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로 놀기 05 : 상상은 장편, 현실은 단편

by 수안

언제부턴가 하루에도 몇 편씩 시나리오를 쓴다.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전, 약속을 잡기 전, 혹은 답장이 늦어질 때마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여러 갈래의 이야기가 완성된다. 오늘은 이렇게 흘러가겠지, 저녁엔 이런 분위기일지도 모르지, 혹시 이런 장면이 펼쳐지면 나는 이렇게 말해야지. 상상은 늘 다작이다. 장르도 다양하다. 로맨스가 되었다가, 약간의 긴장이 섞이고, 때로는 쓸데없이 진지한 독백이 들어간다.


그런데 현실은 늘 의외로 단편이다. “오늘 안 가요.” 그 한 문장으로 영화는 끝난다. 카메라는 갑자기 꺼지고, 내가 준비해 둔 장면들은 등장하지도 못한 채 흩어진다. 예전 같았으면 그 문장 뒤에 또 다른 해석을 붙였을 것이다. 혹시 피하는 건가, 내가 뭘 잘못했나, 다음 장면을 다시 써야 하나. 상상은 상상을 낳고, 이야기의 길이는 자꾸만 늘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아, 그렇구나.” 그리고 나는 도서관에 간다. 책을 빌리고, 따뜻한 빵을 하나 사 먹는다. 영화 대신 내 시간을 고른다. 상상이 길어질 틈을 주지 않는다. 상상은 여전히 멈추지 않지만, 그 안에 내가 쓸데없이 빠져들지는 않는다. 나는 감독이면서 동시에 관객이 된다. 아, 또 한 편 찍었네. 웃고 넘기며 또 다른 일상을 이어간다.


생각해 보면 미래의 시나리오를 미리 써보는 일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식일지도 모른다. 미리 여러 결말을 준비해 두면 덜 놀랄 수 있을 것 같고, 마음이 덜 다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성숙은 어쩌면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상상을 줄이는 데 있지 않고, 상상대로 될 거라고 무조건 믿지 않는 데 있다. 그저 벌어진 장면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게 하루를 다시 배치하는 능력.


상상은 장편이지만, 현실은 대부분 단편이다. 그리고 단편은 생각보다 가볍다. 오늘은 돈도 굳었고, 나만의 여유로운 시간도 생겼다. 누군가의 한 문장으로 흔들릴 줄 알았던 하루가, 의외로 조용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여전히 많은 시나리오를 쓰겠지만, 그 안에 갇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요즘 내가 배우고 있는 적응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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