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박.
벤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밑에는 발목까지 잠길 정도로 물이 고여있어 걸을 때마다 찰박 소리가 났다. 걸음이 질척한 걸 보니 물은 깨끗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가 어디지?’
어쩌다가 이런 곳에 오게 됐는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긴 족자가 불에 타 짤막한 중간 토막만 남은, 그래서 원래 무슨 내용이었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것과 같았다. 감각도 상당 부분 제한되어 있어서 물과 어둠, 팔다리의 움직임 외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도, 위치와 방향도 뭉그러져 있었다.
벤은 생각했다. 실험실 생쥐가 마취에서 깨어나 처음 보는 미로를 마주하는 기분이 아마 이렇지 않을까. 대체 어떤 짓궂은 놈의 손에 잡혀 이런 곳에 놓인 걸까.
‘... 나지 뭐.’
찰박. 벤이 걸음을 멈추었다.
이건 꿈이다, 기억도 감각도 제 기능을 못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제 자리를 지킨 벤의 이성은 그렇게 결론지었다. 그러자 기억이 뒤늦게 달려와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그래, 갑자기 급한 의뢰가 들어와서 한숨도 못 자고 일하기를 며칠, 겨우 데드라인 전에 끝내고서 쓰러지듯이 침대에 몸을 뉘었어. 그렇게 바로 잠이 들어 버린 거야. 기억의 진술을 듣고 이성이 손으로 턱을 쓸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은 지금 침대 위, 적어도 위험한 상황은 아니겠군.
벤은 팔짱을 끼고 생각했다. 꿈을 잘 기억하는 편이 아니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자신은 아마 종종 악몽을 꾸었을 거다. 그렇다곤 해도 이번 꿈은 굉장히 불쾌하다. 빨리 다른 꿈으로 바뀌거나 잠에서 깼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깨면 기억도 못 하겠지만.’
이런 불쾌함을 꿈속의 자신만 느끼다니.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든다. 아니지, 다행스러워해야 하나? 벤은 눈을 감고 자조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60억 인류의 목숨이냐, 아니면 몇백 명의 목숨이냐.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 너는 이미 잘 알고 있을 텐데.”
얼음장 같은 손이 척추를 확 움켜쥔 것 같은 느낌에 벤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선명한 코발트블루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주변의 어둠이 걷히고, 눈동자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악령 들린 남자..!”
어깨까지 오는 진갈색 장발. 농장 작업복과 어울리지 않는 섬세한 얼굴. 평생 고생을 모르다가 최근 들어 혹사당하기 시작한 손. 그날 밤처럼 남자는 헛간에 쌓아둔 상자 위에 앉아 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벤은 그의 손에 들린 카드뭉치를 바라보다가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며 중얼거렸다.
“... 난, 옳은 선택을 했어.”
남자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거짓말.”
어디선가 대신 대답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잘 아는 목소리.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서 벤은 부디 잘못 들었으면 하고 바랐다. 아무리 꿈이라도 이런 곳에서 그녀를 만나고 싶진 않았다.
“난 널 믿고 의지했는데... 어떻게 나에게 그런 더러운 욕망을 품었을 수가 있지?”
마리의 남보랏빛 눈동자가 증오의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녀의 고운 분홍 입술이 경멸로 일그러졌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과 대조를 이루어 더욱 선명히 보였다. 그게 너무 아파서, 벤은 그 얼굴을 외면해 버렸다.
“나쁜 놈.”
마리의 바로 옆에 치포가 나타났다. 그녀는 역겨운 오물을 보듯이 벤을 흘겨보았다.
“당신한테 나는 그저 도구였구나?”
벤은 입술을 깨물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미용사나 마사지사, 네일아티스트, 유흥종사자 등은 잘만 구슬리면 그들의 손님들로부터 자연스레 정보를 얻어낼 수 있기에, 지금껏 그는 일부러 그런 직종의 여자들에게 접근했었다. 치포도 그중 하나’였’다.
“처음에는 그랬어. 미안... 하지만 진짜 처음에만이야. 당신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당신이란 사람을 알게 되면서 점점 당신을 좋아하게, 아니 사랑하게 됐어.”
“그럼 나는? 어릴 적부터 죽 함께 자란 나는 뭐였는데?”
“당신이 누굴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야? 그저 이용하기 편해서가 아니고?”
원망하는 마리와 책망하는 치포. 두 여자의 따가운 비난으로부터 벤은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에게 등뒤에서 또 다른 이가 말을 걸었다.
“믿었는데.”
“흡!”
벤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퀭한 두 눈동자에 비친 것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벤의 턱과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또 다른 그가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널 믿었는데. 내 모든 걸 포기하면서까지 너를...”
벤은 그를 피해 또다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던 중 뭔가에 걸려 뒤로 넘어졌다.
“아악!”
철퍽! 더러운 물이 사방으로 튀고 파문이 어지러이 일었다. 눈에 튄 물을 소매로 닦으려고 땅을 짚었던 손을 들어 올린 그때, 벤은 바닥에 고인 물의 정체를 알아챘다.
“피...?”
[배신자.]
[너 때문에...]
[네가 우릴 죽였어!]
피의 웅덩이 속에 잠겨있던 시체들이 하나 둘 떠올라 모습을 드러냈다. 배에 구멍이 난 시체, 깨진 두개골 틈으로 뇌가 보이는 시체, 아래턱이 없는 시체, 독 때문에 시커멓게 변한 시체 등. 수백구의 시체들이 질척한 피를 뚝뚝 흘리며 벤에게 다가왔다.
