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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곶사슴 Jul 01. 2020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하다.

나는 왜 커피를 좋아하는가


현대인은 밥심이 아니라 컾심으로 살아간다.


아침밥을 먹지 않아 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커피를 마시지 않아서 시체처럼 움직인다고 표현하는 사람이 더 많다. 아침을 먹으면 속이 부대껴서 먹지 않는다는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늘어만 간다.


나도 그렇다.


커피 맛에 조예가 깊어 전 세계의 커피 품목과 그 특성을 달달 외우는 정도는 아니지만,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하루 종일 비몽사몽하고 카페인 중독 증세로 두통이 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말이지 커피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늘 잠들어 있어야 하는 불치병에 걸렸는데 세계 각지의 커피 농장에서 일하는 커피 노동자들의 정기를 받아 제정신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커피 중독은 카페 아르바이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커피 노동자로 일해온 나는 대충 에스프레소 머신도 다룰 줄 알겠다, 커피를 베이스로 한 이런저런 음료들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커피에 대한 공부를 조금만 더 하면 바리스탄지 뭔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근자감에 빠져버렸다.


나는 고기를 먹으면서도 이 부위가 항정살인지 갈매기살 인지도 구분을 못 하는 사람이다. 상황이 그러하니 커피 향을 맡고 홀짝 들이킨 뒤 “역시 브라질 산토스 지방에서 난 원두라 산미가 강하면서도 바디감이 풍부하군요!” 뭐 이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하면 듣고 있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하는 신비로운 커피의 세계를 동경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사 먹어 보았다. 커피는 핸드드립으로 내려 먹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라 가장 저렴하면서 있어 보이게 커피를 내려먹는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커피에 대한 나의 애정은 딱 그 정도였다.


대충 산미가 어떤 맛이고 바디감이라는 것이 어떤 느낌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알아가게 되니 어디 가서 커피에 대해 아는 척을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어째선지 이쪽 세계에서는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의심해야 할 만한 상황만 자꾸 생겨났다. 내가 전에 다른 곳에서 먹어본 케냐 AA는 이런 맛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다른 집에서 먹은 것은 또 다른 맛이 나고, 내가 알기로는 산미가 풍부하다고 알고 있는 커피가 어느 곳에 가니 산미에 별 다섯 개 중 하나만 찍혀있다던가...


똑같은 커피도 어떻게 로스팅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고, 같은 지방에서 나는 커피라고 해도 농장에 따라 맛이 또 달라지며, 추출 방식이나 가공 방식에 따라서 또 맛이 달라진다는 게 커피 전문가들의 설명이었다.

만드는 사람도 무슨 맛이 날지 모른다는 소리를 있어 보이게 하는 것 같은데...


가뜩이나 민감하지 않은 입맛에 먹거리에 대한 탐구심이 부족한 나는 쉽게 커피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더 이상 커피의 종류를 따지지 않게 되어서 이 집 커피가 내 취향인가 아닌가 정도의 애매한 감상만이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습관과 카페인 중독은 여전히 남아 아침에 눈을 뜨면 주방으로 비적비적 걸어가 물을 끓이며 커피 그라인더를 열심히 돌리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와인바 사장님과 인터뷰를 해야 할 일이 생겼다. 하고 많은 장사 종목들 중에서 굳이 와인을 선택한 이유가 있는지를 질문했다. 으레 그러하듯 평소에 와인에 관심이 많았다는 재미없는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진취적이고 건설적인 청년 사업가 이미지를 뿜 뿜 뿜어대던 와인바 사장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연히 GDP에 따라 그 나라의 주류 문화가 바뀐다는 글을 읽었어요. 사람들 소득 수준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커피 문화가 형성되고, 그 이상의 선을 또 넘어가면 와인 문화가 주류가 된다는 이야기였는데요.”


와인에 대해서는 1도 모르지만 카페 문화에는 제법 일가견이 있던 나는 어느샌가 그의 말을 집중해서 듣고 있었다.


