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짭새 자식들! 갱단 놈들이 우리 가게에서 깽판 친 걸로 내가 신고했을 때는 듣는 둥 마는 둥 슬렁슬렁 넘어가더니, 글쎄 지들 필요할 때는 어찌나 사람 귀찮게 꼬치꼬치 캐묻던지!”
치포의 미용실을 찾은 단골손님 에리샤(Erisha)는 생각하면 할수록 괘씸해 죽겠다는 눈으로 거울을 흘겨보았다. 붉게 칠한 그녀의 윗입술이 으르렁대는 늑대의 입처럼 살짝 말려 올라가자, 작고 마른 얼굴에 비해 유독 커 보이는 앞니가 하얗게 드러났다.
치포는 맞장구를 쳐주었다.
“웃겨~ 근데 뭔 일이래?”
“몰라~ 여기 숨어든 누굴 찾고 있다나 뭐라나.”
“... 그래? 어떻게 생겼는데?”
“그게, 멀쩡하게 잘생긴 남자였어. 몽타준가 뭔가 받아둘 걸 그랬나? 딱 자기 스타일이던데.”
“정말? 뭐 하는 놈이라는데?”
“그... 뭐라더라? 뭔 사이버 뭐시기... 아, 자세히 듣지도 않았어~ 어차피 지들도 우리가 하는 말 안 듣잖아, 안 그래?”
에리샤가 통쾌하다는 듯이 깔깔 웃었다.
“그렇지... 하하.”
손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치포도 덩달아 웃었지만, 눈빛은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끼이익.
“아.”
“어이쿠, 실례.”
곧 손님이 올 거라는 엄마의 말에 집을 나서던 애쉬는 문 앞에 서있는 남자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남자는 놀란 얼굴로 자기를 올려다보는 애쉬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안녕? 너 여기 사니?”
“네...”
“그래? 바이올렛한테 ‘이런’ 아들이 있는지는 몰랐는걸.”
남자가 엄마의 손님일 거라 짐작한 애쉬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원래도 손님이라고 하면 막연한 두려움이 드는데, 이 사람은 뭔가 본질적으로 더 위험한 느낌이 있었다. 그의 반듯한 외모나 옷차림은 이런 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어디 잘 사는 동네에 공무원으로 일하고 있을 것 같은, 집에서는 충실한 가장일 것 같은 사람. 그러나 그의 눈과 입매에서는 억압되고 뒤틀린 욕망이 엿보였다. 애쉬는 본능적으로 그걸 감지해 냈다.
“자, 어서 가봐.”
남자는 몸을 살짝만 옆으로 틀어 어린아이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길을 내주었다. 애쉬는 하얀 족제비처럼 그 좁은 틈새를 비집고 나갔다. 아이의 팔이 남자의 몸에 닿았고, 남자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또 보자.”
다다다닥. 애쉬는 다급히 작은 발을 굴려 계단을 내려갔다. 팔딱이는 심장 고동이 고막을 때렸다.
아래층에 다다른 애쉬는 벤의 집 앞에서 숨을 골랐다.
“하아, 하아... 후우...”
애쉬는 주변을 한 번 살핀 다음, 문을 두드렸다. 똑도독 똑도독 또도도도도도도독.
그의 주머니 속엔 열쇠가 있었다. 만의 하나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언제든 도망쳐 오라고 벤이 준 것이었다. 그러나 애쉬는 이번에도 열쇠를 쓰지 않고 노크를 했다.
[어서 와.]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반기는 벤의 미소를 보고 싶어서였다. 이건 애쉬가 스스로에게 허락한 어리광이었다. 굶주린 마음을 채울 양식이자, 버림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잠재울 안식이며, 구원이었다.
“...?”
그런데 어쩐 일일까. 아무리 기다려도 벤이 나오지 않는다.
애쉬는 다시 한번 노크를 했다. 똑도독 똑도독 또도도도도도도독. 그러나 여전히 대답이 없다.
어디 나갔나? 순간 불안이 엄습해 온다. 문에다 귀를 대어 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괜스레 입이 마른다. 어디 나갈 수도 있지. 침착해 이 바보야. 애쉬는 주머니 속 열쇠를 만지작 거렸다. 그래, 벤을 믿어.
그때, 안에서 희미하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으... 으으..!”
벤, 벤의 목소리다! 애쉬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열쇠로 문을 열고는 뛰다시피 안으로 들어갔다. 소리는 침실에서 나고 있었다. 벌컥, 문을 열어보니 벤이 침대 위에서 잔뜩 얼굴을 찌푸린 채 온몸을 비틀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애쉬는 울상을 지으며 벤의 몸을 흔들었다.
“벤.”
악몽을 꾸는 걸까? 아니면 어디 아픈가?
“벤?”
무섭다. 이 상황이.
싫다. 무력한 자신이.
“벤!”
“흐읍!”
드디어 벤이 눈을 떴다. 그러나 기뻐할 새도 없이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다.
이마에 닿는 차갑고 딱딱한 느낌과 불길한 금속성 소리, 팔을 움켜 잡은 우악스러운 힘, 그리고... 마치 악마를 본 듯한, 악마 같아 보이는 얼굴.
