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인문학 30 : 조건이 있는 감정 04

경계와 온기 사이

by 수안


도시가 차가워졌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의 잘못이라기보다, 분위기처럼 번지는 공기 때문이다. 지인의 이야기였다. 수업을 앞두고 급한 상황이었다고 했다. 카드를 두고 나왔고, 휴대폰은 방전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야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한 발씩 물러섰다고 했다. 경계하는 눈빛이 먼저였다고.

“혹시 차비를 조금만 빌릴 수 있을까요.”

그 말을 꺼내기까지도 긴 망설임이 필요했다고 했다. 도움을 청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를 요구한다.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나는 위험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급한 상황입니다.

잠시만 믿어주세요.


그 말을 눈빛으로 먼저 전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요즘은 대놓고 돈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다며, 그렇게 이해해보려 했다고 했다. 경계는 어느새 생존의 방식이 되었고, 의심은 자연스러운 반응이 되었다. 세상이 험해졌다는 말은 아마 이런 장면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그는 다른 기억을 꺼냈다. 예전에 해외에서 길을 헤매던 날이었다고 했다. 말도 통하지 않았고, 휴대폰도 제대로 연결되지 않았다. 그때 한 사람이 다가와 아무 조건 없이 길을 설명해 주고 지하철 입구까지 함께 걸어주었다고 했다. 그 장면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고. 그리고 얼마 뒤, 우리나라를 여행 온 외국인이 길을 묻자 자신도 모르게 몇 걸음 더 함께 걸어주었다고 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사람은 늘 같은 위치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도움을 건네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예전에 나도 비슷한 순간이 있었다. 잠시 들렀던 편의점에서 어떤 할머님과 마주쳤다. 당황한 표정으로 병원을 가야 하는데 다리가 아프고 택시도 잡히지 않는다고 하셨다. 연세가 꽤 많아 보였고, 어느 병원인지는 아시면서도 가는 길을 조금 헷갈려하셨다. 잠시 망설이다가 차로 모셔다 드렸다. 큰일은 아니었다. 그저 병원 앞에 내려드렸을 뿐이다. 그 일을 남편에게 이야기했더니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걱정이었을 것이다. 혹시 모를 위험을 생각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무모했던 건지, 아니면 세상이 더 조심스러워진 건지 잠시 멈춰 생각했다. 정은 늘 안전한 선택만은 아니다. 그리고 경계는 늘 차가운 마음만은 아니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매번 판단하며 산다. 도시가 차가워진 것은 어쩌면 사람들이 나빠져서가 아니라, 각자가 지켜야 할 것이 많아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작은 온기가 이어진다. 도움을 받은 사람이 다른 자리에서 누군가를 돕게 되는 순간처럼. 정은 거창한 미담이 아니라 위치가 바뀌는 사이에서 조용히 이어지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경계와 온기 사이, 우리는 오늘도 그 경계선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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