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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named> A&B(4)

by Outis

주의: 이번 에피소드는 매우 불편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계신 분들은 특히 주의를 요합니다. 외전이라 읽지 않으셔도 전체 내용을 이해하시는 데는 큰 무리가 없을 테니,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본의 아니게 불편과 불쾌함을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응? 이게 뭐야?”


술안주로 먹을 시리얼을 가지러 부엌에 온 애쉬의 엄마는 시리얼 대신 오트밀이 있는 걸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야! 시리얼 어디 갔어!”


엄마의 앙칼진 목소리를 듣고 방에서 청소를 하고 있던 애쉬가 냉큼 뛰어나왔다. 엄마는 짜증 난 얼굴로 오트밀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애쉬는 목구멍이 꽉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시리얼 다 떨어져서... 대신 그걸 사 왔어요...”


“뭐? 이게 뭔데?”


“오트밀이요. 건강에 더 좋다고 해서...”


“... 뭐라고?”


엄마의 얼굴이 점점 더 험상궂게 변했다. 애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큰일 났다. 저건 폭발하기 일보직전인 표정이다.

빨리 엄마가 더 화를 내는 이유를 알아내야지, 안 그러면 정말 큰일이 벌어질 것이다. 시리얼이 아니어서? 엄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니까 그게 갑자기 화를 돋운 이유는 아닐 거다. 그럼 오트밀이어서? 엄마는 오트밀을 싫어하는 걸까? 그렇게 싫어하는 거면 즉시 알아보았을 거다. 이게 뭐냐고 자신에게 묻지도 않았겠지.


그렇다면 남은 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서’.


일단 가닥이 잡히자 애쉬의 머리가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다. 누가 시키지 않은 일을 했을 때 화가 나는 이유. 첫째, 건방지게 멋대로 행동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둘째, 내가 생각한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전자는 엄마의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빌 수밖에 없다. 그리고 후자는, 비록 결과물이 엄마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지만 그것 나름 나쁘지 않다는 걸 어필해야 한다.

보통 음식을 고를 때 뭘 고려할까. 맛, 영양 및 건강에 미치는 영향, 신선도, 보관 용이성, 그리고 가격 정도? 보아하니 건강에 좋다는 건 엄마에게 큰 의미를 주지 못한 듯하다. 맛은 아직 보지 않았으니 그걸로 설득하긴 힘들 거 같고, 오히려 마이너스 요인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 외에 엄마가 관심을 보일만한 것, 이 모든 실패를 무마시킬 수 있는 건 역시 하나뿐.


“비싸지 않아요. 제품 출시 이벤트로 무려 35%나 세일하고 있었어요. 무게당 가격이 시리얼보다 더 낮았고요.”


“... 무게당... 뭐가 낮아?”


“같은 양이면 이게 더 쌌다고요. 아, 걱정 마세요. 폐기 직전이라 세일한 건 아니었어요. 유통기한 제대로 확인하고 가져왔어요. 올해 말까지니까 신선도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진땀 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져만 갔고, 애쉬의 머릿속은 반대로 하얘지고 있었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너무 자신만만하게 떠들었나. 일단 빌기부터 할 걸 그랬나.

그는 알지 못했다.


“네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


“..!!”


“뭐? 건강에 더 좋아? 무게당 뭐? 네까짓 게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냐고!”


“아...”


벤과 보낸 시간, 그로 인해 바뀐 자신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에, 애쉬는 지금 자신이 엄마의 눈에 얼마나 생소하게 비칠 것인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학교에 보내지도 않았고, 따로 가르치지도 않은 자식이 갑자기 유식한 소리를 하면 부모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보통의 경우라면 스스로 깨친 게 대견해서 기뻐하리란 걸, 책을 통해 많은 상식과 지식을 습득한 애쉬는 이제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엄마는 다르다는 걸, 그는 글을 읽기 전부터 온몸에 새겨진 아픔으로 알았다.


엄마가 애쉬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녀의 부릅뜬 두 눈과 꽉 다문 이빨에 이미 영혼을 사로잡힌 듯, 애쉬는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버렸다. 악의에 찬 엄마의 손이 애쉬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애쉬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며 반사적으로 엄마의 손을 잡았다. 이에 더 화가 난 엄마는 그의 머리채를 잡은 손을 우악스럽게 흔들었다. 허수아비처럼 가벼운 몸이 맥없이 흔들렸고, 작은 두 발은 조금이라도 고통을 덜어보려고 동동거렸다.


“아, 아..! ”


“너 이 새끼, 요즘 계속 밖으로 나돌더니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아, 아무것도... 아! 안 해요...”


“아무것도? 그걸 믿으라고?”


엄마가 애쉬를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쾅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진 애쉬의 몸이 불판 위 새우처럼 굽었다.

애쉬는 소리 없는 비명을 삼키고는 포식자를 만난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절대 벤에 대해 말해서는 안 된다고, 그에게 더 이상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속으로 되뇌면서.

그 모습을 보고 엄마는 눈을 치켜떴다.


“이 새끼 봐라?”