분명 벤인데, 애쉬는 지금 눈앞의 이 사람이 너무 생소했다.
“?! 아...”
스르륵. 악마가 벤의 얼굴에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벤이 손의 힘을 풀고, 이마에서 딱딱한 느낌이 사라지자 애쉬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벤은 애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곧 자신이 움켜쥐었던 어린 살의 감각이 떠올라서 멈칫했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애쉬의 팔에 빨간 손자국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그것은 꿈속에서 애쉬가 핏빛으로 물들던 장면을 연상시켰다.
- 저 애는 너로 인해 불행해지는 거야.
벤은 입술을 깨물었다. 애쉬를 아프게 한 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많이 아프도록.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하지 마.]
... 알고 있었어. 벤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걸. 늘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그러니 총을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잖아.]
그런데 왜, 날?
[아직 잠이 덜 깨어서 못 알아본 거야. 반사적으로 저런 행동이 나올 정도로, 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생각해 봐.]
그럼, 어째서 저런 불편한 표정으로 날 보는 거야?
[미안해서겠지.]
... 이제 내가 부담스러워진 건 아니고?
- 이 쓸모없는 밥버러지 새끼야!
[그만해.]
솔직히, 벤이 나한테 잘 대해주었던 건 다 동정심 때문이잖아? 감사해하는 나를 보며, 기대에 부응하는 나를 보며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을 느낀 것 아니냐고. 그런데 이젠 나를 통해 얻는 보람의 기쁨보다 부담감이 더 커진 거지.
[그만하라고.]
그러게 누가 그렇게까지 잘해주라고 했어? 적당히 해도 됐는데 말이야.
[어떻게 그런 소릴! 이런 이기적이고 자기 방어적인 생각, 역겨워..?]
적당히... 적당히...
톡..
‘너무 잘해주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제발 계속 옆에 있어줘.’
투둑. 툭.
‘두려워. 벤이 나한테 해준 만큼 나는 벤에게 해줄 수가 없어서. 그래서 벤이 떠날까 봐.’
덥석.
‘난 벤이 어떤 사람이라도 상관없는데.’
톡.. 투둑. 툭. 맑은 두 눈에 고인 슬픔이 떨어졌다.
“?!”
애쉬가 어정쩡하게 나와 있는 벤의 손을 잡았다. 처음 만난 날 자신에게 따스한 온기를 알려주었던 그 손을 꼭 잡고서, 아이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진심을 전했다.
벤의 발이 땅으로 내려왔다. 쇠냄새가 묻은 손과 팔이 애쉬의 작은 어깨를 감쌌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안고 있었다.
그날 밤, 애쉬를 돌려보낸 후 벤은 혼자 소파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깨면 기억도 못할 줄 알았던 악몽은 오늘 있었던 일과 함께 흉터처럼 남아버렸다. 그 흉측한 기억 안에서, 꿈에서 본 시체들이 집요하게 저주를 읊어댔다.
- 속죄! 단죄!
벤은 눈을 감고서 낮에 애쉬가 보여준 용기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애쉬가 내민 손, 그것은 구원이었다. 자신의 죄의식 따위 때문에 그 아름답고 강한 아이를 욕되게 해선 안되었다.
비겁하게 도망쳐선 안되었다.
부르르르. 탁자 위에서 휴대전화가 몸을 떨었다. 벤은 전화기를 집었다. 치포에게서 온 문자였다.
[경찰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아무래도...]
“.........”
벤은 전화기를 소파 위에 대충 내려놓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상황이 좋지 않다. 원래라면 지금 당장 짐을 싸서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하는데.
에에엥- 선명하게 깜빡이는 빨간 경고등을 흐리멍덩한 녹색 셔터가 가로막았다. 눈꺼풀 위로 거실 불빛이 내려 검붉은 색을 만들었다. 끈적하게 엉겨 붙은, 산화된 피 같은 색.
벤은 씁쓸히 웃으며 중얼거렸다.
“지금까지 오래 버텼잖아. 미안, 나 이제... 다 그만두면 안 될까?”
수신인에게 닿지 못한 변명과 사과가 덧없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벤의 전화기가 다시 울었다. 벤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이번엔 발신인 불명의 이메일이었다.
용케 스팸메일로 처리되지 않았다 생각하며 바로 이메일을 삭제하려던 찰나, 그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설마. 그럴 리 없어.’
벤은 눈을 깜빡이며 몇 번이고 메일 제목을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한참을 망설인 후, 그는 이메일을 열었다.
내용은 한동안 소식이 뜸했던 지인이 보낼 법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안부 인사였다. 그러나 그걸 읽는 벤의 눈은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었다.
[마리가 널 보고 싶어 해.]
“..!”
[...도 네게 보여주고 싶고. 언제 한번 오지 않을래?]
“흐... 흐읍..!”
벤은 자꾸만 신음을 흘리는 입을 틀어막고서 메일을 읽어 내려갔다. 붉게 달아오른 두 눈이 마지막 문장 위에서 멈추었다.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며, 진심을 담아.
- ‘셀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