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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경훈 Aug 29. 2022

문경훈의 역사이야기 3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에 관하여

※ 본 글은 2021년 본교 학생들을 위한 교육자료로 제작한 것으로 다수의 논문과 저서를 읽은 후 나름대로 요약한 것입니다. 참고 논문은 밑에 별도로 공개하겠습니다.


<<이어서>>

▶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에 관하여


  대부분의 현행 중등학교 교과서나 동학농민운동 관련 전시관·기념관 등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을 반봉건·반외세의 근대 지향적 운동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1894년의 농민군 지도층 및 참여계층이 반봉건과 근대를 지향했는지에 관해서는 예전부터 유영익 등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그는 ① 오지영의 『역사소설 동학사』에 실린 ‘개혁조건(폐정개혁) 12조’의 허구성, ② 운동의 최고 지도자였던 전봉준의 포고문이나 공초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교적 사상과 봉기의 근거, ③ 1894년 3월 22일 <무장포고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봉건적 신분질서의 보수 의지, ④ 농민군 지도부가 홍계훈에게 보낸 정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흥선대원군의 추대 등을 근거로 동학농민운동이 절대 반봉건적 성격이나 근대 지향적 성격을 지니지 않았으며, 1880년대 초의 위정척사 운동이나 임오군란과 같은 맥을 지닌 ‘역(逆) 시대적 무장개혁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동학농민운동이 유교적 사상에 어느 정도 기반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듯하다. 1892년 공주집회 당시 충청감사 조병식에게 제출한 <각도동학유생의송단자>에서 교도들 스스로가 ‘동학은 서학과는 다른 것으로 사학(邪學)이 아니라 유불선을 합일한 것으로 유교와 대동소이하며, 우리가 밤낮으로 수도하고 한울님께 축원하는 것은 광제창생과 보국안민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광화문 복합상소 당시 상소문의 내용 중에서도 동학이 유교와 대동소이하고, 향교와 서원을 고쳐 사기(士氣)를 배양해 달라고 요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교조신원운동 당시에는 동학이 유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스스로 강조했는데, 교조의 신원과 조선 정부의 탄압 중지라는 목적을 고려한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것들이라 사료된다.


  한편 1893년 1월 10일 전봉준이 각지에 발한 <창의문>에는 화이론적 세계관에서 비롯된 척왜양과 더불어 ‘왕민(王民)’으로서의 정체성이 돋보인다. 비단 전봉준뿐 아니라 종교적 도리보다는 사회개혁에 무게중심을 둔 남접계 지도층들 다수는 배항섭의 지적대로 ‘자신들을 유생으로 규정하고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드러냈다.     


또한 왜와 서양이 우리 임금을 협박함이 끝이 없는데도 조정에서는 한 사람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니, 임금이 모욕을 당하면 신하가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의리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중략) 저희들은 비록 시골의 미천한 자들이지만, 어찌 왜와 서양이 강한 도적이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여러 대의 왕에 걸쳐 유학을 숭상하는 교화를 입었으므로 모두 말하기를 “왜와 서양을 공격하다가 죽는다면 죽는 것이 오히려 사는 것보다 현명하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국가가 축하해야 할 일이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하략) 3월 26일 ‘동학인문(東學人文)’     


  1894년 무장에서 발포된 <포고문>에도 ‘군신과 부자의 인륜’,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리’ 등이 거론되며 이를 통해 농민군 지도층이 명백히 유교적 사유와 유교적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관련 사료들을 포괄해 볼 때, 1차 농민전쟁 시기 농민군은 유교라는 지배층의 이념을 스스로 내면화하고 그것을 무기로 하였는데, 이는 국왕의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한 것이다. 자진해산 이후 척왜양의 기를 내건 2차 농민봉기 때에도 크게 다르지 않아 기포의 이유를 ‘충군애국’, ‘왜를 배척하고 개화를 배척하는 마음’으로 거론하고 있으며 여전히 동학농민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유교의 그것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윤사순은 동학사상에서 유학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위치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유학적 통치체제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세상을 지향했다는데 동학의 독자성이 있다 보았고, 김상준은 그것을 유교 내부에 내재하던 근대성이 발현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이 농민운동의 지도층들이 가졌던 ‘유교적 성향’과 봉기 이유와는 별개로 주된 참여 계층이었던 농민들이 동학에 관하여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가에 대한 연구도 주목해야 한다. 절대다수가 무식자였던 농민들이 동학경전을 통해 사상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따라서 초기 동학교단은 부적이나 주문, 참언 등을 통해 포교 활동을 벌였다. 『동경대전』의 <포덕문>에 실려있는 것처럼 농민들은 실제로 부적을 태워 마시거나, 그 재를 물에 타 마시면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나는 그 말씀에 감동하여 영부를 받아 그려서, 불에 태운 다음 물에 타서 마셔 보았다. 그랬더니 몸이 윤택해지고 몸에 있던 병이 나았다. (중략) 그러니 낫고 낫지 않고는 결국 영부를 받는 사람의 정성과 공경에 달린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들의 사기 증진과 전투의지 고취에도 탁월한 것이었다.  

