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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named> A&B(6)

by Outis

“아, 진짜 맛있었다.”


“잘 먹었습니다.”


“벌써? 아직 디저트는 시작도 안 했는데?”


미용실 바로 위층에 위치한 치포의 집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추수감사절.

겨우 좀 접시가 비워졌다 싶으면 음식이 한가득 채워진 또 다른 접시가 나오기를 몇 번, 벤과 애쉬는 디저트라는 말만 들어도 거북한 느낌이 들 정도로 배가 불렀다. 둘은 재빨리 눈치를 주고받으며 서로에게 총대를 미루었고, 결국 애쉬가 총대를 메었다.


“디저트...는 이따가 먹으면 어때요? 배가 조금 꺼진 다음에 먹어야 온전히 맛에 집중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아줌마 디저트는 세계 제일인 걸요. 제대로 음미하고 싶어요.”


치포는 살짝 실망했지만, 말도 참 예쁘게 하는 애쉬가 기특해서 내색하지 않았다.


“그래, 배탈이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디저트는 나중에 먹자.”


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동안 우리 게임이라도 할까? 체스 어때?”


체스? 어쩜 이리 눈치도 없고 자기중심적일까. 치포는 아까 상한 마음까지 더해서 잔뜩 얼굴을 구겼다.


“당신이랑 애쉬를 상대로? 난 사양이야. 무슨 추수감사절 같은 날에 머리 싸매고 괴로워할 일 있냐고. 게다가 체스는 한 번에 둘 밖에 못하잖아. 명절에는 다 같이 할 수 있는 걸로 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뱀과 사다리(Snakes and ladders;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숫자만큼 말을 움직이는 게임. 말이 사다리를 만나면 사다리 길이만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반대로 뱀을 만나면 꼬리가 있는 곳까지 미끄러지게 된다.)’ 어때?”


뱀과 사다리. 그야말로 운에만 의존하는 게임. 이번에는 행운의 여신과 척을 진 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진짜 운빨이잖아. 그런 건 금세 질린다고.”


“설마 체스보다 더 재미없을까.”


“모르는 소리! 체스가 얼마나 재미있는데. 이번 기회에 내가 잘 가르쳐 줄게.”


“이봐요 아저씨, 저번에도 똑같은 소리 하셨거든요? 그래놓고 인정사정없이 깔아뭉갰잖아요. 그때 그쪽 엄청 기뻐했던 거 기억해요?”


애쉬는 핑퐁 경기 구경하듯이 벤과 치포를 번갈아 보았다. 팽팽히 이어지는 신경전. 이러다간 끝이 없겠다 싶어 할 수 없이 그가 나섰다.


“저기, 그럼 ‘카탄의 개척자(The Settlers of Catan;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숫자에 해당하는 자원을 얻으며 마을을 확장시키는 게임. 플레이어가 직접 보드를 짜고 첫 정착지의 위치를 고르는데, 이때 게임의 룰을 염두에 두고 어떻게 하면 제일 효율적으로 마을을 키워나갈 수 있을지 잘 생각해야 한다.)’는 어때요? 적당히 작전도 필요하고 운도 따라야 하는 게임이니까 괜찮을 거 같은데...”


벤과 치포는 말다툼을 멈추고 애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카탄 정도면 할만하지.”


“응. 처음에 작전을 잘 짜면 어느 정도의 불운이야 커버 가능하니까, 나도 좋아.”


“하! 당신의 작전 따위 내 주사위로 뭉개어 주겠어.”


“어딜! 보드는 내가 짜야지~”


벤은 얼른 일어나 TV 장에서 상자를 꺼내어 보드를 짜기 시작했다.


“어어! 또 이상하게 짜려고!”


다급히 달려가는 치포와 온몸으로 보드를 사수하고 있는 벤을 바라보며 애쉬는 빙그레 웃었다.


“애쉬, 뭐 해?”


“얼른 와서 주사위 던져.”


“네, 가요.”


