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기의 방향
문득 우리가 느끼는 무수한 감정들은 언제, 어떻게, 왜 생겨나는지 궁금해졌다.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까지 흘러가는지, 그 이동 경로를 따라가 보고 싶어졌다. 어떤 감정은 흐릿해지다 쉽게 사라지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감정도 존재한다. 감정의 농도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달라지기도 하지만, 특정한 조건의 변화에 따라 급격히 짙어지거나 옅어지기도 한다. 다만 그 깊이와 넓이는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에 공식처럼 대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서 그저 각자의 감정 패턴을 관찰하며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누군가는 더 많은 지지와 자원이 있는 자리에서 한층 여유로워 보였고, 또 다른 이는 같은 관계 안에서도 조건이 불리해지는 순간 예민해졌다. 겉으로는 태도의 변화처럼 보였지만, 어쩌면 감정이 놓인 환경이 달라졌을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장면을 곁에서 보며 고개를 갸웃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구조를 내 안에서도 발견했다.
감정은 나에게 유리한 조건 위에서는 마치 엔진오일을 채운 뒤의 차량이 언덕을 오를 때처럼 유연하고 부드러워진다. 같은 상황에서도 여유가 생기고, 작은 마찰은 쉽게 흡수된다. 반대로 같은 감정이라도 조건이 불리해지거나 내가 원하는 방향과 어긋날수록 마찰음을 내듯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때 우리는 감정이 변했다고 말하지만, 변한 것은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이 서 있는 자리였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인정받는 자리에서는 같은 말도 따뜻하게 들리고, 조금 더 가능성이 보이는 관계 안에서는 마음이 저절로 오래 머물고 싶어지는 듯하다. 반대로 손해가 예상되는 순간, 감정은 갑자기 방어적으로 변하거나 과열된다.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고 순수하게 느끼고 싶어 하면서도, 감정은 생각보다 현실의 조건에 밀접하게 반응한다.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는 깊어지거나 매끄럽게 흐르고, 불리한 조건에서는 스스로를 줄이거나 날카로워진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감정의 진위를 따지기보다, 그 감정이 놓인 상황을 먼저 살펴보게 되었다. 이 마음이 정말 변한 것인지, 아니면 상황의 경사가 달라졌을 뿐인지. 감정은 스스로 자라거나 축소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미처 인식하지 못한 조건의 영향을 받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감정이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감정이 놓인 상황을 함께 바라보면, 그 감정도, 그 사람도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