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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named> A&B(2)

by Outis

“......”


평생 요리다운 요리를 먹어본 적 없는 아이가 보기에도 파이의 비주얼은 충격적이었다. 동그란 파이의 가장자리를 빙 꿰뚫고 나와 있는 생선머리들은 마치 성당 지붕에 달린 가고일처럼 ‘날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험악한 표정의 생선과 눈이 마주친 아이는 음식에 손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남자는 그런 속사정도 모르고 아이에게 파이를 권했다.


“자, 사양 말고 많이 먹어.”


먹으라는 남자와 먹지 말라는 생선 사이에서 아이는 큰 딜레마에 빠졌다. 애가 먹기는커녕 파이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걸 보고 남자가 물었다.


“파이 생긴 게 무서워?”


아이는 우물쭈물 망설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원래 이렇게 생긴 거야?”


“응. 스타게이지 파이(Stargazy pie)라고 영국의 콘월에서 만들어진 음식이야. 생긴 건 이래도 맛은 훌륭해. 게다가 생선 기름은 두뇌에 좋다고? 특히 자라나는 어린이한테는 필수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파이를 크게 한 조각 잘라 아이의 접시 위에 올렸다. 미처 사양할 틈도 없이 당한 아이는 일단 억지 미소를 지으며 시간을 벌었다.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모면할 수 있으려나. 어색한 웃음을 지탱하고 있는 입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남자의 눈치를 살피며 아이는 가능한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조심스레 말했다.


“난 그냥 수프랑 빵이면 충분할 거 같아...”


“자기 접시 위의 음식은 다 먹는 거다. 그게 예의야.”


아니 누가 달랬나. 멋대로 담아 놓고. 그것도 이렇게나 많이. 억울한 마음에 아이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힐끔 쳐다보니 남자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피할 길은 없어 보였다. 그럼 먹을 수밖에. 아이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음식인데 별 일 있겠어.


양육에 관심이 없는 엄마를 둔 탓에 아이는 그동안 못 먹을 걸 먹었다가 탈이 난 적이 많이 있었다. 부엌에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아이는 그저 몸으로 직접 겪으며 배울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결연히 포크와 나이프를 잡았다. 그리고 비장하게 파이를 잘랐다. 비록 그가 잘라낸 조각은 큰 용기에 비해 매우 작았지만. 아이는 눈을 딱 감고 파이를 입에 넣었다. 그의 입이 기계적으로 우물거렸다.


“...?!”


그런데 웬걸. 예상외로 괜찮은 파이 맛에 아이의 눈이 번쩍 뜨였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작은 얼굴이 접시와 파이, 그리고 남자에게 향했다. 남자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말했다.


“거봐, 내가 뭐랬어. 맛있지? 생선 비린내만 잡으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요리란 말씀. 물론 내 요리실력이 뛰어난 것도 있지만.”


자랑스레 코웃음을 치는 남자의 콧대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정신없이 파이를 입에 넣느라 바빴다. 남자는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이의 배가 어느 정도 찼을 때 남자가 물었다.


“그런데 넌 이름이 뭐니?”


부지런히 움직이던 아이의 입과 손이 일순간 멈추었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졌다. 선뜻 대답을 못하는 아이에게 남자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뭐든 상관없어. 본명이 마음에 안 들면 별명도 괜찮고, 지어낸 이름도 괜찮아. 단지, 내가 너를 부를 수 있을 호칭이면 돼.”


아이는 쭈뼛거리며 우물우물 대답했다.


“아저씨가 좋을 대로 정해서 부르면 돼... 어차피 다들 그렇게 하니까...”


야, 이 호로새끼야, 빌어먹을 자식,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밥버러지, 등등. 아이에겐 다양한 호칭이 있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가슴이 꽉 막혀오는 것 같았다. 그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아이의 말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남자가 중얼거렸다.


“아저씨라니...”


“... 어?”


“지금 나보고 아저씨라고 한 거야?”


어라, 뭔가 포인트가 어긋난 거 같은데. 아이는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손가락을 꼽으며 뭔가를 세고 있었다.


“아직 스무 살 밖에 안 됐는데... 아, 아닌가. 스물셋이었나.”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아직은 아저씨라고 불릴 나이는 아니라고. 가만, 그러고 보니 넌 몇 살이야?”


아이는 눈을 껌뻑였다. 이리 튀었다 저리 튀었다, 대화의 흐름이 정신없는 탓도 있었지만, 그보단 자기가 몇 살인지 잘 몰라서였다. 회청색 눈동자가 빙그르르 굴렀다.


“여덟? 아니, 아홉..?”


“뭐야. 자기가 몇 살인지도 몰라?”


