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쉬의 진료가 끝나고 나오는 길. 벤이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다행이다.”
3시간 전. 기본적인 바이탈 사인(vital signs; 활력징후. 혈압, 맥박, 호흡, 체온을 포함) 체크와 상처 소독 등 할 수 있는 처치를 끝내고서, 벤은 괜찮다며 마다하는 애쉬를 둘러업고 한의원을 찾았다. 응급상황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겉으로는 알 수 없는 내상이 있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한의원’은 사실 대만계 이민자가 운영하는 한약방으로, 정식으로 허가받은 의료 시설이 아니라 알음알음 찾아온 손님들을 몰래 치료해 주는 곳이었다. 이른바 불법 진료소인데, 보호자도 아닌 벤이 의료보험이 있을 리 만무한 애쉬를 치료받게 하려면 그런 곳 밖엔 없었다.
대대로 의사 집안 출신인 한약방 주인은 4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뛰어난 실력과 많은 경험을 갖추고 있었으며, 한의학뿐만 아니라 양의학, 약학에 대한 지식도 두루 겸비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에 눌러앉은 그는 여기서 정식 한의사 면허를 딸 형편이 안되어 슬럼가 뒷골목에서 약과 생필품을 팔며 아까운 실력을 썩히고 있었다. 그러다가 비싼 병원비를 내지 못해 병을 키우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 둘 치료해 주었고, ‘웬 작은 동양인이 바늘 하나로 병을 고치더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찾는 손님이 늘어 언제부턴가 지하 창고에 진료소를 차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침이나 뜸같이 생소한 기구와 냄새나는 한약만 보고 의심하던 사람들도 지금은 그를 ‘우 선생’이라 부르며 따랐다. 본래 나이보다 더 늙어 보이는 타고난 노안도 신뢰감을 높이는데 한몫했다.
“놀랍게도 어디 부러진 데는 없다. 타박상 관리 잘하고, 부종 가라앉히는 약을 줄 테니 잘 달여 먹여라”라는 한의사의 말을 듣고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벤은 약이 든 봉투를 앞뒤로 흔들며 경쾌하게 걸어갔다.
그와 달리 애쉬의 안색은 어쩐지 치료를 받기 전보다 훨씬 더 어두워져 있었다. 생전 처음 맞아본 침의 기억이 너무도 선명히 뇌리에 남은 탓이었다.
“아까 그 바늘... 너무 무서웠어.”
“하핫. 그래도 생각만큼 아프진 않았지?”
“.........”
처음 맞아본 침은 하필 길기도 엄청 긴 장침이었다. 저걸 사람 몸에 찌른다고? 얼마나 깊이? 잔뜩 겁을 먹고 긴장한 애쉬에게 한의사는 말했다. “안 아파”. 절대 믿을 수 없던 그 말은 과연 거짓말이었다.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장침을 잊어보려 애쉬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러던 중 그는 주변 풍경이 생소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가는 길은 아까 왔던 길과 달랐다.
“그런데 벤, 우리 지금 어디 가? 집으로 가는 방향이 아닌 거 같은데.”
늘 가던 생필품 가게와 엄마가 사 오라는 약을 파는 골목 말고 달리 가본 곳이 없는 애쉬에게 지금 이곳은 완전히 미지의 세상이었다. 모르는 장소가 주는 두려움, 그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벤은 축축이 젖어드는 애쉬의 작은 손을 꼭 쥐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너 말이야, 지금까지 내가 엄~청 맘에 안 드는 걸 꾹~ 참고 견뎠거든?”
애쉬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마음에 안 든다? 내가? 그럼 지금껏 베푼 호의도 싫은데 억지로 해준 거야? 애쉬는 벤과 마주 잡은 손에서 슬쩍 힘을 풀었다.
그러나 이런 걱정은 곧 이어진 벤의 한마디에 봄볕 아래 눈처럼 녹아내렸다.
“네 헤어스타일 말이야.”
“... 어?”
“다행히 머리에 상처는 없다니까, 이참에 제대로 한번 잘라 보자.”
벤은 애쉬를 데리고 작은 미용실로 갔다. 문에 달린 방울이 딸랑, 경쾌한 소리를 내며 둘의 입장을 고했다. 먼저 온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젊은 미용사가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그녀는 반가운 목소리로 벤에게 인사를 했다.
“어머, 벤! 웬일이야? 오늘은 혼자가 아니네?”
