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이익.
옷장 문이 열리고, 어둠에 잠겨 있던 검은 물체가 오랜만에 바깥 빛을 보았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벤의 눈이 그 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피가 흩뿌려진 눈밭 속에 겨우 살아남은 녹색 풀잎처럼, 그의 눈동자에는 깊은 회한과 희망이 공존하고 있었다.
“......”
끼이익. 탁. 벤은 옷장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아무도 없는 방.
털썩.
옷장 안에서 뭔가가 떨어지면서 옷장 문에 부딪혔다. 그 바람에 문이 살짝 열리고, 그 틈으로 흙이 떨어져 바닥을 더럽혔다.
집을 나선 벤의 발걸음은 치포의 미용실로 향했다.
짤랑.
“죄송해요, 아직 영업 시작 전..?!”
이른 아침, 한창 가게 오픈을 준비 중이던 치포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미안한 듯 웃고 있는 벤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녀는 깨달았다.
“... 떠나려는 거구나.”
쏴아. 꾸물거리던 회색 구름이 쏟아낸 빗줄기가 미용실 유리창을 세차게 때렸다.
뿌옇게 흐려진 창 안에서 두 남녀는 서로 마주 보았다가,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마주 보았다.
이윽고 치포가 고개를 떨구었다. 창문 위를 굵직하게 흘러내리는 빗방울도 그녀의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는 안으려고 다가오는 벤을 매몰차게 밀어내며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렸다.
쏴아아. 몸이 부서지도록 땅을 때리는 빗소리가 유난히 아팠다.
똑도독 똑도독 또도도도도도도독.
“......”
똑도독 똑도독 또도도도도도도독.
“......”
철컥. 끼이익. 쾅.
애쉬는 현관에 서서 주인 없는 집안을 둘러보았다.
불 꺼진 집은 너무 어둡고 외로웠다. 더러운 하수구물이 흐르는 것 같은 빗소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비가 내려서 다행인지 아닌지, 애쉬는 알 수 없었다.
식탁에는 아직 정리하지 않은 접시와 스푼, 컵이 널브러져 있었다. 컵 내용물이 말라붙어 있는 걸 보아 어젯밤부터 있었던 듯했다.
애쉬는 말없이 식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싱크 안에 더러운 식기를 넣고 물을 틀었다. 쏴아. 그는 불을 켜지 않고 설거지를 했다. 어둠이 싫긴 해도 환하면 혼자라는 사실이 더 확연히 느껴질 것 같아서였다.
설거지가 끝나자 애쉬는 청소를 시작했다. 가만히 있으면 술래에게 잡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생각이 닿기 전에 몸을 움직였다. 부엌과 거실 청소를 뚝딱 해치우고, 화장실 청소도 했다. 포크와 나이프를 잡는 법보다 빗자루와 솔을 잡는 법을 먼저 깨우친 만큼 청소에는 도가 튼지라, 화장실 청소도 생각보다 빨리 끝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침실뿐.
애쉬는 방문 앞에서 망설였다.
그만 어제 일이 떠올라 버렸다. 이마에 닿던 차가운 감촉, 처음 보는 벤의 무서운 얼굴.
애쉬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팔을 손으로 감쌌다.
‘이런, 안돼.’
이 이상 사로잡히기 전에 기억을 뿌리쳐야 했다. 애쉬는 문을 열었다.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가능한 노트북 컴퓨터를 건드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책상 위에 쌓인 먼지를 닦았다.
이젠 바닥 차례. 그런데 꼼꼼히 구석구석 청소를 진행하던 애쉬의 눈에 웬 흙더미가 보였다.
“..?”
위치는 옷장 앞. 자연스레 그는 살짝 열려 있는 문으로 눈을 옮겼다.
“안에 뭐가 넘어졌나?”
조심스레 옷장 문을 여니 웬 검은 물체와 그 위에 넘어져 있는, 검은 봉지에 싸인 화분이 보였다.
“이건..!”
2년 전 자신이 길가에서 찾아낸, 다 죽어가던 꽃. 벤이 직접 파와서 정성스레 키우던 꽃이었다. 덕분에 누렇게 말라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그 꽃은 그 후로 1년을 더 살았다.
그러나 결국 명이 다 한 걸까. 꽃은 갑자기 시들시들해지더니 이유도 없이 죽어버렸다. 애쉬가 그냥 버리자 했지만 벤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화분을 창가에 계속 두었다. 끝내 벤이 기대했던, 꽃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고, 화분은 어느 날 자취를 감추었다.
“그때 버린 줄 알았는데, 왜 여기에...”
애쉬는 화분이 든 봉지를 들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흙이 흘러내린 자리에 미라처럼 말라버린 뿌리가 드러나 있었다. 애쉬는 봉투 안과 바닥에 떨어진, 물기 하나 없는 흙을 손으로 주워 화분 속에 넣었다. 그리고 끝을 잘 묶어 밀봉한 후, 봉지를 품에 꼭 안았다. 어쩐지 마음이 안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안이 엉망이 됐네.”