아저씨가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순간 울컥하고 아이의 목에 뭐가 올라왔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데 알 도리가 없잖은가. 생일이 뭔지, 그 생일이 축하받는 날이라는 것도 텔레비전을 보고 알았다. 물론 축하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아홉이라 치고, 학교는 안 다녀?”


“......”


우울한 회청색 눈이 밑으로 떨어졌다. 엄마 심부름으로 식료품이나 담배, 약을 살 때 빼고 아이는 어디 가본 적이 없었다. 학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별로 깊게 생각하고 물은 건 아니었는지, 남자는 다시 자기 호칭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홉 살이면 형은 좀 그런가? 그럼 삼촌? 음...”


그는 팔짱까지 끼고 한참을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벤. 벤이라고 불러.”


“벤...”


작은 두 입술이 조심스레 만났다 떨어졌다. 뭔가 편안한 울림이 여운처럼 콧등 위에 남았다. 아이는 그 이름이 남자에게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자 그럼, 너는 어떻게 불러줄까?”


“아저ㅆ... 아니 벤이 아무거나 정해. 어차피 부를 사람은 벤밖에 없으니까.”


“아무거나? 정말 괜찮겠어?”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었다. 진짜 이름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데다, 감정 쓰레기통이라 지금껏 버려지는 감정대로 불렸으니까. 어차피 그중 마음에 들었던 건 하나도 없었다.

뭐든 상관없으니 이름다운 이름, 정상적인 이름이 있었으면. 스스로를 생각하며 떠올릴 이름이 있었으면. 그럼 나를 싫어하는 주변과 ‘나’를 구분 지을 수 있을 텐데. 나를 두고 나만의 상상을, ‘꿈’이란 걸 꿔 볼 수도 있겠지.


“음, 그럼...”


남자의 생각이 길어질수록 긴장한 작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수많은 이름 후보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남자는 결국 처음 떠오른 이름으로 정했다.


“그래, 앨리스(Alice)로 하자. 어때?”


“... 어?”





아이는 텔레비전을 보다 소파에서 잠든 엄마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아직 켜져 있는 텔레비전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화면 속 풍경과 사람들, 색채와 음악. 아이는 눈을 빛내며 바깥세상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내어주는 정보들을 열심히 받아들였다.

오늘은 전에 봤던 것과 다른 옷차림을 한 여자들이 조금 덜 선명한 화면 속에서 즐거이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오, 맙소사. 앨리스!]


그날 아이는 앨리스가 이름이라는 것, 그리고 저 여자가 앨리스라는 것을 배웠다.





“앨리스?”


“응.”


“그거, 여자 이름, 아니야?”


혹시라도 틀렸을까 봐 아이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물었다. 그에 비해 벤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시원스러웠다.


“어. 당연히 여자 이름이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안 봤어?”


어리숙한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벤은 웃으며 말했다. ‘당연히’라는 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아이의 머릿속에 두 가지 할 말이 떠올랐다. 뭘 먼저 말해야 할까, 아이는 망설였다. 어딘가의 앨리스 같은 건 들어본 적도 없다는 것, 그리고...


“나 여자애 아닌데.”


“............ 뭐?”


벤은 머리를 세게 맞은 것처럼 멍하니 아이를 바라보았다. 귀로 들은 것을 머리가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아이는 눈치를 보며 다시 한번 말했다.


“나, 여자 아니라고...”


- 여자애였으면 좀 쓸만했을 텐데! 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새끼야!


혹시 벤도 엄마처럼 자기가 여자애이길 바랐을까. 포크를 쥔 아이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안 그래도 하얀 손이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크게 떠진 초록색 눈을 더 마주하기가 두려워서 아이는 고개를 떨구었다.

잠시 후, 아이의 정수리 위로 커다란 웃음이 폭발했다.


“아하하하하하!”


고개를 들어 보니 벤이 얼굴까지 붉히고서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어찌나 웃어대는지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가까스로 웃음이 잦아들자 벤은 아이에게 연신 사과를 했다.


“하... 아, 미안. 진짜 미안! 네가 너무 예쁘장하게 생겨서 난 또 여자애인 줄 알았지. 정말 미안하다.”


아이는 그런 벤을 멀뚱멀뚱 쳐다보는 것 말고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정적인 겉모습과 달리 아이의 내면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껏 그는 누구의 사과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장면들, 엄마와의 경험... 잘못을 빌면 엄마는 욕하면서 때렸는데, 이건 아닌 거 같고. 어쩐다.


“미안.”


그새를 못 참고 벤이 또 사과를 했다. 아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윽...”


속이 상했다. 생전 처음 사과를 받아 봤는데, 그것도 여러 번이나. 그것도, 벤 같은 사람한테. 그런데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다니!

갑자기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했다.


“왜, 왜 울어? 그렇게 속상했어? 미안해, 미안하다니까.”


아이는 꺽꺽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끄윽. 그게 아니야. 흐윽...”