찰지게 껌을 씹는 미용사의 입이 옆으로 활짝 벌어졌고, 하얗고 고른 이가 드러났다. 가무잡잡한 피부의 미용사는 미인은 아니지만 도톰한 입술과 입술 바로 위에 있는 점, 그리고 밝은 웃음이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사자 갈기 같은 풍성한 곱슬머리는 그녀의 마른 몸과 대비되어 눈길을 끌었고, 그녀가 허리를 젖히며 웃을 때마다 탄력 있게 흔들렸다.
미용사가 대기자들을 위한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잠시만 앉아서 기다려. 금방 끝나.”
벤과 애쉬는 나란히 의자에 앉아 그녀가 머리 자르는 모습을 구경했다. 이는 특히 미용실에 처음 온 애쉬에게 매우 흥미로운 볼거리였다. 껌 씹으랴, 손님한테 말 걸랴, 손으로는 가위질을 하랴. 어떻게 저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할까. 애쉬는 입을 헤 벌리고서 분주한 미용사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시원시원한 미용사의 목소리와 사각사각 가위질 소리는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감사합니다. 또 와요~”
문밖까지 나가서 손님을 배웅한 미용사가 벤과 애쉬에게 다가왔다.
“어디 보자. 벤은 아직 아닌 거 같고, 역시 이 꼬마신사분인가?”
쭈뼛대는 애쉬 대신 벤이 대답했다.
“응. 애쉬라고 해.”
“애쉬! 멋진 이름이잖아! 안녕? 난 치포(Chipo)라고 해.”
애쉬는 얼굴을 붉히며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에 대한 칭찬, 처음 들어 보았다. 가슴이 간질거렸다. 작은 나비 한 마리가 팔랑팔랑 날갯짓으로 간지럽히는 것처럼.
“일단 머리부터 감자. 이쪽으로 와.”
치포는 자기 얼굴을 못 보게 애를 앞에 세우고서 몰래 벤을 돌아보았다. 눈치 빠른 그녀는 처음 아이의 몰골을 본 순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했었다. 그래서 내색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더 밝게 웃었다. 벤을 바라보는 치포의 검은 눈동자 속에 안쓰러움과 걱정, 슬픔이 먹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녀의 암울한 추측에 대한 긍정이자 배려에 대한 감사 표시로 벤은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자, 여기 앉아서 머리를 뒤로... 그렇지! 잘하네. 이제 물 틀게.”
처음 받아보는 서비스가 아직 어색하기만 애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쏴아, 물소리가 들리자 오늘 겪은 일로 인한 트라우마, 물에 대한 공포심이 되살아났다. 물이 머리에 닿은 순간, 애쉬는 옷자락을 꽉 쥐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나 이내 긴장은 머리에 묻은 먼지, 때와 함께 사르르 씻겨 내려갔다. 따뜻한 물의 온도와 부드러운 샴푸 거품, 그리고 뭣보다 조심조심 정성스레 만지는 치포의 손가락 덕분이었다. 처음으로 남이 머리를 감겨 주는 즐거움을 알게 된 애쉬는 이대로 영원히 머리만 감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머리 감기는 아쉽게도 금방 끝이 났다.
“다 됐다. 내려와서 저쪽 거울 앞에 앉자.”
이번엔 본격적으로 머리카락을 자를 차례였다. 처음엔 가위 소리가 날 때마다 어깨를 움찔거리던 애쉬는 차츰 안정을 찾아갔다. 하얀 가운 위로 떨어지는 머리카락,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거울 속 자신, 처음 맞아본 헤어드라이어 바람. 어느덧 모든 것이 신기하고 즐거웠다.
“어우, 세상에! 원래도 잘생겼지만 이젠 눈이 다 부실 정도인걸! 부분 부분 하얀 것도 꼭 염색한 것처럼 멋있는데? 요새 일부러 탈색도 하는데, 완전 럭키다~”
어린 나이에 벌써 제법 많이 세어버린 머리. 치포는 혹 아이가 신경 쓰지 않을까 염려하며 일부러 호들갑을 떨었다. 멀리서 잠자코 지켜보던 벤도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했다.
“야, 인물이 훨씬 사는데?"
“원본이 워낙 좋은 것도 있지만, 내 실력이 뛰어난 것도 잊지 말라고?”
“하하, 맞아. 치포는 이 동네 최고의 미용사야. 아참 애쉬, 미안한데 저기 봉투 좀 챙겨줄래?”
