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인문학 17 : 아무도 묻지 않아서 남겨두는 말

by 수안


누군가로부터 예상치 못한 의외의 질문을 받을 때, 잠시 머뭇거리거나 생각이 정지선에 멈춘 듯 버퍼링이 걸릴 때가 있다. 대답을 고르기 전에, 먼저 마음의 위치부터 느끼게 되는 것일까. 나도 모르는 새 마음의 주름이 펴지거나 밝아지는 곳이 있는지, 괜히 움츠러드는 부분은 없는지. 갑작스럽게 주어진 물음은 일상적인 말보다 빠르게 감정을 건드린다. 그래서 그 질문에 대한 응답은 생각보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올려지기 시작하는 기분이 든다.


상대를 향해 먼저 호기심 어린 질문을 건네는 일보다 질문을 받는 일이 더 좋다고 느낄 때가 있다. 대단히 대답을 잘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관심을 받으며 그 사람의 시야 안에 들어갔다는 감각 때문이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을 굳이 애써 말하지 않아도 확인받는 순간. 그 짧은 온기는 생각보다 오래 여운을 남긴다. 마음의 표면을 가볍게 두드리는 질문 하나를 받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내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알게 된다.


어떤 말은 늘 바로 꺼내질 준비가 되어 있었을지 모른다. 다만 아무 질문 앞에서나 드러나지는 않았을 뿐이다. 어떤 말들은 스스로 나서기보다, 불려 나올 때 비로소 제 자리를 찾는다. 그래서 나는 원래 말이 없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아직 불리지 않은 말들을 안고 있는 사람에 가깝다고 느낀다. 아무도 묻지 않아서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던 말들.


사람 사이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늘 먼저 다가가는 쪽이 있고, 항상 늦게 반응하는 쪽이 있다.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구조는 말만 바뀐 채 되풀이된다. 이런 패턴을 무시한 채 지금 이 순간의 말만 믿는 건 위험하다. 양치기소년의 이야기가 그래서 오래 남는다. 반복된 행동은 신뢰를 잠식하고, 말은 점점 힘을 잃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순간값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패턴은 기억이고, 순간값은 감각이다. 같은 사람이 같은 말을 해도 그날의 공기와 표정, 말이 오가기 직전의 침묵은 다르다. 패턴은 관계의 큰 흐름을 보여주지만, 순간값은 지금 이 장면이 실제로 어떤 온도인지 알려준다. 둘 중 하나만 붙잡으면 관계는 쉽게 단순해진다.


관계를 설명할 때 사람들은 자주 우월 서사를 찾는다. 누가 더 중심이었는지, 누가 더 많이 말했는지, 누가 더 강했는지. 하지만 그런 이야기들은 이상하게도 마음에 오래 남지 않는다. 실제로 남는 건 그날의 거리, 말이 오가기 전의 망설임, 질문 하나에 스쳐 간 감정의 흔적 같은 것들이다. 관계는 서사라는 커다란 줄기에 순간값이 더해진 것에 가깝지 않을까. 그때 누가 질문에 가까웠는지, 누가 대답에 가까웠는지의 차이일 뿐이다.

어떤 순간에는 내가 먼저 빛을 낸다. 말을 꺼내고, 시선을 열고, 중심에 서는 쪽이 된다. 그러다 또 어떤 순간에는 반대로 누군가의 빛을 받아 조용히 드러나는 쪽이 된다. 그 차이가 예전만큼 불편하지 않다. 태양과 달이 자리를 바꾸듯, 질문하는 마음과 대답하는 마음도 늘 같은 자리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빛을 잃은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누군가에 의해 더 밝게 비치며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질문이 상대를 파헤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제대로 알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길 바란다. 그렇다면 주고받는 신호와 반응은 서로의 자리를 확인하거나 조정하기 위한 과정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위치에 있고, 당신은 저기에 있으며, 우리는 이 거리에서 이만큼의 빛을 주고받고 있다는 확인. 이런 분위기로 대화가 오갈 때 생기는 감정의 이동은 아주 미세하다. 기대, 긴장, 안도, 그리고 약간의 부끄러움. 질문 하나에도 이렇게 많은 감정이 겹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관계의 다리 역할을 하는 질문은 함부로 서두르지 않는 편이 낫다. 동시에 질문을 기다리는 마음 또한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한다. 관심받고 싶다는 감정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솔직하다. 누군가의 챙김을 받고 있구나 느껴지는 말 한마디 앞에서 내 마음이 조금 더 맑아지는 경험을, 이제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보고자 한다.


아직 이름 붙이지 않은 마음은 대개 말 한가운데 흐릿하거나,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머문다. 하지만 그 중심이 있어야 감정은 흘러갈 방향을 얻는다. 그 마음에 서둘러 이름을 붙일 필요는 없다. 패턴을 기억하면서도 지금의 순간값을 느끼며. 아무도 묻지 않아서 꺼내지 못했던 말들이 언젠가 불려질 수 있도록 잠시 그대로 두어본다. 어쩌면 너무 소중해서 끝까지 말하지 않기로 선택해도, 그 또한 나의 진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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