이후 두어 시간 넘게 치포의 집에서는 탄성과 웃음소리만 가득했다.





게임, 디저트, 그리고 또 게임.

어느덧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 소파 겸용 침대에서 잠든 애쉬에게 벤은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는 조금 살이 오른 아이의 하얀 볼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이제부턴 어른들의 시간. 냉장고 문을 열면서 치포가 물었다.


“맥주 한잔할래?”


“좋지.”


치익. 딱! 청량한 소리를 내며 맥주캔이 입을 열자 하얀 김이 곡선을 그리며 떠올랐다.


“건배.”


“건배.”


두 사람은 가볍게 서로의 캔을 부딪히고는 각자의 방식으로 맥주를 음미했다. 치포는 맥주캔을 살살 돌리며 회상에 젖은 눈빛을 하고 중얼거렸다.


“벌써 2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자기가 이 동네에 온 지.”


“... 그러네.”


“처음에는 금방 떠날 것처럼 굴더니.”


“훗, 그랬나?”


치포는 맥주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생각에 잠겼다. 맥주가 쓴 탓인가, 그녀의 미소도 씁쓸해졌다.


“...... 여전히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는 거지?”


“.........”


벤은 입 안에서 천천히 혀를 굴렸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이 며칠째인지부터 세었다. 이곳에 머물고 있는 기간이 점점 길어질수록 불안감도 커져만 갔다. 지금 잡혀서는 안 된다고, 어서 떠나야 한다고 그의 본능이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럼에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눈을 감고 귀를 막았던 건...


“애쉬 때문이야?”


“.........”


“자기, 내가 한 말 기억하지? 애를 위해서 뭐가 최선일지 생각해 보라고 했던 말.”


“... 응.”


한시도 잊은 적 없었다. 생각을 멈춘 적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애쉬를 많이 아끼는 거 알아. 그동안 최선을 다해서 보호하고 키워왔단 것도. 하지만... 끝까지 책임질 수 없으면 그만 여기서 끝내는 게 좋아. 안 그러면 결국 애한테 큰 상처를 주고 말 거야.”


“.........”


벤은 거실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주사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고 있다. 행운의 여신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그래도 이것만큼은 제발 어떻게 안 되겠냐고, 부디 조금만 더 유예기간을 달라고, 그는 행운의 여신의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빌고 싶었다.


“너무 늦기 전에 더 나은 환경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보내줘야 해. 애가 크면 클수록 그것도 더 힘들어져.”


“... 역시 신고하란 거야? 그 여자, 내가 한마디 하고 나서는 더 이상 때리지 않는 거 같던데.”


“... 자기, 뭔 짓 했구나?”


치포가 정색을 하며 물었다. 벤은 맥주를 마시는 척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말해봐. 협박했어?”


“협박은 아니고... 아니, 협박인가?”


“뭐라고 했는데?”


“당신이랑 애쉬가 처음 만난 날, 이제 1년 반 넘었나? 그다음 날 얘기하려고 찾아갔더니 날 납치범으로 신고하겠다고 난리를 피우더라고. 그래서 ‘애 출생신고도 안 한 거 난 다 안다’고 해줬지. 신고해 봤자 애쉬가 당신 자식이란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애만 뺏길 거라고. 그리고 당신은 아동학대 죄로 감옥에 갈 거라고.”


벤은 마치 평범한 일상 얘기하듯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러나 듣는 치포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안 그래도 큰 치포의 눈이 더 커져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출생신고도 안 했다고?”


“어, 찾아보니 그렇더라고.”


“찾아보다니... 아니 그보다, 친자식은 맞아? 어디서 납치해 온 건 아니고?”


“글쎄. 아마 친자식은 맞을 거 같은데.”