돈이 오가는 걸 보면 애쉬가 괜히 신경 쓰겠다 싶어 벤은 모른 척 애쉬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그리고 애쉬가 안 보는 사이에 치포에게 얼른 돈을 쥐여주었다.
“다음에 또 와~”
치포는 아까처럼 문밖까지 두 사람을 배웅했다. 벤이 돌아서려는 찰나, 그녀가 벤의 팔을 붙잡고 그의 귀에 속삭였다.
“자기가 뭘 고민하는지 대충 알겠는데, 저 애를 위해서 뭐가 최선일지 잘 생각해 봐.”
벤은 치포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애쉬를 향해 활짝 웃었다.
“자, 다음은 옷이다!”
탁탁. 탁.
불 꺼진 방. 벤은 모니터를 노려보며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여자.”
모니터에 뜬 것은 애쉬의 엄마와 그 가족에 대한 기록. 거기에 애쉬는 없었다.
‘좀 놀랍네. 당연히 애 핑계로 보조금을 받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하긴, 그러려면 정기적으로 복지사한테 가서 잘 키우고 있는 것처럼 연기도 해야 하고, 학교도 보내야 하니 귀찮겠지. 아니, 그전에... 설마?’
아예 출생신고도 안 되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벤은 세상에서 가장 쓴 약을 삼킨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낮에 그녀에게서 맡았던 싸구려 복숭아 향이 아직도 코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아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옆을 돌아보았다. 침대에는 애쉬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애쉬는 안 가면 엄마가 더 화낼 거라며 한사코 집에 돌아가겠다 했지만, 벤은 도무지 안심이 안 되었다. 그래서 며칠만 같이 있자고, 내가 책임지겠다고 애를 어르고 달래서 붙잡았다.
아무 보호도 받지 못하는, 서류상 존재하지 않는 아이. 자기 일 말고는 신경 쓸 여력도, 관심도 없는 이런 동네에서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한들 누가 알기나 할까.
‘내가 가버리면, 이 애는...’
- 나도 결국엔 이렇게 되겠지?
낮에 쇼핑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하필 운도 없이 그늘에 핀 꽃을 보고 애쉬가 무심코 말했다. 잔 줄기를 낼 여유가 없어 위로만 쭉 뻗은 줄기와 누렇게 뜬 잎사귀. 체념한 듯 고개를 숙인 꽃을 바라보던 어린 회청색 눈에는 끝을 맞이하려는 무언가에 대한 동질감과 부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 두 눈이 메말라 있는 게, 벤은 애가 우는 것보다 더 속상했다.
새근새근. 애쉬의 숨소리가 들렸다. 벤은 노트북 컴퓨터를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옷장을 한 번 힐끔 쳐다보고는 방에서 나왔다.
“후우...”
어째 오늘따라 몸이 소파에 더 깊이 파묻히는 것 같은 기분. 벤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누르며 치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저 애를 위해서 뭐가 최선일지 잘 생각해 봐.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언제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아슬아슬한 자신의 삶. 그 안에 아이를 들이는 건 미친 짓이란 것쯤.
‘역시 아동학대 신고를 해야 할까?’
가능한 경찰 눈에는 안 띄고 싶지만. 만약 잘 된다면 격리조치가 취해지겠지. 운이 좋으면 훌륭한 양부모를 만날 수 있을지도.
하지만 운이 나쁘면? 폭력적인 양부모를 만나거나 안 좋은 고아원에 보내져서 지금보다 더한 학대라도 당하면? 아니면 신고해도 아무 조치도 안 이루어지고 어물쩍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럼 그 여자가 기고만장해져서 애를 더 괴롭히지는 않을까?
벤은 무심코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새로 들인 화분이 보였다. 거기엔 낮에 애쉬가 본 꽃이 심어져 있었다. 애가 그런 소릴 하는데,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어서 벤은 직접 그 꽃을 파왔다.
축 늘어진 저 꽃이 언제쯤 일어날까. 죽으면 애쉬가 슬퍼할 텐데, 살아나야 하는데.
물도 주고, 햇빛도 보여주고, 필요하면 거름도 주겠지만, 결국은 제 생명력에 달렸다.
“......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힘.”
벤의 머릿속에서 어느덧 꽃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애쉬의 얼굴이 떠올랐다.
“적어도 저 아이가 혼자서 살아남을 수 있게...”
벤은 중얼거리며 자신의 두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