단 한 번도 자신을 거스른 적이 없던 아들.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고, 울며 빌던 아들. 처량하고 무력한 모습으로 더없는 자괴감과 쾌감을 선사하던 아들. 그런 아들이 반항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서 원래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눈이 돌아간 엄마는 아들을 마구잡이로 때렸다. 얼굴, 몸 가리지 않고 주먹으로도 치고, 발로도 찼다. 폭력의 정도가 심해질수록 그녀의 숨도 찼다.


애쉬는 애쉬 나름대로 이를 앙다물고 버텼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 엄마도 지치겠지, 그때까지만 참으면 돼, 참아야 해, 수없이 다짐이 이어졌다. 그러나 엄마의 집요한 폭행은 끝이 없었고, 애쉬의 결심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 벤에 대한 의리를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이러다 죽겠어. 지금이라도 엄마한테 사실을 말해...


‘안 돼!’


애쉬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찢어진 입술에 빨간 피가 몽글몽글 맺혔다.


슬슬 정신이 몽롱해지는 찰나, 엄마의 폭행이 멈추었다. 그러나 안도감도 잠시, 피냄새만큼이나 비릿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 그래, 내가 요새 너무 상냥했지? 따라와.”


엄마가 애쉬의 한쪽 발목을 붙잡고 욕실로 끌고 갔다. 이렇다 할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애쉬는 엄마가 끄는 대로 질질 끌려갔다. 욕실에 오자 엄마는 욕조에 물을 받았다. 그녀는 애쉬의 목 뒷덜미를 잡고 몸을 일으켜 그가 물이 차오르는 장면을 보게 했다. 높아지는 수위만큼 애쉬의 공포도 커졌다. 엄마가 씩 웃으며 말했다.


“내가 뭘 하려고 물을 받을까? 목욕? 으음~ 아니지.”


물고문. 이미 수차례 겪은 바 있는 애쉬는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욕조에 꽤 물이 차자 그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금방이라도 엄마가 물속에 머리를 집어넣을 것만 같아서였다.


“마지막 기회야. 너 요새 어디서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애쉬는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출렁이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온몸이 덜덜 떨려왔다. 목이 딱딱하게 굳은 것만 같았다. 그의 입이 달싹이자 엄마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하지만 애쉬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아들의 굳은 의지를 보고 엄마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지웠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알았어.”


엄마가 애쉬의 머리를 아래로 밀었다.

그때였다.


쾅쾅! 쾅쾅쾅! 밖에서 누가 애쉬 집 대문을 마구 두드렸다. 난데없는 소란에 엄마가 인상을 팍 쓰며 소리쳤다.


“누구야!”


그러나 문 밖에 선 사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문만 두드렸다.

쾅쾅쾅쾅!


“아, 시끄럿!”


엄마는 애쉬를 바닥에 밀쳐두고 문을 향해 뛰어갔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잠금쇠를 푼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문이 벌컥 열렸다. 밖에는 갈색 머리카락과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장신의 미청년이 침통한 표정을 하고 서있었다.


“뭐야..? 당신, 누구야?”


처음 본 남자의 등장에 애쉬의 엄마는 잠시 주춤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안쪽으로 밀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물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이 멈춘 곳에, 욕실 바닥에 애쉬가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당신 뭐야! 왜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 주거... 뭐시기로 신고할 거야!”


남자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주거침입죄요? 그럼 당신은 아동학대죄로 체포될 겁니다. 집주인이 문을 열어줘서 들어온 저와 애를 폭행한 당신, 둘 중 누가 더 큰 벌을 받게 될까요?”


남자가 조심스레 애쉬를 안아 올렸다. 이렇게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처럼 유유히 지나가는 그에게 애쉬의 엄마가 소리쳤다.


“당신이구나? 애한테 쓸데없는 걸 가르친 게. 왜, 데려가서 키우려고? 얼마든지 환영이야. 그런 밥버러지 데려가버리라고!”


애쉬가 몽롱한 눈으로 남자, 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애쉬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복잡한 그의 표정 속에서 애쉬는 괴로움을 읽어내었다.

벤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차분히 말했다.


“많이 흥분하신 거 같네요. 진정하실 때까지 애는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그러고는 애쉬 엄마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애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의 등 뒤에서 욕지거리와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애쉬는 벤의 셔츠를 움켜쥐고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벤의 가슴께가 축축이 젖어들었다.





자기 집으로 애쉬를 데리고 온 벤은 최대한 조심해서 아이를 소파에 눕혔다.

애쉬는 소파에 내려와서도 벤의 셔츠를 놓지 않았다. 그런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 벤은 미소를 지으며 애쉬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 애쉬의 상태를 살폈다. 군데군데 뜯기고 엉켜 붙은 머리카락, 빨갛게 부어오른 얼굴, 붉게 갈라진 입술. 여기저기 맞은 흔적과 손톱자국이 남아있는 여린 몸.


벤은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 사이로 신음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 미안해.”


왜 벤이 사과를 하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애쉬는 배운 대로 대답했다.


“괜찮아.”


사과를 받으면 이렇게 하라고 했으니까.


벤이 우는 건 싫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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