“이미 조사 다 끝냈구나?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얘기가 길어질 걸 직감한 벤은 한숨을 길게 내신 후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 엄마 이름은 바이올렛 클라크(Violet Clark), 나이는 올해로 28살. 고등학교 재학 중 16살에 애쉬를 임신했어.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가 무서워 집에는 임신했다고 말도 못 하다가, 다니는 학교 선생인 얼 브래들리(Earl Bradley)에게 털어놓았지. 애를 지우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 도와달라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브래들리 선생은 같은 가톨릭 신자인 그의 아내까지 동원해서 바이올렛을 설득했고,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이었던 부부는 태어날 바이올렛의 아이를 입양하기로 했어. 여기까지는 더할 나위 없는 미담이지.”


“그런데? 어쩌다가 일이 틀어진 거야?”


“바이올렛과 뱃속의 아이의 안위를 위해 그녀를 집에 들인 브래들리 부인은 금방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눈치챘어. 남편과 바이올렛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거야. 알고 보니 바이올렛을 임신시킨 건 다름 아닌 남편, 브래들리 선생이었지.”


“...... 망할.”


“책임지지 않으면 당신이 애 아빠인 걸 떠벌리고 다니겠다고 바이올렛이 협박하자, 아내를 속이면서까지 애를 들인 거였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브래들리 부인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브래들리 선생은 다시는 자기 앞에 나타나지 않을 조건으로 바이올렛에게 거액의 위자료와 낙태 비용을 건네었어. 그 선생, 어디 부유한 집안의 골칫덩이 아들이었다나? 그 집에서 발 벗고 나선 거지.”


“그래서?”


“그런 게 얼마나 법적으로 효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액수에 만족한 바이올렛은 약속대로 고향을 떠났어.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이는 지우지 않고 혼자 이 동네로 와 애를 낳은 거야.”


치포가 지그시 눈을 감고 손으로 십자가를 그렸다.


“오, 주여. 애를 지우지 않은 건 정말 잘한 일인데, 왜 애를 데리고 살면서 괴롭히는 건데? 어디 시설에라도 보내면 되잖아?”


“글쎄.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지만, 아마 브래들리를 증오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 아들인 애쉬를 괴롭히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거지. 애쉬가 자기한테 맞고 비는 모습을 보면서 말이야.”


“... 토할 거 같아.”


“맞아. 역겨운 일이지.”


“그럼 그 브래들리란 사람이 애쉬 친부란 거지? 그 사람은 지금 어디서 뭐 하는데?”


애를 친부에게 보내면 어떻겠냐는 뜻. 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쪽도 인간 말종이야. 이혼하고 학교에서 해고당한 후에도 정신을 못 차렸지. 오히려 본성을 제대로 드러내서 아동 포르노에 빠지더니, 결국 비디오 제작까지 하다가 걸렸어. 지금 감옥살이 중인데, 가족들도 포기했나 봐. 조만간 같은 재소자들 손에 죽지 않을까.”


완전히 입맛을 잃은 치포는 맥주캔을 탁자에 내려놓고 두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그리고 잠들어 있는 애쉬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런 인간들한테서 어떻게 저런 애가 태어난 걸까?”


벤은 말없이 맥주를 마셨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생각이 정리됐는지 치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 엄마한테 그런 사정이 있다면, 그래서 애한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거라면, 더더욱 애쉬를 그 여자한테서 떼어 놓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 자제하고 있는 것도 벤이 있기 때문이잖아. 자기가 떠나고 나면 그간 참던 것까지 터뜨려서 애쉬가 더 괴로워질지도 몰라.”


“... 그럴지도.”


“...... 하지만 아직 그러고 싶지 않은 거구나?”


보일락 말락 고개를 끄덕이는 벤에게 치포가 타이르듯이 말했다.


“공부도 컴퓨터도 이제 많이 가르쳤잖아. 조금만 더 가르치면 될 거 같다고 저번에 그랬잖아. 더 이상 붙잡을 이유도 없는데 계속 붙잡고 있는 건 애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야. 그저 집착일 뿐이지.”


