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水妟), 고요함 아래에서 헤엄치는 마음의 이름
최근 들어 유난히 일상 곳곳에서 작은 ‘막힘’이 있었다.
신호등은 이상하게도 주황불에만 걸렸고,
늘 여유롭게 비어 있던 주차 자리도 오늘따라 모두 차 있었다.
그런 순간들이 겹칠 때면, 나는 오히려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한 신호를 읽는다.
삶이 중요한 문장 앞에서 잠시 속도를 낮추라고 은근하게 브레이크를 거는 순간들.
지금 이 글이 쉽게 써지지 않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감정 인문학을 쓰는 나에게
이 페이지는 하나의 전환점이자,
다음 챕터의 문턱일 테니까.
나는 오래도록 ‘조용한 집’에서 자랐다.
누군가에게는 평온이겠지만
어린 나에게 그 고요함은
바람 한 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호수 같았다.
감정의 작은 파동조차
스스로 가라앉혀야 하는 공간.
엄마는 두려움과 배려를 동시에 가진 분이었다.
그 안에서 나는 보호와 훈계 사이의 좁은 틈에서 자라났다.
그 시절의 울컥함과 억울함은 오래 남았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도 엄마가 가진 세계의 언어였다.
사랑이 울타리가 될 때도 있지만,
너무 가까우면 오히려 스스로 설 힘을 잃기도 한다.
줄탁동시 - 보호와 성장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아빠는 말수가 적었다.
그러나 가끔 툭 던지는 말씀은
어두운 방의 작은 스탠드 조명처럼 오래 남았다.
“최선을 다 해라.”
“사람은 배워야 한다.”
“네 인생은 너의 것이다.”
말보다 존재로 보여주던 사람이셨다.
언니와 나는 싸운 적이 한 번도 없을 만큼 고요했고,
우리 집도 절간처럼 고즈넉했다.
칭찬은 늘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언니만큼 할 수 있다’는 말로 바뀌었고,
어른스러운 또래 친구와의 비교는
내 안에 작은 주눅을 남겼다.
그건 아마도 “나는 아직 부족하다”는 감정의 씨앗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란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감정이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오래 자리하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 감정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서로 다른 결을 가진 존재였고,
그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읽고,
감정을 관찰하고, 심리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감정이라는 세계가
얼마나 깊고, 섬세하고,
얼마나 인간을 바꿔놓는지.
그즈음, 예술이 내 삶으로 들어왔다.
어떤 음악은 오래 묵은 감정을 다시 불러내면서도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어떤 글씨는 내 심장을 흔들어 놓았고,
어떤 그림은 내 세계를 넓혀 주었다.
하나는 내부를 뒤흔드는 지진 같은 감정이었고,
다른 하나는 상상의 창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었다.
그 다른 결들의 경험이 모여
나는 결국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정은 언제나
결국은 나를 성장하는 쪽으로 이끌어왔다는 것.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수안(水妟)’이라는 이름을 건네받았다.
맑을 수(水), 편안할 안(妟).
물의 투명함과 햇살의 온도가 함께 담긴 이름.
단순한 애칭도, 예명도 아니었다.
내가 지나온 마음의 결을
다시 비춰주는 작은 거울 같았다.
겉으로 보이는 나는
잔잔하고 조용한 사람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멈춤이 아니라,
조용히 계속 움직여온 내면의 결과다.
백조가 물 위에서 우아하게 미끄러지지만
물아래에서는 쉼 없이 발을 젓고 있듯,
나도 늘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나만의 속도로 헤엄쳐 왔다.
내 열정은 불처럼 타오르지 않는다.
그 대신 물처럼 스며들고,
햇살처럼 확산된다.
조용하지만 방향을 잃지 않는 온도로.
그래서일까.
‘수안’이라는 이름은
고요함 속에서 길을 찾아가는 사람,
겉은 잔잔하지만
속에서는 묵묵히 헤엄치는 사람의 표정과 닮아 있다.
내 이야기는 거창하지 않다.
그저 한 사람에게만은 절대적인,
평범하지만 유일한 삶의 서사일 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기록하려 한다.
왜냐면 먼지 같은 존재라도
햇빛이 스칠 때 잠시 반짝이기 때문이다.
그 반짝임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
자기를 알아보게 만들고
다시 걸어갈 방향을 조용히 정돈해 준다.
나는 그 순간들을 글로 남기려 한다.
언젠가 이 글이
누군가의 마음에서도
잠시 반짝일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