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 순으로 보는 동학농민운동의 전개과정
※ 본 글은 2021년 본교 학생들을 위한 교육자료로 제작한 것으로 다수의 논문과 저서를 읽은 후 나름대로 요약한 것입니다. 참고 논문은 밑에 별도로 공개하겠습니다.
<<이어서>>
▶시기 순으로 보는 동학농민운동의 전개과정
19세기 세도정치 하에서 자행된 지방관의 탐학과 구조적 모순으로 고통받던 농민들의 봉기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1862(임술)년에 일어났던 전국적인 농민의 봉기는 비록 토지에 긴박 돼있던 농민반란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으나 앞으로 이어질 대규모 농민운동의 전초를 예고한 것이었다. 이후 벌어지는 19세기 말의 농민항쟁은 당시 동학의 교세 확장으로 인해 관이 동학을 따르지 않는 농민 역시 동학도로 몰아 위협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좋든 싫든 동학과 함께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1869~71년 네 차례의 변란을 주도한 ‘이필제의 난’이 변란이 동학과 결합된 최초의 사례인데, 이필제는 사전에 계획한 남해봉기가 실패하자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과 결탁하여 1871년 3월 영해 관아를 습격하였다. 이필제와 동학 조직의 결탁은 오래가지 못하였고 이후의 변란 시도는 모두 실패했지만, 이필제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생산 대중과의 결합이 부족하여 한계 상황에 직면했던 변란의 주모자들이 동학과의 제휴를 통해 돌파구를 찾았던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필제와 마찬가지로 이 당시 특별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 동학을 하나의 수단 내지 가능성으로 보고 동학교도로 입도하는 일이 많았는데, <동경조일신문>에 실린 심문 내용에서도 전봉준이 입도한 이유를 ‘동학이 용무지지로써 결당 가능성’ 때문이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으며 2대 교주 최시형이 문답하는 자는 많으나 ‘도를 아는 자가 드물다’며 탄식했다는 사실이 그러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892년 무장(현 고창) 지역의 동학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선운사 도솔암의 비결을 탈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선운사 도솔암 절벽 속에 용담선사의 비결이 있었는데, 그 비결을 얻으면 새 세상이 열린다는 소문이 당시 민중들 사이에서 무성하였다. 그리하여 무장의 손화중포(孫和中包)에서 선운사를 습격하고 비결을 탈취하였는데 이를 통해 동학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힘을 일반 민중이 목격하게 되었고 새 세상을 열 대안이자 지친 현실의 의지처로서 동학이 주목받게 된 것이다.
아, 호남 사람들은 재주가 있으나 천하게 되어 원망이 깊어져 거의 죽게 되었다. 간민사란자들은 이를 빌미로 선동하자 동학당에 귀의하는 자들이 마치 시장에 몰려가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우도로부터 좌도의 산골짜기까지 동학도가 없는 고을이 없었는데 그 수가 수십만이나 되었다. 이들은 ‘무장의 산골 절벽 속에서 용담선사의 참결을 얻어 난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으니 때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유언비어를 사사로이 전파하여 계사년 2월 호서의 보은현에 모두 모이게 하였다.
「오하기문」 수필, 역사비평사, 1994, 46쪽.
황현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를 계기로 동학에 입도하는 자가 급증하였고, 동학은 조선 사회의 변혁을 추구하는 유력 조직으로 대두되었다. 이 지점에서 교조신원(敎祖伸冤)은 동학 조직을 민중운동의 장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작용하였다. 1892년 서일주는 최시형에게 제안한 대규모의 교조신원이 거부당하자, 10월 휘하의 교도들과 함께 공주에서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요구하였고 이것이 공주집회라 불리는 것이다. 동년 11월에는 삼례에 동학교도들이 모여 최제우의 신원을 탄원하였는데 이 역시 서인주, 전봉준 등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 무렵부터 교조 신원과 포교에 중점을 둔 온건 남접계와 관리와 토호들의 탐학과 수탈 제거 등에 관심을 보인 강경 북접계의 차이가 분명해지기 시작했고(“호남취당은 우리와 비슷해 보이지만 종류가 다르다. 통문을 돌리고 방문을 게시한 것은 모두 그들의 소행이다.” 「취어」, 『총서 2』, 29쪽.), 남접계는 삼례집회 이후에도 독자적인 행동을 계속 이어나갔다.
