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인문학 11 : 한 아이의 감정이 자라는 방식

말보다 감정이 먼저 흐르던 아이에서 성인이 되기까지

by 수안


아이를 오래 바라보다 보면, 말보다 먼저 움직이는 마음의 방식이 있다. 그 방식은 시간이 흐르며 형태를 바꾸고, 조금씩 자신만의 언어를 만든다. 이 글은 큰아들이 어떤 감정의 흐름 속에서 자라왔는지, 그 흐름이 지금의 청년기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차분히 기록해 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큰아들은 세상과 처음 마주할 때 언어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아이였다.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았지만 걸음은 누구보다 빨랐고, 마트에서는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져 어른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말은 늦었고 눈을 맞추는 일도 서툴렀지만, 그는 이미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의 질서를 읽고 있었다. 버스를 오래 바라보던 시선, 지하철 노선도를 통째로 외우던 기억력, 하나에 닿으면 한참을 떠나지 않던 집중. 그의 세계는 언어보다 ‘구조와 흐름’이 먼저 다가오는 방식으로 열려 있었다.


유아기에는 반복을 통해 감정을 정리하는 모습이 두드러졌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하면 크게 울고, 놀다 집에 들어오라는 말에 한참을 버티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떼쓰기라기보다, 자신 안의 혼란을 조금씩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과정에 가까웠다. 그에게 반복은 고집이 아니라 감정을 다루기 위한 작은 도구였다. 어린이집에서도 혼자 돌아다니며 또래와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못했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었다. 세상을 서둘러 받아들이기보다 천천히 의미를 붙여가는 아이. 그 속도는 느렸지만 깊었다.


학령기에 들어서며 그는 관계보다 자기 안쪽에서 먼저 반응이 일어나는 아이였다. 초등 저학년 시절엔 질문이 많아 수업 흐름을 끊기도 했고, 한 번 관심이 생기면 오랫동안 파고들었다. 그러나 고학년이 되자 말수가 줄었다. 위축이라기보다 ‘어디까지 나를 보여야 하는지’ 스스로 조절이 가능해진 변화였다. 갈등도 겪고 친구들과의 거리도 배우며, 감정의 크기는 겉으로 덜 드러났지만 그 대신 내면은 조금씩 단단해졌다. 고등학교에서 들은 평가는 담백했다. “조용하고, 예의 바르며, 책임감 있는 학생.” 어릴 때의 특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성인이 된 지금, 그의 감정은 훨씬 부드러워졌지만 어린 시절의 방식이 여전히 바탕에 남아 있다. 요리를 연구하고, 일본 문화에 관심을 두고, 어른들과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지만, 불안한 일이 오면 며칠 전부터 반복해서 말하며 마음을 고른다. 예비군 훈련처럼 하기 싫거나 긴장되는 순간 앞에서 예전의 정리 방식이 조용히 나타나는 것이다. 반대로 이미 마음속에서 안정된 일은 굳이 말로 꺼낼 필요가 없다. 그의 감정은 그렇게 정리된 형태로 흐르는 편이다. 큰아들 입대 때 엄마로서 눈물이 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어릴 때부터 자신의 불안을 어느 정도 스스로 다루던 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오랫동안 지켜본 신뢰가 그 자리에 자연스럽게 있었다.


한 사람의 감정은 어릴 때의 특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자리 잡아 지금의 그를 만든다. 몰입의 힘은 지식과 취향으로 이어지고, 반복을 통한 정리는 성인이 되어 말로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히는 습관이 된다. 눈을 잘 맞추지 못하던 아이는 이제 어른들과도 편하게 대화하는 청년이 되었다.


감정은 바뀌지 않는다. 다만 표현되는 방식이 진화될 뿐이다. 애정 어린 시선으로 오래 지켜봐 주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 그 감정의 리듬은 더 유연하고 깊게, 자신다운 모습으로 자라난다.

작가의 이전글감정 인문학 10 : 정서의 겉과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