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Unnamed> A&B' 시리즈는 심적 불편함을 야기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읽으시기 힘들 수 있습니다. 외전이라 읽지 않으셔도 전체 내용을 이해하시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테니,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본의 아니게 불편과 불쾌함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창고에서 나온 두 사람은 카르마가 든 작은 등불에 의지하여 어두운 복도를 걸어갔다. 스트레이트, 첫 코너에서 왼쪽, 다음 코너에선 오른쪽, 다시 긴 스트레이트, 갑자기 오른쪽, 왼쪽, 왼쪽, 이번엔 살짝 완만한 커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A는 슬슬 방향감각과 시간감각을 잃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한참 말없이 걷기만 하던 카르마가 돌아보지도 않고 A에게 말을 걸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A는 환청을 들었나 싶어 카르마의 붉은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계속 앞만 보고 걷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응. 뭐 물어봐도 되냐고.”
아, 환청은 아니었구나. 뭘 물어보려고 저렇게 뜸을 들이나. A는 일부러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어. 뭔데?”
“대체 누굴 그렇게 찾아다니는 거야?”
“......”
“네게 당한 피해자들은 하나같이 널 만나기 전에 시스터의 ‘싱크로나이저(Synchronizer)’에게 뭔가를 주입당했어. 넌 마치 그에 이끌린 것처럼 그들 앞에 나타났고.”
“... 역시 저들에게 놀아났던 거로군. 그 ‘벤’을 만난 것도 그들의 계획대로였나.”
“넌 피해자들을 제거하기 전에 꼭 물었다지? 자길 아느냐고 말이야.”
“......”
“아무 말도 안 하는 거 보니 맞나 보네. 밖에서 온 너를 아는 사람, 그게 누구지?”
- 나 대신 그 녀석을... 잘 부탁해, 셀윈.
카르마는 등 손잡이를 더욱 세게 쥐었다. 왜 갑자기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자신은 과연 누구와 손을 잡은 것일까. 지금 등 뒤의 저 녀석과 나중에 결국 적이 된다면,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할까.
“... 글쎄?”
A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소릴 해서 싫은 기억을 불러일으키고 말이야. 뛰어난 성능을 가진 만큼 그의 두뇌는 선명한 기억들을 폭포수처럼 쏟아내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직접 보지 그래?”
탁. 카르마의 걸음이 멈추었다. 그의 얼굴이 A를 향했고, 샛노란 눈이 회청색 눈을 바라보았다.
“아까 나한테 네 기억을 보여줬던 거, 이론상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아? 막 생각났으니 보고 싶으면 봐. 그리 재밌지는 않겠지만.”
그래, 곧 잊힐 정도로 하찮은 이야기다.
소중한 이들을 지키려 했으나 끝내 아무도 지키지 못한 남자와
자신을 받아줄 곳을 찾길 바랐으나 결국 자기 자신을 버린 소년의 이야기.
꾸물거리는 회색빛 하늘. 차가운 겨울바람.
갈색 빵 봉투를 안은 한 남자가 허름한 아파트 입구 계단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안녕, 꼬마야. 여기서 뭐 하니?”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차디찬 시멘트 계단에 웅크린 채 앉아 있는 어린아이가 있었다. 얇은 반팔 티셔츠에 물 빠진 청바지.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을 한 아이는 무릎 사이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새하얗고 퀭한 얼굴, 목이 늘어난 티셔츠 안쪽으로 훤히 드러난 앙상한 가슴, 비쩍 마른 가냘픈 팔은 쉽사리 하나의 결론을 도출했다. 영양부족. 체구로는 대략 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데, 왠지 실제로는 그보다 더 나이가 있을 것 같았다.
겨울 하늘을 닮은 아이의 눈이 남자를 향했다. 검은 동공의 심연 속에는 모르는 사람이 접근해 올 때 느끼는 본능적인 경계심을 넘어선 무언가가, 반복적인 경험에 의해 학습된 두려움 같은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모든 걸 포기한 듯 아이의 눈은 흐리멍덩한 구름빛으로 변했다. 남자는 그 모습이 꽤 묘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고개를 숙여 아까처럼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마치 돌이 되어 그대로 굳은 것 같은 모습. 차가운 바람이 불어도 아이는 떨지 않았다. 이미 추위에 절여져서 몸이 제 기능을 잃은 걸까. 남자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대로 놔둬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말을 걸었다.
“얼른 집에 들어가. 이런 데서 그런 차림으로 있다간 감기 걸려.”
“못 들어가...”
날 선 공기가 이미 작고 연약한 코와 목구멍을 긁어놓았는지, 아이는 까슬한 목소리를 힘없이 흘렸다.