애쉬는 옷장에서 흙이 묻은 검은 물건을 꺼냈다. 서류가방처럼 생긴 그것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쇠로 만든 표면은 편평했고, 작은 흠집이 조금 있긴 했지만 깨진 부분 없이 잘 관리되어 있었다.
흙이 어디 구석에 끼어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물건에는 신기하게도 이음새가 없었다. 마치 그 모양 그대로 거푸집을 만들어 한번에 만든 것 같았다.
“희한하게 생겼네. 뭐에 쓰는 거지?”
흙을 털어내려고 애쉬가 손으로 쓰다듬자 검은 물체가 위잉 소리를 내며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어? 안에 뭐가 있나?”
애쉬는 머리를 숙여 물체에 귀를 갖다 대었다. 위잉- 삐빅, 삐- 익숙한 기계음이 들렸다.
“설마... 컴퓨터?! 내가 잘못 건드려서 켜진 거 아냐?”
애쉬는 겁이 덜컥 났다. 어서 열어서 확인한 다음 필요하면 전원을 꺼야 했다.
다만 그 방법이 문제였다. 틈 하나 없이 밀봉된 상자에는 여는 장치가 없었다. 마치 거대한 비밀을 간직한 고대 유물처럼, 멸망을 가져올 외계 문명의 문물처럼, 절대 열어 봐서는 안 되기에 그렇게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더 이상 벤과의 트러블을 원치 않는 애쉬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상자를 구석구석 유심히 둘러본 그는 아주 조그만 구멍을 찾아내었다. 그것은 바늘 하나 겨우 들어갈 만큼 작아서 열쇠 구멍이라고 하기엔 좀 무리가 있었다.
“혹시 음성으로 잠금이 풀리는 건가?”
그렇다면 패스워드가 있을 터. 애쉬는 금방 떠오른 단어를 말해보았다.
“판도라.”
상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하긴, 진짜 판도라의 상자라면 쉽게 열리도록 디자인되었겠지. 애초에 열라고 준 것이니.’
그럼 절대 열지 못할 것, 쉽게 뚫지 못할 보안이랑 연관된 말이 뭐가 있을까.
애쉬는 지금까지 배운 지식을 총 동원했다. 수많은 후보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한 기억이 떠올랐다.
- 잘 들어, 애쉬.
그날 애쉬는 다 지난 옛날 사람들의 철학이나 말도 안 되는 신화 같은 걸 왜 배워야 하는지 벤에게 물었다. 벤은 여러 얇은 층으로 이루어진 파이의 크러스트를 포크로 콕콕 찍으며 대답했다.
- 인간의 발상은 완전한 무에서는 절대로 태어나지 못해. 즉, 전혀 모르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는 뜻이야. 지금 우리가 진실이라 믿는 지식 또한 과거에 이루어진 발견과 해석 위에 쌓아 올려진 것에 지나지 않아. 이 파이 크러스트처럼. 철학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법이고, 신화는 그 철학에 상징의 형태를 씌워 이야기라는 방법으로 전달하지. 고대 철학과 신화가 지금도 상식으로서, 메타포로서 살아 숨 쉬는 이유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그것들과 아주 연관이 없지 않기 때문이야.
‘침입을 막는 것, 보안. 그걸 나타내는 상징은 ‘방패’.’
“무적의 방패, 신의 가호... 아테나의 ‘아이기스(Aegis)’!”
철컥. 지잉-
“열렸다!”
분명 틈 하나 보이지 않던 측면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물건이 열렸다.
안은 노트북 컴퓨터와 거의 똑같은 구조였다. 화면에는 처음 보는 문자들의 행렬이 검은 바탕 위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으아, 역시 작동하고 있었어. 이거 어떻게 끄는 거지?’
애쉬가 다급히 전원 버튼을 찾았지만 그런 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시스템 종료! 아니, 그냥 종료? 꺼, 끄라고!”
아까처럼 말로 해 보았으나 기계는 화면에 계속 문자만 띄울 뿐이었다.
‘이제 어쩌지?’
고민에 빠진 회청색 눈에 무의미한 행렬이 빠르게 지나갔다.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애쉬의 두 눈이 어느 순간 커다랗게 떠졌다.
‘가만, 뭔가 패턴이 있는 거 같기도 한데..?’
애쉬는 자기도 모르게 화면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문자들의 무질서한 잔물결이 점점 어떤 모양을 띄기 시작했고, 혼돈 속에서 질서가 얼핏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애쉬가 키보드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어떤 키에 닿으려던 그때, 문가에서 누가 버럭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깜짝 놀란 애쉬는 튀어 오르듯이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다. 벤이었다.
“아, 아니, 나는...”