   

인배는 부적 한 장을 그려 수탉의 가슴에 붙여 백 보 앞에다 놓고 자신의 심복 포졸에게 총을 쏘도록 하였다. (중략) 연달아 세 번 총을 쏘았는데 하나도 맞지 않았다. 적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부적의 효험을 칭송하였다. 그리고 부적을 옷에다 붙이고 앞을 다투어 강을 건넜다. 


  이와 같은 믿음 덕에 농민군은 관군과의 전투에 두려움 없이 앞장설 수 있었으며, 당시 농민들은 이러한 주술이나 부적을 통한 믿음으로 동학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한편, 선암사의 비결 탈취 사건에서 보이듯이 당시 농민들 사이에는 이씨왕조멸망설, 난리설, 진인출현설 등 참언이 광범위하게 유포되고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1894년 전봉준이 무장에서 기포하자 농민들은 참언의 때가 오고 이씨왕조가 멸망할 것이라 기뻐하며 환영하였다고 전해진다. 농민들은 참언대로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 큰 난리가 일어나고 새 세상이 열린다는 예언을 신봉하였는데, 이때 동학교도가 되어 주문을 암송하면 새 세상에서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해줄 메시아, 진인(眞人)이 동학교도 가운데 나온다고 생각했다. 초기의 동학은 정감록이나 미륵신앙적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는데, 교주인 최제우의 기적 행위에 대한 소문이나 기록에 남겨진 초인적 인물 묘사 등을 보아 당시 농민들은 최제우를 진인(眞人)으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농민들의 인식을 바탕으로 농민전쟁 당시 일부 지도자는 자신을 진인으로 자처하거나, 김개남처럼 이상사회인 남조선(南朝鮮)을 열 새 세상의 왕(開南國王)으로 자처하는 경우도 있었고 혹은 농민들 스스로가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을 진인으로 인식하고 추종하기도 하였다. 또한 새 세상이 새 왕조의 출현만 아니라 이 씨 왕조의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라 인식하는 농민들도 있었으며 그들은 전봉준을 이 씨 왕조의 일족으로 여겼다. 농민들은 동학에 입도함으로써 질병을 다스리고 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지만 더 나아가 새 세상이 오면 관리들의 불법 탐학이 사라지고 그 외 지배층의 불법행위도 없어질 것과 신분 차별이 없어질 것을 기대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을 바라보는 박노자와 하원호의 의견 차이도 주목된다. 하원호는 2003년 『역사비평』에 게재된 「역사는 배반하지 않는다.-박노자의 ‘한국근대 인식’ 비판-」에서 박노자가 농민군이나 의병 전쟁에서의 반외세 투쟁이나 변혁지향을 보지 않는다고 비판한 바 있다.     


  계몽론자들이 ‘국민’이란 수사를 장식하기 위해 만든 사회적 약자로서 전통적 종교인에 대해서는 애정을 가지면서 사회의 절대 다수이자 외세의 침탈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회변혁을 위해 행동하고 사고하던 직접 생산자이고 가장 사회적 질곡에 대한 시달리던 농민에 대한 애정은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혹시 농민전쟁을 전봉준의 발언을 문제 삼아 유교적 근왕주의 운동이라고 보는 어느 보수 학자의 말을 그대로 믿은 탓일까? 전봉준의 사고방식을 문제 삼는 그 학자에게 대다수 농민의 사회적 모순에 대한 저항이 보이지 않았듯이 박노자도 마찬가지 인식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 (하략)     


  이에 박노자는 당대비평에서 「내가 동학을 사랑하는 방법 ‘하원호의 비판’에 대한 또 하나의 답」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였다. 하원호가 이름을 거론하진 않았지만 에둘러 비판한 유영익의 엄격한 자료 비판과 연구 자세는 ‘속류 진보주의자’보다 더 믿음직하며 유영익의 연구대로 농민군 측의 입장이 ‘조선 왕조에 대한 기본적인 충성이나 전통적 토지 제도에 대한 인정 등’이 거의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농민군’(말이 좋아서 ‘농민군’이지 실제로 서로의 조절도 잘 안 될 때가 많았던 여러 지역적 부대)의 투사들 중에서 부농, 중농들도 많았다는 사실, 그 일선 지도자들 중에서 역시 부농층이나 잔반층 출신자들이 많았다는 사실, 대원군의 사랑방에 드나들었던 시골 유학자 전봉준이 설령 빈농처럼 가난했다 해도 조선 사회의 신분적, 담론적 구조에서 결코 ‘소작인’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 유교 경전의 여러 이상들과 사상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토지 분작/균작’ 이야기를 설령 소작인의 소망에 부응하려는 일부 농민 지도자들에게 들을 수 있었다 해도(그것도 자료적 근거가 충분한 것이 아닌 듯하다)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려는 진정한 시도란 집강소들에 의해서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사실 등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망각한다면 이것이 사학자에게 허용되는 ‘현재성’의 한계선을 훨씬 넘는, 우리의 이야기를 잘못하면 ‘허구’로 만들 수 있는 일이다.     


