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인문학 38 : 익숙함의 착각 03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순간

by 수안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익숙한 것들만 따라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실제로는, 보고 싶은 것만 골라 받아들이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눈은 열려 있지만, 이미 선택된 방향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누군가가 나를 보고 싶어서 바라본다면 나는 그걸 느낄 수 있을까.


같은 무언가를 바라보면서도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하는 이유는 어쩌면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무엇을 보았느냐보다, 무엇을 보고 싶었느냐가 더 깊이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같은 장면을 공유하고도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나는 한동안 꽃을 보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꽃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에 띄는 것들, 이미 알고 있는 것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만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외의 것들은 배경처럼 흘러갔다. 하지만 그것도, 본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저 보고 있다고 믿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익숙한 길을 걸을 때를 떠올려보면 더 분명해진다. 몇 번이고 지나온 길은 더 이상 새로운 정보로 들어오지 않는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실제로는 거의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대신 기억 속에 있는 장면을 반복해서 확인할 뿐이다. 그저 익숙해진 감각 속에서 습관적으로 지나쳐버렸을 것이다.


보고 있다는 느낌은 있지만, 실제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보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새로운 것은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들어오더라도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 그날그날의 공기와 빛은 다른데도, 그 새로움조차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수목원에서 제비꽃 앞에 멈춰 섰던 날, 나는 그 사실을 조금 더 또렷하게 느꼈다. 그 꽃은 이전에도 어디선가 몇 번쯤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까지는 한 번도 특별히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저 지나쳤기 때문이다.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나는 가끔 걸음을 늦춘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조금 더 보려고. 이전 같으면 지나쳤을 것들 앞에서 잠깐 멈춰 선다.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바라볼 수 있도록.


그렇게 잠깐 멈춰 선 순간들 속에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작고, 조용하고, 굳이 눈에 띄지 않아도 되는 것들. 하지만 한 번 보이기 시작하면, 다시는 완전히 보이지 않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른 채,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다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필요한 건 더 많은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고 있다고 믿고 있는 감각을 의심해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고, 무엇을 보지 않고 있을까.

그리고 정작 보아야 할 것들을 너무 쉽게 지나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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