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 겨울, 나는 잘렸다.

퇴사 후에 오는 것들 #1

by 곶사슴


서른,

포털사이트 메인에 소개되는 사람들은 억대 연봉을 받다가 자신의 꿈과 비전을 놓칠 수 없어 회사를 박차고 나오는 나이라지만, 나는 코딱지만한 회사에서 쥐꼬리만한 월급을 월급날 정확하게 받지 못해 찔끔찔끔 밀리면서 받다가 결국 방출 통보를 받게 되었다.


회사는 13억 원을 투자받았다.

마침 두 번이나 동결되고 지나간 연봉협상이 찾아올 시기라 기대하는 바가 매우 컸다. 우리 팀은 회사의 투자 IR에 필요한 자료 - 이미지, 글, 영상 등등을 만들어 주고 투자자들이 회사를 검색하면 바로 긍정적인 소식을 볼 수 있도록 보도자료를 언론사에 뿌리는 일을 하고 있었다. 회사 사정이 어렵다 보니 모종의 이유로 무너져버린 영업파트의 일도 돕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을 빠뜨리지 않고 하면서 '광고비 한 푼 지원받지 못하는 마케팅 팀' 치고는 소소한 성과도 그럭저럭 내고 있었다. 곧 투자가 마무리되면 '마케팅 비용을 팍팍 지원받는 마케팅 팀'이 될 테니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회사와 서비스를 알릴 것인지 설계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져 야근을 해 가면서 필요한 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연봉협상 기간에 퇴사 통보를 받게 되었다.


사실인지 알 길은 없지만, 투자자는 투자를 해주는 조건으로 회사 구조조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소프트웨어를 파는 회사에서 개발자들에게 손을 댈 수 없었을 테니 잘라도 당장 지장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찾다가 선택된 것이 나였을 것이다.


마침 투자를 담당해 구국공신이 된 투자 담당 이사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을 자신이 맡아보고 싶다며 강력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글을 쓰고 싶단다. 글 쓰는 센스는 둘째치고 기초적인 맞춤법도 자주 틀리던 사람이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일은 쉬워 보이는 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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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이후의 마케팅 방안을 설계해 오라고 하던 대표는 회의실로 나를 불러 이제 그 일을 저 이사가 담당하게 되었으니 나가라는 이야기를 빙빙 돌려서 말했다.


"정말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저 사람이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닌데, 본인이 밤을 새워서라도 하겠다고 하시네요."


누군가가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닌데'라면서 문장을 시작한다면 십중팔구 발생할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적이 없다는 뜻이다. 그보다, 내가 하던 일을 경험이나 지식이 없어도 '밤을 지새우는 노오오력을 한다면' 아무나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뚜렷한 증거였다. 더 이상 나의 존재와 지금까지의 성과를 어필하거나 그가 그 일을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대다수의 다른 직원들은 연봉 동결 통보를 받았다. 나를 포함해 이미 두 번이나 밀린 직원도 있었다. 그 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했지만 대표는 그렇게 화를 내는 것은 평가받는 사람의 태도가 아니라며 오히려 그를 나무랐다고 한다.


평가란 무엇인가.


표준국어대사전은 '물건값을 헤아려 매김, 또는 그 값. / 사물의 가치나 수준 따위를 평함. 또는 그 가치나 수준.'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디에도 평가의 방향이 일방적이라는 설명이 쓰여있지 않지만, 누군가의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주 그 사실을 잊어버리는 모양이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돈과 시스템을 쥐고 움직이는 사람은 그들이었다. 직원이 아무리 강력하게 주장해도, 설사 그 말이 맞는 말일지라도 등기이사를 이길 수는 없다. 회사란 그렇다. 아니, 세상이 그렇게 공정하게 굴러가지 않는다. 서른 살쯤 먹었다면 당연하게 타협해야 하는 사실이었다.


결국, 지금까지 하고 있던 일의 주인이 내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이들은 기업의 족장과도 같은 준재에 의해 볼모로 잡혀 있으면서도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중략)
운전자들이 급작스레 방향을 선회하며 계약 조건을 바꿀 때 당신은 따를 수밖에 없다. 선회한 방향이 도산이나 과실 책임으로 향하는 절벽일 경우 그 가라앉는 배는 당신 것이 된다. 정말로 이러한 관례를 맺고 싶은가?

엠제이 드마코 - 부의 추월차선


풍랑을 만났을 때 배가 너무 무겁다며 선원을 바다에 던지는 선장,

나는 그동안 일하면서 회사로부터 받은 것이 월급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동안의 고생에 대해 아무것도 보상받은 적이 없는데 영문도 모른 채 바다로 던져지고 있었다. 이런 선장 밑에서 계속 있는다고 해서 언젠가 내가 보상이라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결론 내리기로 했다.


언제까지 나오냐고 물어보니 내일까지 나오시라는 의외의 답변을 들었다. 구질구질한 기간이 없어서 좋긴 하지만 이렇게 아무 대책 없이 나가도 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 남아 담당자의 부재를 온몸으로 맞이할 남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조금 걱정이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