  또한 동학농민운동을 서구의 잣대-근대로 나아가는 부르주아 혁명-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필요한 일도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서구의 ‘부르주아 혁명’의 잣대로 원칙상 재단될 수 없는 유교적인 농본주의적 관료 정치 사회에서의 종교 이상주의적, 왕조 말기 변혁 운동적 성격의 농민봉기를, 우리가 왜 하필이면 서구적 ‘부르주아 혁명’과 같은 색깔로 칠해야 하는가? 동학 투사들을 ‘우리의 투쟁 영웅’으로 보는 데에 대해서 필자도 반대가 없지만 그들이 결코-우리가 통상 서구적으로 생각하는-‘근대화’나 ‘부르주아 혁명’의 영웅은 아니었음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중략) ‘피지배층의 저항’이라면 그것이 무조건 ‘진보적인’ 것이며 사회주의로 향한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식의 많은 이들의 ‘속류 진보주의적’ 역사관을 뜯어고치는 데에 농민의 보수성에 대한 엥겔스나 레닌의 지적은 크게 유효할 것이다.     


  끝으로 박노자는 본인이 동학을 사랑하는 방법은 ‘있었던 그대로 귀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라며 독자들에게 당부한 후 글을 마무리하였다.


  위와 같은 제 입장들을 충분히 살펴보았을 때 과연 동학농민운동이 근대지향적 혹 반 근대지향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명쾌히 이야기할 수 있을까. 어쩌면 박노자의 주장대로 우리가 동학농민운동을 바라보는 방식이 ‘서구의 잣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성찰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세계사의 경험에 따르면 중세 말에 일어난 급진적 민중에서도 민중들은 대체로 지배 이념을 전유하는 방식으로, 혹은 지배층이 알아들을 수 있는 그들의 언어로 자신들의 불만을 요구하거나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토지소유나 경제적 문제만 아니라 특히 신분차별에 대한 반대와 평등지향, 민법이나 형법 등 법적 질서 등을 동시에 고려”하기 때문에 유영익이나 조경달의 주장처럼 1894년의 농민운동을 ‘반 근대적’ 성격으로만 규정하기에는 곤란함이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역사학계의 분위기대로 근대를 지향하는 민중으로 농민군과 동학농민운동을 이해하는 것 역시 능동적 행위자로서 민중이 부정당하고 근대를 지향하는 것으로 왜곡된 역사상이 구축될 수 있어 부당한 것이다.


  ‘근대 지향적’인 시선 안에는 서구의 근대를 따라잡아야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서구·근대 중심적인 사고가 깔려있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 중심주의의 비판이나, 한국사의 독자성에 대한 이해 그리고 오히려 민중운동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어렵게 만든다. 근대 중심주의에서 기인한 내재적 발전론은 한국사가 세계사와 동일한 길을 밟으며 전개됐다는 것을 드러내지만 한편으론 한국사의 전개 전개과정이 서구에 비해 뒤쳐진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음이다. 따라서 ‘근대’라는 화두에서 벗어나 그 당시 민중들의 다양한 의식, 삶의 군상을 복원하는 것이야 말로 풍부한 역사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고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 후기 토지의 소유구조나 매매 관습을 토대로 동학농민운동을 ‘근대’를 지향하지도, ‘반근대’적이었다고도 설명할 수 없다는 배항섭의 지적은 곱씹어봐야 한다.


※ 참고문헌

유영익, 「동학농민운동의 기본 성격」, 『한국사 시민강좌』 40(서울, 일조각, 2007)

배항섭, 「동학농민전쟁의 사상적 기반과 유교」, 『역사학보』 236(서울, 역사학회, 2017), 11쪽.

배항섭,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내재적 접근」, 『역사비평』(서울, 역사비평사, 2015), 160-161쪽.

「오하기문」, 『사료대계』 1, 217-218쪽.

이희근, 「1894년 농민전쟁기 농민의 東學에 대한 인식」, 『한국근현대사연구』 5(서울, 한국근현대사학회, 1996), 17쪽.

 『남유수록』, 47쪽.

하원호, 「역사는 배반하지 않는다-박노자의 ‘한국근대 인식’ 비판-」, 『역사비평』(서울, 역사비평사, 2003), 386쪽.

박노자, 「내가 동학을 사랑하는 방법 -‘하원호의 비판’에 대한 또 하나의 답」, 『당대비평』(서울, 생각의나무, 2004), 70쪽.

배항섭, 「동학농민군의 지향 : 근대인가 반근대인가?」, 『내일을 여는 역사』 55(서울, 내일을여는역사재단, 2014), 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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