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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named> A&B(3)

by Outis

“야, 손님 오실 거야.”


애쉬는 엄마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얼른 하던 부엌일을 마저 정리하고 집을 나섰다.

그토록 싫었던 저 말이 이제는 제일 기다려진다. 부디 엄마에게 더 자주, 더 많이 손님이 왔으면 좋겠다 생각하면서 애쉬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벤의 집 앞에 선 애쉬는 리드미컬하게 문을 두드렸다.

똑도독 똑도독 또도도도도도도독. 파헬벨의 캐논. 벤과 애쉬 둘만의 비밀 암호였다.

금방 문이 열리고, 벤이 반갑게 애쉬를 맞이했다.


“어서 와.”


애쉬가 오기 시작한 지 석 달. 거진 비어있던 거실과 부엌은 하나 둘 새로운 물건들로 채워졌다. 먼저 식탁에 의자가 하나 더 생겼고, 포크와 나이프, 접시, 그릇도 점점 늘어났다. 먼지만 쌓여 있던 찬장에는 달콤한 쿠키와 코코아에 넣어 먹을 마시멜로가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거실 한구석에는 책장이 놓였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과 애쉬의 교재가 빽빽이 꽂혔다. 이젠 익숙한 듯, 애쉬는 벤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책장으로 가 책 몇 권을 빼내었다. 그리고 편안히 소파에 앉아 책을 읽었다.

벤은 그런 애쉬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작은 냄비에 우유를 데웠다. 곧 달콤한 향이 부엌에서 거실로 퍼져나갔다.


“자, 코코아. 애쉬 거는 마시멜로 듬뿍.”


“와아, 고마워.”


애쉬는 읽고 있던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벤이 건네는 컵을 받았다. 벤이 그 옆에 앉으며 물었다.


“어때? 그 책 어렵지 않아?”


“음... 처음 보는 단어가 몇 개 있는데,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없어.”


“모르는 거 있으면 공책에 적어놔. 책 이름이랑 페이지 번호도 같이. 나중에,”


“나중에 맞는지 확인하기. 맞지?”


“하하, 그래.”


벤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애쉬를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지금 애쉬가 읽고 있는 건 4학년 과정에 맞춘 권장도서. 학교 문가에 간 적도 없는, 알파벳도 모르던 아이가 고작 석 달 만에 자기 또래 수준을 따라잡은 것이다.

수학에는 더욱 재능을 보여서, 숫자 읽기부터 시작했던 것이 지금은 함수를 배우고 있다.


천재.


진짜 하늘이 내린 재능은 이런 것일까. 벤은 어릴 적 일을 떠올리며 속으로 자조했다.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얻은 우생학의 과실. 선별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최적의 환경, 최고의 교육을 받은 자신들을 이 민들레 같은 아이가 문제없이 따라잡고 있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벤? 괜찮아?”


애쉬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씁쓸한 회상으로부터 벤을 건져내었다.


“응? 왜?”


“왠지 슬퍼 보여. 무슨 일 있어?”


“아... 아니. 아무것도 아냐.”


평생을 학대 속에서 자라온 탓인지 애쉬는 눈치가 빨랐다. 벤은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무슨 일 있는 거 같은데. 힘든 일 있으면 얘기해 줘. 나도 벤을 돕고 싶어.”


이렇게 어린데 저런 기특한 말을 하다니. 벤은 뭉클함을 느끼는 동시에 너무 빨리 철이 들어버린 애쉬가 안쓰러웠다. 애답지 않은 애는 슬프다. 제 나이에 누릴 것을 포기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벤은 애쉬의 머리를 콩 찧으며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리고 어린애 주제에 어른 일을 걱정하는 거 아냐.”


생각보다 힘이 너무 들어갔나. 애쉬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제야 좀 어린아이 같아 보이는 모습에 벤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애들은 그저 맛있는 거 먹고, 오늘은 뭐 하고 놀까, 그런 걱정만 하면 돼.”


가벼운 농담처럼 들리는 진심 어린 당부. 자기 입으로 말해놓고 벤은 깜짝 놀랐다. 설마 이런 말을 하게 될 날이 오게 될 줄, 그는 얼마 전까지 상상도 못 했었다.





수학 공부 시간. 애쉬는 자리를 식탁으로 옮겨 문제집을 풀었다. 그전에 대충 저녁 식사 준비를 마친 벤은 거실 소파에 앉아 애쉬가 푼 문제들을 채점했다. 그의 눈은 애쉬가 적은 풀이를 막힘 없이 읽어 내려갔다. 오늘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벤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수학은 한두 단계 위로 올려야 할 거 같네. 새 교재를 사야겠어.”


‘사야겠다’는 말을 듣고 애쉬는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총명하게 빛나던 회청색 눈에 근심의 그늘이 졌다.