“... 너 여기 살아?”
대답 대신 조그만 머리가 작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엄마한테 혼나서 쫓겨났어?”
이번에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정곡을 찔렸나. 이런 날씨인데,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 엄마도 애를 계속 밖에 둘 생각은 없을 거다. 남자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살살 애를 달랬다.
“그냥 무조건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 엄마도 분명 용서해 주실 거야.”
“지금 들어가면 혼나. 엄마가 일할 때는 들어가면 안 돼.”
남자는 말을 가벼이 내뱉은 걸 후회했다. 아이가 처한 상황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는 물끄러미 아이의 뒤통수를 내려다보았다. 비뚤비뚤 잘린 갈색 머리카락에는 흰머리가 제법 많이 섞여 있었다.
“엄마는 내가 없는 편이 더...”
모기만 한 아이의 중얼거림이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남자는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려는 걸 의식적으로 막았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파랗게 변한 작은 손톱을 보고 결심했다.
“그럼 우리 집에 갈래? 나도 여기 사는데.”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겨울을 닮은 회청색 눈동자와 봄볕을 머금은 풀잎 같은 초록 눈동자가 만났다.
“자, 가자. 바람이 점점 차가워진다.”
남자가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안은 빵 봉지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구수한 냄새를 풍겼다. 그에 아이는 홀린 것처럼 손을 뻗었고, 따뜻한 남자의 손이 그 얼음장 같은 작은 손을 잡았다.
둘은 나란히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다.
찰각. 끼이익. 남자의 어깨가 낡은 문을 밀어 열자 녹슨 경첩이 소리를 지르며 허리를 폈다. 남자는 복도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아이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뭐 해? 들어와.”
아이는 조심스레 안으로 발을 들였다. 성격 급한 문이 등 뒤에서 쾅 닫히는 소리에 놀라 순간 아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걸 자기 집 꼴이 엉망이어서라고 오해한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변명을 했다.
“막 이사 와서 좀 지저분해. 이해해 줘.”
그는 성큼성큼 부엌으로 걸어가며 덧붙였다.
“일단 저기 소파에 앉아. 네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있어.”
아이는 남자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남의 집에 처음 와봐서 그런가, 아니면 제 집에서도 불편하게 지내서 그런가, 편히 있으라는 지시는 따르기 어려웠다. 아이는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서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부엌과 식당, 거실이 하나로 이어져 있고, 욕실과 침실이 각각 하나씩 있는 남자의 집은 아이의 집과 구조가 완전히 같았지만, 그것만 빼고 나머지는 다 달랐다. 이사한 지 얼마 안 되었다더니 여긴 가구가 거의 없었다. 거실에는 2인용 소파와 그 앞에 놓인 작은 탁자가 전부였고, 식탁에도 의자가 하나밖에 없었다. 익숙함과 낯섦의 공존. 그나마 텅 비어서 어색함이 덜 한 건지, 아니면 그 때문에 지금 더 서먹한 건지, 기준이 될만한 경험이 없는 아이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남자는 쇼핑해 온 것들을 대충 식탁에 늘어놓고 얼른 방에 들어갔다. 그리고 두툼한 모포를 들고 나와 아이 몸에 둘둘 두르며 물었다.
“춥지? 난방 온도를 더 올리긴 했는데... 따뜻해질 동안 휴대용 히터 틀어줄까?”
모포에 싸여 러시아 인형처럼 얼굴만 나온 아이가 보일락 말락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미 그러기로 정한 남자는 다시 방에 들어가서 전기 히터를 꺼내 왔다. 이럴 거면 뭐 하러 물어본 걸까 싶으면서도 아이는 그의 일방적인 배려가 싫지 않았다.
처음 받아보는 친절.
모두 손가락질하며 아이를 피했다. 누구는 없는 사람 취급을, 누구는 더러운 오물을 보듯이, 누구는 우월감을 느낄 대상으로 그를 대했다.
태어난 것부터가, 아니 그 이전부터 잘못이었다.
아이는 막 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히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숨 쉬는 것도 멈춘 채, 마치 그 안에 뭔가를 던져 넣으려는 것처럼.
그때, 웬 컵 하나가 아이의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아이는 깜짝 놀라 몸을 뒤로 젖히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등이 푹신한 소파 등에 닿았고, 남자의 따스한 미소가 보였다. 히터 열기로 얼얼해진 코에 시원한 바람이 돌았다.
“코코아 마실래?”
잠깐의 망설임 뒤에 작은 손이 모포에서 나왔다. 아이의 떨리는 두 손이 남자가 내민 흰색 컵을 잡았다. 딱 봐도 싸구려인, 가볍고 번질번질한 컵.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부담스럽지 않은 무게감과 매끄러운 감촉이 좋았다.
