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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경훈 Dec 11. 2022

문경훈의 음주동행(音酒同行) 20

캐럴과 교황의 와인

  칙칙한 회색 도시가 하얗게 칠해지고 그 위에 주황빛 물결이 덧입혀지기 시작했다면 크리스마스가 다가왔다는 신호다. 각양각색의 양말을 걸어두고 오지 않는 잠을 청하는 어린아이들과 그들을 지켜보며 만면에 미소를 띤 부모들, 달콤한 목소리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허연 입김을 뿜어내며 케잌과 칠면조 등의 음식을 손에 들고 바쁜 걸음을 옭기는 사람과 그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창밖을 살피는 가족들, 종교나 문화적 전통과 무관하게 크리스마스는 이 많은 사람들을 설레게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매우 사랑스러운 기념일이다. 어린 시절 난 크리스마스가 한참 남은 몇 주 전부터 트리를 장식하고 캐럴이 잔뜩 담긴 테이프를 재생하곤 했다. 그 시절 받았던 선물도 먹었던 음식도 이제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캐럴은 여전히 흥얼대곤 한다. 아니, 지금도 이맘때면 그래야만 한다는 어떤 의무감이라도 있듯이 캐럴을 듣고 부른다. 그래서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캐럴이다.

  

  캐럴의 사전적 정의는 ‘성탄절(聖誕節)이나 부활절 때에 부르는 민요풍의 종교적 가곡. 15세기 영국의 종교 가곡의 한 형식으로서 생겨나 발전하였으며, 오늘날에는 성탄절을 축하하는 노래 일반을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다음과 같지만 단순하게는 종교적 의미가 담긴 고전 캐럴과 그보다 가사와 멜로디가 자유로운 현대 캐럴로 구분할 수 있다. 우스갯소리로 매년 겨울이면 머라이어 캐리의 지갑을 두둑하게 만들어준다는 94년 4집 <Merry Christmas>의 수록곡으로 예를 들자면 ‘Hark! The Herald Angels Sing’나 ‘Joy to the World’ 같은 곡이 고전 캐럴에 속할 것이고 대표곡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 같은 곡이 현대 캐럴에 속할 것이다. 또 활기참(?)형 과 포근함(?)형으로도 구분할 수 있는데 위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가 전자라면 빙 크로스비(Bing Crosby)의 ‘white christmas’가 후자에 속할 것이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스탠다드 팝의 산실이었던 ‘틴 팬 앨리’의 어빙 벌린이 작사/작곡하고 빙 크로스비가 부른 white christmas의 인기는 전 세계에서 지금까지 가장 많이 팔린 싱글곡이자 오늘날에도 수많은 가수들이 이 노래를 리메이크하고 있다는 점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어빙 벌린은 물론 빙 크로스비는 시내트라 이전 성공한 엔터테이너의 효시인데 그의 크루닝 창법은 팝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가 부른 캐럴 중 ‘i’ll be home for christmas’를 좋아한다. 이번 크리스마스엔 집에 가겠다는, 못 가면 꿈에서라도 가겠다는 애달픈 캐럴은 타지에서 난생처음 혼자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작년 내게 많은 위로가 되었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스탠다드 팝의 전설로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 냇 킹 콜(Nat King Cole)의 목소리를 더 선호한다. 65년 내한하여 아리랑을 부르기도 했던 냇 킹 콜은 무수한 명곡들을 남겼는데 그중 멜 토메-‘재즈란 말이죠’ 영상에서 엘라 피츠제럴드와 스캣을 주고받는 가수가 멜 토메이다.-와 밥 웰스가 만든 The Christmas Song은 냇 킹 콜이 가장 애착을 가진 곡으로 알려졌다. 무더운 여름날 멜 토메와 밥 웰스가 무더위를 이기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 곡은 냇 킹 콜의 감미로운 목소리와 어우러져 크로스비의 white christmas에 비견되는 클래식 넘버가 되었다. 말이 나온 김에, 재즈의 여왕 엘라 피츠재럴드가 1960년에 발표한 <Ella Wishes You A Swinging Christmas>의 수록곡 전부를 좋아하는 편인데 34년 버나드 펠릭스와 리차드 B 스미스가 만들고 여러 가수들에 의해 불리기도 했던 ‘Winter Wonderland’를 빼놓을 수 없다. 엘라의 목소리와 브라스 밴드, 미래를 꿈꾸는 연인들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크리스마스에 알맞다. 다른 노래들도 당연히 훌륭하지만 ‘Sleigh Ride’는 2012년에 펀(fun)이 부른 것을, ‘let it snow’는 2021년의 마이클 부블레의 버전을 더 선호한다.


  winter wonderland의 주인공처럼 미래를 꿈꾸는 연인들이라면 크리스마스에 와인 한 잔을 곁들이는 것이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할 것이다. 과장 좀 섞어서 하루에 한 병씩 마셔도 다 못 마실 수 있을 만큼 와인의 종류가 많기에 이야기하기 조금 곤란하지만 나라면 크리스마스에 CDP(샤토네프 뒤 파프)를 마실 것이다. 샤토(城) 네프(new) 뒤 파프(교황)라는 이름으로 알 수 있듯이 일명 교황의 와인이 CDP와인이다. CDP지역은 남부 론의 아비뇽에서 약 18km 정도 위쪽에 위치한 지역인데, 교황은 왕권과의 대립 속에 로마에서 납치되어 프랑스의 아비뇽에 납치 감금된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약 100년이 좀 못 되는 기간 동안 교황청은 아비뇽에 위치했고(아비뇽 유수) 그때 교황을 위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 가꾸어진 지역이 CDP다. 그렇기에 지금도 CDP 와인병의 대부분엔 교황의 인장이 새겨져 있다. 남부론 지방은 그르나슈, 쉬라, 무르베르드 품종을 주로 재배하며 블랜딩 하여 와인을 만드는데 와인마다 그 비율은 상이하다. 다양한 가격대에 너무나 많은 와인이 있지만 대중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CDP 와인을 몇 가지 추려보자면 이기갈의 CDP, 2022 와인 스펙데이터에 7위로 또 순위에 오른 샤토 드 보카스텔의 CDP, 성 요한이 라벨에 그려져 있는 끌로 생 장 CDP 등이 있다. 스파이시함과 힘있는, 남성적인 캐릭터가 와인 입문자에겐 불호일 수 있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처럼 특별한 날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을까.


  이번 크리스마스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또 연말이고 한 해가 저물 것이다. 원치 않아도 한 살 더 나이를 먹게 될 텐데, 다행히 내년 6월부터 만 나이가 적용된다 하니 우리 모두 1년을 꽁으로 벌게 됐다. 젊어지는 나이를 미리 받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생각하고 모두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길 바란다.     

빙 크로스비. 그는 배우이자 코미디언이며 가수였다, 엔터테이너였고 발달된 마이크 기술을 활용해 크루닝 창법을 정착시킨 훌륭한 가수였다. 본문의 i’ll be home for christmas는 빙 크로스비의 버전도 좋지만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함춘호와 유희열, 고인이 되신 심성락 선생이 연주한 버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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