맞는 말이었다. 이제 어느 정도 제 몫을 할 만큼은 가르쳐 놓았고, 그 이상은 스스로 깨치고도 남을 아이다. 더 이상 자신이 애쉬 곁에 있을 이유는 없다. 오히려 빨리 헤어지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인지도 몰랐다.


벤은 바닥에 놓인 한 보드게임 상자를 바라보았다. 상자 뚜껑에는 아빠와 엄마, 아이들이 밝게 웃으며 게임을 하고 있는 그림이 있었다.

그는 아까 셋이서 즐겁게 식사를 하고 게임을 하던 기억을, 둘의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그게 너무 소중해서, 그 기억들만 따로 어딘가에 고이고이 담아 두고 싶었다. 자기만 열어볼 수 있는 상자에. 그리고 그 뚜껑에 쓰일 이름은...


“치포.”


“응?”


치포를 바라보는 벤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혹시 나무 잘 패?”


“...... 뭐?”


치포는 멍하니 벤을 마주 보았다. 뜬금없는 헛소리에 숨어 있는 진짜 의도를 파악한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설마 그거, 셋이서 어디 멀리 도망가 살자는 소리야?”


“응.”


도저히 믿을 수는 무언가를 본 것처럼 치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무슨, 그런 말을 그렇게 하는 사람이 어딨어! 장난도 아니고.”


“왜? 난 나름 진지한데.”


“크흠! 그럼 나도 진지하게. 그거 일종의 프러포즈인 거 알아?”


“...... 아, 그런가?”


“뭐가 허전하네?”


치포가 얼굴 높이까지 손을 들더니 장난스럽게 웃으며 까딱까딱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그걸 본 벤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부드러운 눈으로 치포의 얼굴을 응시하며 그녀의 손을 자기 입술 쪽으로 가져갔다. 순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치포는 장난을 멈추지 않았다.


“마릴린 먼로가 그랬어. ‘A kiss on the hand may be quite continental, but 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손등에 하는 키스가 근사해 보일지는 몰라도, 다이아몬드야말로 여자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내 키스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가치 있어.”


“무슨 자신감이야?”


벤은 살며시 그녀의 손등에 키스한 다음, 몽롱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살짝 처진 눈매와 나른한 녹색 눈동자, 손등에 닿는 뜨거운 입김이 치포의 마음을 흔들었다.


“잘 생기고, 연하에, 비밀이 많은 위험한 남자. 딱 당신 취향인 거 알아.”


“이봐요, 위험한 남자. 어디서 무슨 일을 저질렀길래 그렇게 도망을 다녀요? 그 정도는 알려주고 프러포즈를 해야 하지 않아?”


벤은 다시 입을 치포의 손에 갖다 대었다. 키스가 아니라 입을 가리기 위함이었다. 그는 곁눈질로 거실 벽에 걸려있는 나무 십자가를 노려보았다. 거슬렸다.


‘그래, 당신도 내 편이 아니지. 어차피 당신에게 할 고해성사는 없어.’


“별 거 아냐. 알려고 하면 다쳐.”


벤이 농담처럼 얼버무리며 씩 웃자, 치포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꼬는 거지 누굴 탓하겠어.”


“그럼 허락하는 거야?”


“어딜! 키스 한 번으로 남의 인생 망치려고.”


“그럼, 키스 한 번만으로 끝내지 않으면..?”


치포가 능글맞게 웃으며 다가오는 벤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냈다.


“아저씨, 정신 차려요. 여기 애가 있거든요?”


“자고 있잖아.”


“깨면 어쩌려고 그래? 절대 안 돼.”


벤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자리로 돌아갔다. 못내 아쉬운 듯 맥주 캔만 만지작 거리던 그가 갑자기 쿡쿡 웃기 시작했다.


“근데, 방금 우리 꼭 부부 같지 않았어?”


“이 양반이 취했나 보네. 맥주나 마셔.”


“... 취했냐면서 술은 왜 마시래.”


끝내 농담 속에 숨기고 만 진심은 공기 속으로 사라지는 기포처럼 찾을 길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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