관의 탄압이 계속되자 최시형은 12월 6일 복합상소 논의를 위한 도소를 보은 장내리로 정하였다. 이에 동학교도들이 장내리로 몰려들었고, 들어오지 못한 이들도 자신들의 지역에서 집회를 진행하였다. 최시형의 결심으로 서울에서의 복합상소가 진행되는 동안 서인주 등의 남접계는 한양에서 괘서를 통해 척왜양을 부르짖고 있었다. 이러한 척왜양 운동은 지방에도 이어져 1893년 3월 경에는 부산, 보은을 비롯하여 충청도와 전라도 각지에 ‘척왜양’과 서울 공격을 주장하는 괘서가 나돌았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남·북접의 구분은 물론 복합상소의 주도층과 척왜양운동의 주모자를 모두 동학이라는 이름으로 묶어 대상화해버렸고 탄압을 이어갔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충청도의 보은과 전라도의 금구 원평에서 동시에 집회가 벌어지게 되었는데 최시형은 서인주 등의 요구를 수용하여 3월 10일 교도들에게 보은으로 모이라는 통문을 보냈다. 통문을 발하고 하루 남짓한 시간만에 보은 장내리에는 수많은 교도들이 몰려들었는데 이들은 사실상 최시형의 통문과는 별도로 호남취당의 지휘하에 모인 것으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깃발을 걸고 전투대형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이때 금구 원평에서는 전봉준 계열이 주도하는 대중 집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금구 원평은 당시 장시가 열리는 큰 마을에 속했고 지형의 특성상 사람들이 모이기 유리했으며, 지도층 주요 인사였던 김개남과 최경선 등의 고향과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전봉준이 주도한 원평집회는 보은 집회보다 현실대응적 성격이 강한 강경집회였으며, 반외세 정치운동으로 유도된 보은집회를 후원하는 성격의 집회였다. 전봉준 등을 중심으로 한 지도층은 서울진격을 목표로 보은집회 참가세력의 동참을 꾀했으나 북접계의 반발과 양호선무사 어윤중의 효유로 결국 차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즈음부터 북접계는 전봉준을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교도들이 임의로 대중운동에 참가하는 것을 금했다.
1893년의 2차 보은·원평집회가 해산된 후, 1894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현 정읍 고부면) 지역에서는 탐관오리 조병갑의 횡포로 인해 분노한 농민들이 고부 관아를 습격하고 만석보를 헐어버렸는데 동학농민운동의 시발점이 된 고부 민란이 이것이다. 당시 조선 정부는 이에 놀라 이용태를 안핵사로 파견하게 되는데 이용태는 도리어 관아를 습격한 농민들과 그 가족들까지 잡아들여 고문하고 살육하는 등 가혹한 탄압을 시행하였다. 이에 농민군과 전봉준 등 지도층은 3월 13일 무장으로 피신하였고 그곳에서 무장 대접주였던 손화중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1894년 3월 20일 전봉준을 대장으로 하는 농민군이 무장(현 고창)에서 거병을 선포하니 이것이 1차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다. 무장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창의문을 발표하고 23일 고부를 점령, 25일에는 백산으로 이동하여 농민군 진영을 확대 개편하였다. 이 무렵 ‘호남창의대장소’라는 이름의 격문을 발하여 일반 민중의 호응을 촉구했고 4대 명의(名義)와 행동강령 12개조를 정하였다. 4월 7일 황토현(현 정읍)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나아가니 정읍, 흥덕, 고창, 무장, 영광, 함평 등을 차례로 점령해 나갔다. 농민군은 4월 23일 장성 황룡촌에서 양호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부대와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마침내 27일에는 전라 감영이 있던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농민군의 기세가 이와 같았기에 당시 조선 정부는 외국에 원병을 청하였는데, 외세 개입을 막고자 5월 7일 농민군은 조선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이튿날 자진 해산하였다. 해산한 농민들은 각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 활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984년 6월 21일,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되고(갑오변란) 곧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9월 12일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의 지도층은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재봉기하게 되니 2차 동학농민운동이 이것이다. 2차 봉기에는 1차 봉기에 응하지 않았던 충청, 강원, 경기, 경상도의 동학교도와 농민들도 참여하였으며 교주 최시형과 온건 북접계 역시 휘하 교도들을 이끌고 10월 14일 논산에서 전봉준군과 합류하였다. 농민연합군은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공주로 향했고 관군과 일본군은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공주 우금치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해 둔 상태였다. 10월 23일부터 25일까지,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두 번에 걸친 치열한 대접전이 이어졌으나 극복할 수 없는 무기의 열세 앞에 농민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채 패하고 말았다. 다른 지역에서도 소규모의 항전이 지속적으로 일어났으나 청주에서 김개남 부대가 패퇴하는 등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결국 12월 2일 순창에서 전봉준이 체포되고 곧이어 손화중 등 주요 지도층이 체포되고 북실, 대둔산에서의 최후 항전이 진압되면서 결국 동학농민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 참고문헌
우윤, 「1892~93년 동학농민운동의 전개양상과 성격」, 『충북학』 5(충북, 충북연구원,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