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경훈 Aug 26. 2022

문경훈의 역사이야기 1

'동학농민운동'을 둘러싼 명칭 논쟁

※ 본 글은 2021년 본교 학생들을 위한 교육자료로 제작한 것으로 다수의 논문과 저서를 읽은 후 나름대로 요약한 것입니다. 참고 논문은 밑에 별도로 공개하겠습니다.


  1894(갑오)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뒤로 어느새 200년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성격을 달리 표현할 수 있겠지만, 굶주림과 두려움 속에서 고통받던 수많은 민초들이 벌 떼처럼 들고일어났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동학농민운동은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고 있을까, 혹자는 현대 민중사에 큰 족적을 남긴 2016년 촛불 혁명의 시원으로 바라볼 것이며, 또 혹자는 전근대 농민운동의 한계를 안은 실패한 운동으로 바라볼 것이며 누군가는 그렇고 그랬던 수많은 농민 반란 속에 하나로 치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절망에서 기인된 세계적 경제 위기 속에서 의외로 ‘동학 개미’라는 표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는 점과 오늘날의 ‘동학 개미’가 200여 년 전 변화를 꿈꾸던 민초들의 연장선상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동학과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공부는 분명히 필요한 일일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쓰인 이 글은 10박 11일간 동학이라는 주제로 답사를 떠나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다. 기왕지사 조선 후기의 사회구조와 세계사적 동향, 동학의 시원 등을 망라했다면 좋았겠지만 시간의 한계와 우둔함으로 인해 단지 동학농민운동을 바라보는 최근 역사학계의 제 입장들을 어렵지 않게 정리하는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 동학농민운동을 둘러싼 명칭 논쟁


  1960년의 4·19 혁명과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광주 민중 항쟁)이 한때는 각기 이승만 정권과 전두환 정부로부터, 그리고 그들을 옹호하는 일부 보수 학계에 의해 폭동으로 불렸단 사실과 1961년 5·16 군사 정변을 혁명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전히 제기되며 종종 논란을 빚는 것은 역사에서 용어·명칭의 문제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지칭하는데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역사에서 사건의 명칭은 그 사건이 내재하고 있는 의의나 지향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명칭이 결정되는 데는 역사가 개인의 선호나 가치관은 물론 그 시대의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가치관이나 인식이 녹아있는 것이고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1894년 당시 농민군 측은 스스로의 행위를 ‘의거(義擧)’로 인식했다. 이른바 <무장 포고문>에서 ‘위급함을 좌시할 수 없어 … 의기를 들고 보국안민을 위해’ 일어났다고 표현한 것이나 백산대회 때의 <창의문>에서는 ‘우리가 의(義)를 들어(擧) 이에 이른 것은…’라고 목표를 천명한 것, 2차 봉기 때 스스로를 의병이라 칭한 것 등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반면 당시 지배층들은 동학을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사교라 칭하며 농민군을 동적 혹은 동비로 표현했다. 고로 1894년의 농민봉기를 ‘동비(東匪) 혹은 동적의 난(亂)’으로 규정하고 동학의 수괴를 체포하면 난이 진압될 것이라 보았다. 당시 주된 참여계층이 농민들이었음에도 지배층이 그들을 동비 혹 동적으로 규정한 것은 당시 부패했던 지방관들이 자신의 책임을 감추려는 의도로, 동학을 강조함으로써 농민전쟁을 사교에 의해 일어난 특수한 사건으로 폄하한 것이다.


  농민전쟁을 역사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1910년 이후에 동학농민운동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동학당(東學黨)의 난’으로 지칭되었다. 굳이 ‘당(黨)’이라는 글자를 집어넣은 것은 당파성론으로 한국사의 전개과정을 설명하려던 식민사학의 연장선이었다. 반면에 동시기 민족주의사학자들은 동학농민운동을 단순히 종교전쟁이 아니라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던 민중운동 내지 평민혁명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으며 사회경제사학자들 역시 ‘폭동’이라는 용어로 표현하긴 했지만 타국의 농민전쟁과 같은 성격의 운동이었다고 이해하였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역사학계에 민족주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식민사학을 극복하기 위한 ‘내재적 발전론’이 대두되었고, 동학농민운동은 ‘근대 지향적인 동학사상’을 바탕으로 발발한 자주적 근대화 운동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동학‘혁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서구의 시민혁명(부르주아 혁명)에 버금가는 것으로 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으며 운동의 성격 역시 단순히 근대 지향적이었다고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박정희 정권 역시 동학농민운동을 혁명으로 규정했는데, 그것은 군사 쿠데타를 동학혁명의 연장선에 위치시키고 계승을 표방함으로써 혁명을 미화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제5공화국 출범 이후에는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고조됨에 따라 혁명이라는 용어 대신 ‘동학농민운동’으로 표현하게 되었는데, 이는 말 그대로 ‘무미건조하고 애매한 용어로 윤색된 것’이었다.


  1980년대 민주화의 바람 속에서 민중에 대한 주목이 이루어지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동학농민운동을 ‘갑오농민전쟁’, ‘1894년 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등 농민전쟁으로 개념화하려는 작업들이 이어졌다. ‘갑오농민전쟁’이나 ‘1894년 농민전쟁’은 동학을 종교적 외피로써 인식했기에 동학 대신 연도를 지칭한 것이며, ‘동학농민전쟁’은 그보다는 동학이 차지했던 역할이나 위치의 중요성을 부각한 것이다. 그러나 동학농민운동이 봉건적 제도의 청산뿐 아니라 외세에 대항한다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었던 만큼 앵겔스가 이야기했던 1525년의 농민전쟁론으로 동학농민운동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최근 역사학계의 동향은 농민전쟁론의 관점을 취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여전히 건설적인 논쟁이 필요한 상황이다.


※ 참고문헌

배항섭, 「동학난에서 농민전쟁으로」, 『내일을 여는 역사』(서울, 내일을여는역사재단, 2004)


<<계속>>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