왕성한 지식욕 탓에 애쉬는 항상 벤이 정해준 스케줄보다 앞서 나갔다. 지금 공부하고 있는 책도 진작에 마스터했다. 그러나 그는 벤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스케줄상 한 권이 다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새 책이 필요하다’는 말은 곧 ‘사달라’는 부탁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벤은 자신에게 과분할 정도로 많은 것을 해주었다. 그런 그에게 감사하면서도, 애쉬는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딱히 일하러 다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과연 돈이 충분히 있기는 한 걸까. 애쉬도 이젠 이 동네가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벤의 주머니 사정도 넉넉하지 않을 텐데, 자기 때문에 자꾸 이렇게 뭘 사도 되는 걸까. 그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닐까.


벤은 대체 왜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주는 걸까.


벤이 소파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애쉬의 눈이 몰래 그의 움직임을 좇았다. 조금 뒤 벤이 납작한 무언가를 들고 나왔다. 애쉬가 늘 궁금해하던 ‘그것’이었다.

벤은 다시 소파에 앉으며 무릎 위에 그 물건을 놓았다. 얇은 그것은 놀랍게도 절반으로 접은 종이처럼 펼칠 수 있었다. 타닥타닥. 이번에도 뭔가 두드려지는 소리가 났다. 이제 애쉬는 고개까지 쭉 빼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벤은 애쉬 앞에서는 거의 저 물건을 쓰지 않을뿐더러, 이렇게 꺼내와도 금방 다시 갖다 놓기 때문에 자세히 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벤이 저걸 두드리면 집에 꼭 뭔가 새로 생긴다’, 애쉬가 경험을 통해 얻은 명제이다. 이것이 참일 경우 저 물건은 분명 돈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돈. 생각만 해도 입이 바짝 마른다. 어린 애쉬가 너무 일찍 깨달아 버린 돈의 무서움이 그의 가슴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오케이. 주문 완료.”


“... 저기, 벤.”


“응?”


애쉬를 향해 벤이 고개를 들었다. 애쉬는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왜 그래? 뭐 잘 안 풀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거...”


“그거?... 아, 이거?”


벤은 애쉬가 조심스레 가리킨 것이 자기 노트북 컴퓨터란 걸 알아차렸다. 벤이 확인차 노트북을 살짝 들어 올려 보이자 애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왜?”


애쉬는 우물쭈물 한참을 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 그거 혹시 돈 만드는 기계야?”


“......... 어?”


“벤, 딱히 일하는 거 같지 않은데 자꾸 뭘 사니까... 혹시 안 좋은 일, 하는 거야..?”


아, 묻고 말았다! 애쉬의 작은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잔뜩 긴장한 입술이 꼭 마주 붙었다. 애쉬는 긴장하며 벤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벤은 멍하니 애쉬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헤 벌어진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 모습에 애쉬의 의심이 점점 확신으로 굳어져갔다.

애쉬는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솔직히 벤이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었다. 다만 그에게 미움을 샀을까 봐 두려웠다.


‘이번에야말로 진짜 쫓겨나겠지. 아니면 비밀을 들켰으니, 설마 나를..?’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벤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소파에 벌러덩 눕다가, 하마터면 노트북 컴퓨터를 떨어뜨릴 뻔했다. 벤은 얼른 윗몸을 일으켜 떨어지려는 노트북을 잡았다.


“아이쿠! 하하. 야... 애들 상상력은 정말 대단하구나.”


상상이라고? 그렇다면? 애쉬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초조한 마음으로 벤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도 네가 생각하는 거랑은 좀 많이 다를 거야.”


혹시 ‘안 좋은 일’을 하냐고? 벤은 보일락 말락 씁쓸하게 웃었다. 굳이 애가 알게 할 필요는 없다. 말로든 표정으로든. 벤은 일부러 환하게 웃어 보였다. 아무 의심도 사지 않도록.


“난 프로그래머야. 고객들이 일을 주면 나는 이걸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보내지. 일이 끝나면 그들이 내 은행 계좌에 돈을 넣어줘. 그럼 난 이걸로 계좌에 있는 돈을 쓰는 거야.”


애쉬는 가만히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전혀 알아듣지 못한 눈치였다. 너무 고전만 읽게 했나, 앞으로는 현대 문물에 대해서도 좀 책을 빌려와야겠구나, 하고 다짐하며 벤은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음... 요건 ‘컴퓨터’라고 하는 물건이야. 좀 더 빠르고 정확한 업무처리를 위해 인간의 일부 지적 능력을 모방해서 만든 기계지. ‘프로그램’은 컴퓨터가 특정 작업을 수행하도록 명령하는 거고, ‘프로그래머’는 사람들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야.”


애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을 보니 아직 머릿속에 완벽한 디테일까지는 그리지 못했어도 대충 윤곽은 잡은 모양이었다. 새로운 정보를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 저장하며 애쉬가 질문했다.


“그런데 그걸로 다른 사람들이랑 어떻게 연락을 해? 전화기가 달린 것도 아니고... 돈은 어디로 받아?”


“여기엔 ‘문’이 있거든. ‘복잡하게 얽힌 넓은 세상’으로 이어진 문.”