“좀 뜨거울 수도 있어. 조심히 마셔.”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조심하랬지만 코코아는 아주 뜨거운 것 같진 않았다. 품질이 조악한 컵은 내용물의 온도를 표면에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으나, 그걸 들고 있는 아이는 전혀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다. 어린아이를 배려한 남자가 코코아의 온도를 적당히 맞춘 덕이었다.
아이는 가만히 컵 안의 코코아를 들여다보았다. 처음 마셔보는 코코아. 여기선 처음인 것 투성이지만, 이건 특히나 더 마음에 들었다. 거품 낀 갈색과 달콤한 향기의 조합은 너무 잘 어울려서, 원래 그 색은 그 향기가 난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온기와 콧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벅찬 감동. 빨리 마셔보고 싶어 컵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찰나, 서늘한 생각 하나가 모든 감각을 차단해 버렸다. 아이는 코코아로부터 고개를 돌려 부엌에서 뭘 만드느라 분주한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은 내가 누군지 알아도 이렇게 친절할까?’
아이는 다시 코코아를 내려다보았다. 그새 거품이 많이 죽어 있었다. 이처럼 조만간 남자의 친절도 사라지겠지. 내주었던 모포에도 께름칙한 것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리고 말 거야. 아이의 눈과 마음이 아까 계단에서 그랬던 것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멍하니 앉아 있는데 부엌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파이 좋아해?”
느닷없는 물음에 아이는 그저 눈만 깜빡였다. 파이? 좋아하냐고?
좋네 안 좋네, 아이가 취향에 따라 음식을 선택할 수 있었던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엄마가 손에 닿는 대로 던져대는 물건을 피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그는 줄곧 알아서 아무거나 해 먹었다. 집에 있는 거면 뭐든지, 먹을 수만 있으면 되었다.
그런데, 좋아하냐니? 아이는 이런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면 되는지 알지 못했다.
바로 그때, 위층에서 듣기 민망한 소리가 들려왔다. 방음이나 프라이버시 같은 건 설계에 들어가 있지도 않은 싸구려 아파트는 은밀한 비밀을 허용치 않았다. 그 소리가 어디서 들려오는지, 누가 내는 소리인지 잘 알고 있는 아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을 감았다. 귀도 막고 싶었지만 컵을 들고 있어서 관두었다. 컵을 놓고 싶지는 않았다.
남자의 발걸음 소리가 아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거 너희 엄마냐고, 아까 말했던 엄마의 일이란 게 저런 거냐고 묻겠지. 이어서 욕지거리가 들릴 거고, 손에 든 컵과 몸에 두른 모포의 온기가 사라질 거다. 마지막은 “당장 여기서 나가”.
‘역시 귀를 막을 걸 그랬나. 그래도 소용없으려나. 오히려 모른 척한다고 맞을지도 몰라.’
솔직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었다. 뭐든 이제 익숙하니까 괜찮았다. 다만 하나 후회되는 건...
‘코코아, 한 입이라도 마셔볼걸.’
발걸음 소리가 바로 앞에서 멈추고, 아이는 눈을 더 질끈 감았다. 우악스러운 손찌검이나 날카로운 비난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대신 푹신한 뭔가가 양쪽 귀에 닿았다. 눈을 감은 데다 긴장해서 촉각이 예민해진 아이는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런데 푹신한 그것에서 생전 처음 들어보는 소리가 났다. 먼저 덤덤한 낮은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가녀린 소리가 하나 둘 그 위에 겹쳐졌다. 전에 비슷한 걸 텔레비전에서 들었다. 분명 ‘음악’이라고 했다.
아이는 조심스레 눈을 떴다. 남자는 벌써 부엌에 가 있었다.
‘파이를 만들고 있는 걸까? 좋아하냐고 물었으니, 설마... 혹시?’
요리를 해주는 누군가의 뒷모습, 부드러운 음악, 아직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 달콤한 향기. 모든 게 처음이었고, 얼른 현실로 다가오지 않아서 꼭 거짓 같았다.
뒤통수가 따가웠는지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이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아이는 그 미소를 보고 생각했다. 무슨 속셈인지 알 수는 없어도, 설령 위선이어도 좋으니 조금 더 놀아나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귓가의 음악이 ‘그럼, 괜찮고 말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이는 조심스레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한 모금, 그리고 또 한 모금.
첫 곡이 끝나고 그다음 곡이 한창 클라이맥스에 이르렀을 때, 남자가 와서 해드폰을 벗기며 말했다.
“오래 기다렸지? 밥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