“10년 전만 해도 카페에 가는 일이 좀 특이한 행동이었잖아요. 무슨 커피가 밥보다 비싸냐는 둥... 남자끼리 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그런데 요즘은 주말의 카페에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익숙한 문화로 굳어지게 됐죠. 그리고 이제 슬슬 사람들이 와인이라는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와인바 프랜차이즈 몇 개가 성공하기도 하고요. 우리도 그 GDP선을 넘어간 거죠.”


나는 우리나라 GDP가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커피 문화의 중심에 다다르는 것에 끝내 실패했는데, 이 진취적인 사장님은 이미 커피를 넘어 다음 단계의 유행을 찾고 있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와인에 대해 잘 몰랐지만, 앞으로 대 유행하게 될 것을 직감하고는 조사하고 공부해 창업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명이었다.


여전히 커피를 습관적으로 소비하지만 그 행동의 맥락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 나는 여전히 그가 말한 커피 문화에 해당하는 GDP의 세계보다 낮은 인식 수준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이상한 패배감 같은 것이 드는 것이었다.


제법 신선한 충격을 받았지만 그때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원두를 파는 카페를 돌아다니며 겨우 모닝커피를 주섬주섬 챙겨 먹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와인의 세계에는 여전히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커피가 떨어졌다.


뭐라도 내려 먹어야 다음날 오전에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급히 가까운 로스터리 카페를 검색해 찾아갔다. 처음 가보는 낯선 카페는 한쪽 벽면을 세계 각지의 커피 병으로 채울 정도로 많은 종류의 커피콩을 파는 가게였다.


한참을 바라보다 적당히 익숙한 이름의 커피를 찾아 달라고 하니 사장님은 처음 보는 손님인데 왜 이 커피를 고르셨냐는 질문을 해 왔다.


왜 좋아하더라.


나는 그냥 내일 내려먹을 커피를 사러 왔을 뿐인데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걸까.


잠깐 생각하다가 아침에 무난하게 먹을 수 있는 부드러운 종류라 골랐다고 대답했더니 그런 애매한 감상 말고 맛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부드럽다는 평가는 맛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식감에 대한 평가라고 생각하신 걸까.


나는 그냥 내일 내려먹을 커피를 사러 왔을 뿐인데 왜 압박 면적을 받고 있는 걸까.


“어... 음... 산미가 강하지 않아서 좋아해요.”

“뭐어! 이 커피의 산미가 얼마나 풍부한데! 한 잔 내려드릴 테니 먹어봐요!”


나는 그냥 내일 내려먹을 커피를 사러 왔을 뿐인데...


“어때요?”

“음! 맛있네요.”

“아니 맛있다는 감상이 아니라 어떤 맛이 나는지를 말해 줘야지!”



‘맛있다’라는 말에도 수만 가지 표현이 함께 들어갈 수 있는데, 다른 음식과 비슷한 향이 난다고 비유를 들거나 코로 맡는 향과 입에서 느껴지는 맛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설명할 수 있는데, 나는 그동안 커피를 인터넷 글만 보고 거기에 쓰인 기준대로 평가를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름 글 쓴다는 놈이 직접 표현해볼 생각은 커피 콩알만큼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사람들의 소득이 오르면서 커피나 와인을 찾게 된다는 것도, 사람들이 더 다양한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환경이 갖춰지면서 그 안에서 나의 취향을 찾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그냥 맛있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런저런 선택지를 조합해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탐구하고,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데 너는 어떠니?’ 라며 비슷한 취향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결국 커피나 와인의 맛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면서, MBTI 테스트나 심리테스트처럼 나를 표현하는 어떤 것을 열심히 공유하고 나에게 뭐가 나왔냐고 물어보는 친구들이 떠올랐다.


하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며, 왜 그런지 말하는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보다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법이다.



나는 왜 이것을 좋아하는가.

정확한 것이 아니더라도 가깝게 표현할 수 있는 연습을 해야겠노라고,

매일 커피콩을 갈며 생각한다.



... 솔직히 엘 살바도르 원두는 맛이 아니라 이름이 멋있어서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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