“문?”


아무리 봐도 널빤지와 납작한 상자 그 중간처럼 생겼는데. 문 같은 건 보이지도 않건만, 문이라니? 게다가 복잡하게 얽힌 넓은 세상? 애쉬가 고개를 갸웃하자 벤이 씩 웃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1950년대에 컴퓨터가 개발되면서부터 컴퓨터끼리 연결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어. 그렇잖아? 아무리 대단한 정보나 프로그램이 있어 봤자 하나의 컴퓨터에서만 악세스가 가능하면 크게 쓰이지 못하니까. 컴퓨터 한 대가 처리할 수 있는 작업에도 한계가 있고.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느냐에 따라 인간 문명의 발전 속도가 달라져 왔듯이, 컴퓨터끼리도 효율적으로 연결될 필요가 있었던 거지.”


“응. 무슨 말인지 알겠어.”


“좋아.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컴퓨터끼리의 연결도 군사적 목적과 학문적 목적 두 가지 측면에서 큰 발전을 이루게 돼. 영국이나 러시아, 미국 등의 선진국들은 군사 정보를 안전하게 보관할 방법을 고민했는데, 미국 국방부 산하 고등 연구국(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ARPA)에서 패킷 교환(Packet switching) 방식이라는... 이건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줄게. 일단 지금은 데이터 전달 방법 중 하나라고만 알아 둬.”


“응.”


“좋았어. 아까 말한 것처럼 ARPA가 패킷 교환 방식이 데이터를 전달하는데 더 효과적이란 걸 알아냈고, 그 결과 ‘아파넷(ARPANET)’이란 것이 만들어졌지. ARPA에 ‘그물망(Net)’이란 말이 붙은 거야. 이후 1989년 유럽 입자물리 연구소(CERN)의 공학자 팀 버너스리 경(Sir Tim Verners-Lee)이란 사람이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신속하게 교환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쓰이고 있는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 줄여서 ‘WWW’ 또는 ‘웹(Web)’의 탄생이야.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얽힌, 전 세계를 잇는 네트워크의 모습을 상상해 봐.”


“와... 전 세계... 그럼 이 컴퓨터도 다른 컴퓨터들이랑 이어져 있는 거야?”


“그래. 따라서 여기엔 더 넓은 세상으로 이어진 문이 있는 거지.”


벤이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는 노트북을 식탁 위, 애쉬 앞에 놓았다. 벤의 손가락 끝이 편평한 부분 위에서 빙글빙글 움직이는 대로 화면 속 화살표가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두 번 톡톡 두드리자 컴퓨터 화면에 뭔가가 펼쳐졌다. 인터넷 브라우저였다.


“애쉬, 뭐 찾아보고 싶은 거 있어? 알고 싶은 거나 보고 싶은 거.”


애쉬는 말없이 키보드를 바라보았다. 각 키 위에는 알파벳과 숫자, 단어와 약자, 기호가 빛나고 있었다. 전부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애쉬는 이걸로 글을 쓰는 거구나 하고 짐작했다.

작은 손가락이 키보드로 향했고, 조심조심 세 개의 키를 눌렀다. 탁. 탁... 탁. 그러자 검색창 위에 한 글자가 나타났다.


[ben]


‘b’는 대문자로 쓰고 싶었는데. 애쉬가 아쉬워하는 걸 알았는지 벤이 고쳐주었다. 백스페이스, 쉬프트 b. 이제야 ‘Ben’이라는 이름이 제대로 쓰인 걸 보고 애쉬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탁. 벤이 엔터키를 누르자 ‘Ben’과 관련된 수많은 검색 결과들이 순식간에 나타났다. 애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기에 벤이 스크롤 다운 하는 방법을 보여주자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크게 떠졌다.


한참 검색 결과를 읽어 내려가던 애쉬가 벤을 올려다보았다.


“벤.”


활짝 피어난 애쉬의 얼굴을 향해 벤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응?”


“이 너머에 넓은 세상이 있다면,”


그러나 곧 벤의 미소에 그늘이 드리웠다.


“거기엔 ‘내가 있어도 되는 곳’도 있을까?”


‘있어도 되는 곳’. 아직은 자력으로 얻을 수 없는, 보호자로부터 주어져야 했을, 그러나 가져본 적 없는 ‘보금자리’에 대한 갈망. 애쉬는 혹 가상 속에서라도 그걸 찾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걸까. 여느 아이들이 동화 속 멋진 성이나 환상의 나라를 꿈꾸는 것처럼.

이 아이는 ‘이 세상’에 대해 과연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 걸까. 푸른 바다 위를 날아가는 흰나비의 날개처럼 가냘프고 순진한 저 미소. 분명 잘 알지 못하겠지. 벤은 고민했다. 바다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수용적이지 않다고, 네가 꿈꾸는 배추밭은 아마 거기엔 없을 거라고 알려줘야 하나.


“... 애쉬.”


“응?”


어쩌면 내가...


“아니야.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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