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열리는 순간을 지켜본 날
얼마 전, 아이들의 교실에서 이상한 장면 하나와 마주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익숙한 장면인데 처음처럼 낯설게 보인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초반에는 두 명씩 짝을 지어 모두가 함께하는 6 행시 짓기를 시도해 봤는데, 아이들이 내용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이어가기 어려워하는듯했다. 그래서 각자의 6 행시를 만들기로 바꾸고 빈 종이 한 장씩을 나눠주었다.
그 순간 아이들 안에서 뭔가가 새롭게 “열렸다”는 걸 감지할 수 있었다. 평소에는 조심하던 말, 작게 쓰고 숨어버리던 글자들, 머뭇거리며 선만 긋던 손들이 오늘은 이유 없이 힘을 얻은 듯 자유롭게 뻗어나갔다. 그건 딱, 내가 좋아하는 말로 표현하면 폭발적 창작의 순간이었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큰 세계를 갖고 있다.”
오늘 나는 그 사실을 또렷하게 보았다. 먹을 걸 좋아하는 한 남학생은 “봉봉은 염라대왕이다”라고 썼다. 함께 할 때는 어떤 단어로 이어가야 할지 멈칫하던 아이가 갑자기 초등학교 교실 한가운데서 저승 세계관을 창조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뒷면에는 쿠키영상 기획까지 적고, 암호인 듯 아닌 듯한 그 내용들을 내게 일일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왼손잡이 여학생은 놀랍게도 평소보다 엄청 큰 글자를 적어냈다. 왼손이 아프다고 글자를 못 쓰겠다 했었는데, 내가 “그럼 선생님이 오늘은 특별히 받아 적어줄게. 도와줄 수 있는 만큼 도와줄 거예요.”라고 말하는 순간 그 아이 안의 어떤 마음의 문이 열렸던 모양이었다. 손가락의 통증을 뛰어넘은 그 문은 무엇이었을까.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쁘게 빛났다.
어떤 아이는 6 행시 확장 버전을 넘어 또 다른 6 행시, 4행시를 만드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옆자리 아이는 스스로 어느새 작은 미니북을 만들고 있었다.
어른의 사소한 배려가 아이에게는 ‘전부 허용된 순간’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순간 아이들은 그들만의 시그널을 보낸다.
“나 사실은 이렇게 쓰고 싶었어요.”
“나 이렇게 크게 쓰고 싶었어요.”
“이게 바로 나예요.”
나는 그것을 보며,
아, 이게 바로 내가 바라던 수업이었지…
하는 묘한 전율을 느꼈다.
“자유를 열면, 소란도 함께 열린다.”
그런데 동시에 또 하나의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교실이 소란스러워질까? 아이들끼리 경계가 흐트러질까? 학부모는 어떻게 생각할까? 학교 선생님은 또 뭐라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통제력을 잃는 건 아닐까?”
어른의 세계는 늘 자유와 제약 사이에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 창작은 폭발적이지만 현장은 현실적이다. 책상 아래에서 킥킥대는 아이들, 누군가는 과몰입해서 선 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소외될 수도 있다. 나는 오늘 그 두려움도 확실히 느꼈다.
빛과 그림자는 오늘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나를 양손으로 잡고 같은 방향으로 끌어당겼다. 자유를 열면 책임이 따라오고, 책임을 지면 자유가 더 깊어진다. 아이들의 폭발적 창작은 그 둘 사이의 진동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 진동을 견디는 게 “좋은 선생님”의 본질인지 모른다.
아이들이 떠오를 때 나는 함께 떠오르고,
아이들이 산으로 가면 나는 그 산의 그림자를 살핀다.
둘 다 필요하고, 둘이 충돌하면 안 되며,
둘을 조율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돌아보면, 이 수업은 단순히 6 행시를 쓰는 시간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자신 안의 감정과 세계를 창작이라는 형식으로 드러냈고,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며 감정이 어떻게 열리고, 어떻게 흔들리며, 어떻게 서로를 비추는지 깊게 배웠다. 감정은 하나의 이름으로 규정되지 않고 여러 층위로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 빛과 그림자가 번갈아 오는 것이 아니라 한순간에 겹쳐진다는 것. 그리고 창작은 바로 그 복잡한 감정의 구조가 순간적으로 열릴 때 일어난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아이들의 창작을 보는 일은 결국 인간의 감정이 작동하는 방식을 가까이서 관찰하는 일이다. 아마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감정 인문학’이라고 부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작은 진동은 아이들만의 것이 아니라, 나의 감정과 어른성까지 함께 흔들어놓았다. 그 진동 속에서 나는 다시 배운다. 내가 하는 일의 본질은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열리는 순간을 지켜보고 조율하는 일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