벤은 얼어붙은 채 그 끔찍한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수많은 악의의 손아귀가 그의 옷자락과 사지를 잡아당겼고, 원한의 이빨이 그의 살을 깨물었다. 시체들은 비명을 지르는 벤의 입을 틀어막고, 도리질 치는 머리를 붙잡아 위를 향하게 했다. 그리고 질끈 감은 눈을 억지로 뜨게 만들었다.
그곳에, 공중에 애쉬가 매달려 있었다. 비둘기 깃털처럼 새하얀 옷을 입고 잠들어 있는 아이는 이 참극의 피날레, 광기 어린 의식에 걸맞은 최고의 제물이었다.
“으읍? 읍읍! 으으으읍!”
애쉬? 애쉬! 애는 놔줘! 저 애가 무슨 상관이야! 벤은 막힌 입 틈새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의 마음을 읽은 시체들이 딸각거리며 비웃었다.
[왜 상관이 없어? 네가 저 아이의 인생에 관여했잖아.]
[저 애는 너로 인해 불행해지는 거야.]
[잘 봐.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 소란에 애쉬가 눈을 떴다. 아이는 발밑의 아비규환을 바라보며 구슬피 울먹였다.
“벤... 살인자였구나.”
“으...”
“죄책감을 덜어보려고 날 이용한 거야?”
[속죄! 단죄!]
시체들이 외치자 하얀 장미에 잉크물이 드는 것같이 애쉬가 서서히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발끝부터 시작하여 발, 발목, 바지, 윗도리의 순서로 어린 순수함이 불결함에 잠식되었다.
‘그만둬!’
벤은 시체들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열심히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애쉬는 목과 얼굴, 머리카락 끝까지 완전히 피로 물들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애쉬의 몸이 산화된 피처럼 검게 변하면서 굳어갔다. 이윽고 새카맣게 변한 몸이 가루같이 바스러져 떨어지자, 벤은 더 이상 보지 못하고 눈을 뒤집었다.
‘제발 깨어나! 깨어나라고, 이 빌어먹을 자식아!’
[벤.]
환청인가. 웅얼웅얼 희미하게 벤을 부르는 애쉬의 목소리가 들렸다.
[벤?]
다시 들려온 목소리는 더욱 크고 또렷했다. 환청이 아니다. 분명 애쉬가 부르고 있었다.
“벤!”
“흐읍!”
잠결에 벤은 베개 밑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어 자기 몸을 건드리는 상대에게 겨누었다. 도망자로 살면서 몸에 배어버린,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철컥!
“?!”
총구가 향한 것은 애쉬의 이마였다.
에에엥- 에에엥-
귀가 떨어져 나갈 듯이 시끄러운 비상 경보음. 복도에 멈춰 선 남자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손에는 총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고, 뒤로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남자는 속으로 수를 세었다. 숫자는 수십에 달했다. 쯧, 아직도 그렇게 많이 남았나. 자꾸 떨려오는 손에 힘을 주면서 그는 탄창을 갈아 끼웠다. 침착해. 아무것도 느끼지 마.
“후우...”
남자는 숨을 고르며 소음기가 달린 총을 장전했다. 철컥. 묵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마음도 가라앉았다.
무장한 경호원들은 모두 거짓 경보에 속아 지하에 갇혔다. 조작해 둔 환풍기 바람을 타고 지하에 퍼진 맹독 가스로 다들 지금쯤 저세상일 거다. 이제 남은 건 지상의 연구원들과 관리자들 뿐. 이렇게 쏴댔는데 아무도 도망 나오지 않는 거 보니 겁을 먹고 경호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거나 경보 소리에 묻혀 총소리가 들리지 않은 모양이다.
걱정 없어. 모든 건 계획대로 순조롭다.
뚜벅뚜벅뚜벅. 끼이익. 한 연구실 문이 열렸다. 숨어있던 사람들이 남자를 보고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아, 벤!”
“대체 무슨 일이야? 경보가 계속...”
인원수와 위치를 파악한 남자는 망설임 없이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벤?”
탁! 머리. 클린 샷.
“아악!”
탁! 얼굴. 치명상.
“너 대체 무슨 짓이야!”
탁! 가슴을 노렸는데. 달려드는 바람에 살짝 빗맞았다. 그래도 배에 제대로 맞혔으니까 괜찮다.
배에 구멍이 난 이가 고통에 신음하며 몸을 웅크렸다.
“으... 으...”
그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눈빛에는 의문과 원망이 가득한 가운데 미약한 희망이 숨어 있었다. 그래도 같이 일한 세월이 있는데, 총알 하나로 이 괴로움을 덜어줄 정도의 의리는 남아있지 않을까.
그러나 남자는 그대로 뒤로 돌아 연구실을 나갔다. 그는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아까보다 줄어 있었다.
‘어차피 아무도 살아나가지 못해.’
에에엥- 흥건한 피와 화약 냄새가 연구소를 채워나갔다. 숫자도 점점 줄어 마침내 1이 되었다.
“히익..!”
최후의 1인, 캠벨을 본 순간 남자는 계획을 변경했다.
“너는 여기서 빠져나가서 멀리 도망쳐.”
미끼가 필요했다. 저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거짓 경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