벤이 애쉬를 노려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탁! 소리가 나도록 물건을 닫고는 애쉬의 어깨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왜 네가 손을 대! 왜 멋대로 열어본 거야, 왜!”
그냥 청소를 하려 한 것뿐인데. 흙이 떨어져 있어서 치우려고. 그런데 실수로 뭔가 켜버린 거 같아서, 그래서... 이렇듯 변명거리가 있어도 애쉬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는 손대지 마, 알았어?!”
또다. 또 벤을 화나게 만들었다. 애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였다.
벤은 그제야 이성을 되찾았다. 무섭게 일그러졌던 그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왔고, 애쉬의 어깨를 잡은 손이 떨어졌다.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벤도 미안함에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또다. 어제에 이어서 또 이런 못 미더운 꼴을 보이다니. 그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 위험한 거라서 그래. 저건... 저건 절대 열어선 안돼.”
“... 저게 뭔데?”
떨리는 작은 목소리가 물었다. 벤은 검은 물건을 내려다보며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저건 ‘지옥을 여는 문’이야.”
달그락달그락.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점심 식사를 마친 벤과 애쉬 두 사람은 말없이 다시 거리를 두었다. 애쉬는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고, 벤은 일부러 설거지를 천천히 하고 있는 중이었다.
‘큰일이네.’
이래서야 애한테 어떻게 말을 꺼낸담. 벤은 속으로 자기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 바보야! 이제 어쩔 거야? 이런 상황에서 간다고 어떻게 말을 하냐고!’
애가 얼마나 충격이 클까. 안 그래도 자기 탓이라고 오해할 판인데, 이젠 더 할 거다.
그렇다고 누구한테 미룰 수도 없는 일. 이젠 시간도 없다.
끼익. 쫙. 탁. 벤은 서둘러 설거지를 마무리하고는 거실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애쉬가 얼굴에 책을 가까이 갖다 대었다.
“... 애쉬.”
“......”
벤은 애써 외면하는 아이를 다시 한번 불렀다.
“애쉬. 할 말이 있어. 중요한 얘기야.”
애쉬가 할 수 없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굳게 다문 입, 떨리는 눈동자. 눈치 빠른 이 아이는 이미 알고 있는 걸까.
“나, 오늘 밤에 떠나.”
하지만 꼭 돌아올 거야. 너를 데리러.
약속해.
“쉭- 쉭- 웨엑! 엑!”
“아, 또다.”
침상 옆을 지키고 있던 소년은 거칠어진 숨소리를 듣고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침대 위에 누운 앙상한 몰골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갖다 대었다.
“쉬- 쉬- 괜찮아, 형.”
소년이 눈을 감으며 달래듯 말했다. 소년의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이 내려와 뼈만 남은 얼굴을 간지럽혔다. 만약 아직 감각이 살아 있다면 제법 간지럽다 느낄 것이었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무지개 너머 어딘가, 저 높은 곳에는 언젠가 자장가에서 들었던 곳이 있답니다).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무지개 너머 어딘가, 하늘은 푸르고, 그대가 감히 꿈꾸던 꿈들이 이루어지는 곳)...”
소년의 고운 목소리가 노랫가락을 읊자, 효과가 있었는지 거친 숨이 잦아들었다.
“엄마가 자주 불러주던 자장가인데, 형도 마음에 드나 보네.”
소년이 미소를 지으며 눈을 떴다. 부드러운 녹색 눈동자였다.
삑- 삑- 숨소리도 심장 박동도 안정된 걸 보고 소년은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는 형이라 부른 이의 얇은 눈꺼풀 속에서 눈알이 바쁘게 움직이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과연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정말 궁금해.”
빚은 듯 아름다운 입꼬리를 쭉 위로 올리며 그가 악동처럼 웃었다.
“곧 나도 볼 수 있겠지? 쿡쿡, 아하하! 헤헷! 하!”
규칙적인 기계음만 가득한 병실에 소년의 이질적인 웃음소리가 불협화음을 만들고 있었다.
자아, 어서 모이세요. 곧 2막이 시작될 터이니.
- 만약 발신자가 진짜 아비스라면 인생에서 둘도 없을 기회를 놓치게 될 텐데, 참을 수 있겠냐고.
- 하아... 멜, 애초에 당신을 만나는 게 아니었는데.
자신의 운명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들이여.
- 너희는 죽으면 어떻게 되는데?
- 글쎄? 아마 그걸로 끝일 걸?
- 그거 좋네.
지금은 '11번째 시간(the 11th hour; 일이 너무 늦기 전, 아직 손을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
- 내가 잊을 리가 없잖아.
- '찾았다.'
어째서 그곳이 현실인지, 너무 늦기 전에 답을 찾아야 해요.
- 그런데 말이야, 아이.
- 응?
- 장자 할아버지도 우리도, 어쩌면 누군가의 꿈속에 있는 건 아닐까?
"곧 만나, 형. 꿈속에서."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외전 'LoS의 아이들'과 '2부'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