“그럼 왜 그래? 어디 아파? 배?”


아이의 고개가 좌우로 세차게 흔들렸다.


“그럼 뭔데?”


“미안, 해서, 흡!”


“어? 네가 뭐가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면, 흡!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흡! 몰라아... 흐윽...”


벤은 아이가 한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일단 얼굴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아이에게 티슈 박스를 건넸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멍하니 벌어져 있던 벤의 입이 부드러운 미소를 그렸고, 따스한 목소리를 내보내었다.


“괜찮아.”


“크흥! 흑... 응?”


“‘괜찮아’라고 말하면 돼.”


동그랗게 떠진 회청색눈이 벤의 함박웃음을 담았다. 아이의 입이 몇 번 달싹이더니, 배운 말을 복습했다.


“...... 괜찮아.”


처음으로 사과받는 법을 배웠다.


딱딱하고 자기 말만 하는 텔레비전이 아니라, 따뜻한 눈을 하고 자기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에게.





벤은 다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럼 남자 이름으로 해야겠네. 흐음...”


한참의 고민 끝에 벤의 손가락이 딱 소리를 내었다.


“그렇지! 애쉬(Ash) 어때?”


“애쉬?”


“응. 애셔(Asher)를 줄여서 애쉬. 마침 네 눈 색깔도 회색이고.”


애쉬. 회색 재.

아무도 좋아하지 않고, 귀찮기만 한 데다, 가벼워서 잘 날리기까지. 아이는 자기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씁쓸함이 그의 가슴 한 구석에 자리했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애쉬, 남자가 그렇게 가냘파서야 쓰겠어? 자, 더 먹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애쉬의 접시 위에 파이 한 조각을 더 올렸다. 애쉬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평소 등에 붙어 있다시피 하던 배가 오랜만의 포식으로 이미 꽉 차 있는데, 저걸 또 어떻게 먹는담. ‘자기 접시에 있는 건 다 먹는 게 예의’라고 했던 벤의 말을 떠올리며 애쉬는 한숨을 쉬었다.


배운 걸 실행하는 건 참 어렵구나, 하고 생각하며 애쉬는 느릿느릿 파이를 향해 포크를 가져갔다.





저녁 식사를 마친 벤과 애쉬는 테이블을 함께 정리했다. 벤은 남은 음식을 정리하고, 애쉬는 빈 접시를 모아 싱크대로 가져갔다.

설거지를 하려고 손에 장갑을 끼다가 벤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애쉬에게 물었다.


“그런데 집에는 언제 들어갈 수 있어?”


애쉬는 행주로 테이블을 닦으며 말을 흐렸다.


“손님이 가고 나면...”


벤은 애쉬를 한번 돌아보고는 물을 틀었다. 쏴아. 시원스러운 물소리에 조금 과감해진 그는 다소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너 매번 이렇게 쫓겨나는 거야?”


“쫓겨난 거 아냐.”


애쉬가 다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쫓겨나는 게 아니라 내가 나온 거야. 집에 있어도 돼. 그냥 내가 밖에 나오고 싶어서, 그래서 나온 거야.”


주절주절 변명처럼 늘어놓았으나 거짓말은 아니었다. 손님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집안에 숨어 있어도 되었다. 지금까지 벽장이나 침대 밑에 숨어서 지냈다.

다만 오늘은 그러기 싫었을 뿐이었다.


벤은 수돗물을 끄고 다시 애쉬를 돌아보았다. 비뚤비뚤 잘린 머리카락, 비쩍 마른 몸, 늘어지고 군데군데 해진 옷.

그는 입을 꾹 다물고 물에 세제를 풀어 거품을 냈다. 더러운 접시가 물에 들어가면서 새하얀 거품에 탁한 색을 입혔다.


애쉬가 설거지 마무리를 자처하고 나서자, 벤은 방에서 가져온 의자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으러 방으로 들어왔다. 캄캄한 방 안에는 붙박이 옷장과 침대, 책상, 그리고 노트북 컴퓨터 한 대가 있었다.

책상 앞에 의자를 갖다 놓은 벤은 옷장을 돌아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 뒤 벤이 방에서 나왔다. 그는 타월로 접시를 닦고 있는 애쉬의 등에 대고 말했다.


“엄마가 일하실 땐 우리 집으로 와.”


애쉬의 어깨가 움찔했다. 흰머리가 섞인 갈색 뒤통수가 천천히 돌아갔다. 잔뜩 놀란 회청색 눈을 마주하자 벤의 가슴에 저릿한 아픔이 번져나갔다.

벤은 덧붙였다.


“언제든지 와. 괜찮으니까.”




<메인화면 출처: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8A%A4%ED%83%80%EA%B2%8C%EC%9D%B4%EC%A7%80%20%ED%8C%8C%EC%9D%B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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