’


말해 봤자 좋을 건 없을 거 같다는 생각에 소년은 이에 대해 함구하기로 했다. 그는 손짓으로 입에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리고 피식 새어 나오는 남자의 힘없는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뜬금없이 엉뚱한 말을 꺼냈다.


“Necessary evil(필요악).”


“뭐?”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피해 갈 수 없는 악이란 뜻이야. 세상엔 그런 것도 있다고.”


눈만 껌뻑이는 남자에게 확신을 줄 요량으로 소년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 너희 같은 거지. 그러니까, 너희는 어울리는 짓을 하고 있을 뿐이란 얘기야.”


소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더욱 어안이 벙벙해졌다. 설마 지금 이게 위로랍시고 하는 소린가? 전직 바텐더로서 사람의 마음을 다독이는 것도 업무의 일부였던 남자는 큰 문화충격에 빠졌다. 그야말로 저세상 위로였다.

어찌 됐든 효과는 있었다. 뭔가가 가슴을 간질였고, 남자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아하하! 그쪽 세상에도 그런 게 있나 봐?”


“그럼. 여기보다 훨씬 엉망인 곳인걸.”


“그거 참 위로가 되는군.”


남자는 잠시 소년이 한 말을 곱씹으며 웃음을 흘렸다. 이윽고 지하창고 공기의 텁텁함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게 되었을 때,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얼마나 필요해?”


필요한 코어의 개수는 일곱 개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소년은 거기에 보험으로 하나를 더 더했다.


“여덟.”


“그렇게나 많이? 대체 어디에 쓰려고?”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히죽 웃었다.


“나 대신 움직일 체스말이 필요해.”





“천국에 잠입 좀 해줘야겠어.”


앨리스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아르고스를 째려보았다.


“왜요?”


“당신 아버지가 뿌린 재앙의 씨앗, 그걸 깨울 열쇠는 LoS가 가지고 있어. 놈들은 천국에 입성하자마자 이 세상을 쓸어버릴 계획이었으니까, 분명 그 안에 단서가 있을 거야.”


“... 그쪽이 직접 가면 되잖아요.”


“적재적소. 팔팔하신 요원님이 몸으로 뛰시고, 나 같은 방구석 해커는 뒤에서 서포트를 하는 게 그림이 맞지 않아?”


“그래도 상부의 허가 없이 그건 좀...”


“앨리스, 지금은 규칙에 얽매여 일을 그르칠 때가 아니야. 이런 걸 팰런 국장한테 알려 봐. 그 즉시 기를 쓰고 증거인멸부터 할걸? LoS에 대한 수사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고, 자기들이 지은 죄도 있으니 잠잠한 벌집을 들쑤실 리가 없지. LoS가 천국 시스템을 가져갔지만 계속 모니터링하고 있으면 괜찮다고, 지금껏 안일한 태도를 보여 왔잖아. 이대로 평탄하게 임기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노인네가 뭐 아쉬워서 일을 크게 벌이겠어. 이번 사건만 봐도 그래. 다른 건 안중에도 없고, 그저 자기들 비밀이 드러날까 봐 나한테 은밀히 부탁한 거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깊이 파고든 걸 알면, 제일 먼저 우릴 제거하려 들걸?”


앨리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딱히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르고스의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다 맞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아르고스가 제안을 받아들인 날 팰런 국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섣불리 일을 크게 벌였다간 자칫 소년 A에 대한 얘기가 세간에 퍼질 수도 있어. 벼룩 잡으려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앨리스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눈이 가늘어지면서 긴 속눈썹이 앞을 가렸다. 아주 조금 흐릿해진 시야 속에서 그녀의 동공이 바삐 움직였다. 최근 며칠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마치 뚝뚝 떨어지는 테트리스 블록처럼, 생각할 건 많은데 시간이 없었다. 지저분하게 쌓인 블록과 정리를 막는 빈틈, 지금은 그 사이 어딘가 있을 돌파구를 본능적으로 찾아내야 할 때였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앨리스가 아르고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갈게요. 천국에.”





“그럼 따라와. 안내해 주지.”


남자와 소년,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불을 들고 앞서 가는 남자의 등을 향해 소년이 물었다.


“이제 자주 볼 텐데, 뭐라고 불러야 해?”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옆얼굴에 그늘이 졌다. 빛을 받은 쪽과 받지 못한 쪽, 정면에서 보면 얼굴이 나뉜 것처럼 보일 것이다.


“뭘? 나?”


“응. 이름이 뭐야?”


- 셀윈.


남자의 기억 속에서 금발의 여자는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벤도. 그러니 당연히 셀윈이겠지. 이미 알고 있지만 확인차 물은 것뿐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소년은 초조함을 느꼈다. 꿀꺽,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남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카르마(Karma).”


“... 어?”


대답은 전혀 예상 밖, 의외였다. 과녁을 빗나간 것도 모자라 아예 엉뚱한 곳에 맞았다. ‘카르마’라고? ‘왜?’라는 물음은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으러 다녔고, 맨 먼저 그 의미에 가 닿았다.


“카르마? 업보?”


“어, 알고 있구나.”


남자는 이제 소년 쪽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빛과 어둠, 둘로 나뉘었던 얼굴이 하나로 합쳐졌다.


“지금의 나한테 이만큼 잘 어울리는 이름도 없지. 그러는 넌, 이름이 뭐야?”


“... A.”


“A? 영어의 첫 번째 알파벳?”


“지금의 나한텐 그거면 충분해.”


“뭐, 짧고 쉬워서 좋네.”


남자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고갯짓으로 아까 가던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A, 계속 가볼까? 센트럼으로.”

keyword
이전 20화필요악(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