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멸망 위원회

그들은 오늘도 지구 멸망을 꿈꾼다.

by 곶사슴


#1


[지구 멸망 위원회]는 커뮤니티 앱에서 서울 변두리에 있는 동네 이름을 입력했을 때 예닐곱 번째로 나오는 평범한 소모임이었다.


딱히 정해진 주기는 없지만, 때가 되면 주인장의 자취방에 모여 맥주를 마시면서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나 힘들다며, 차라리 지구가 멸망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는, 평범하게 살기 힘든 사람들이 모인 평범한 모임.


회원들은 입버릇처럼 한숨을 쉬어야 하는 타이밍에 ‘지구 멸망했으면…’이라고 나지막이 읊조리곤 했다. 그 말에는 묘하게 중독성이 있어서 몇몇 회원들은 모임 밖에서도 그런 말을 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가족이나 친구에게 이런 말버릇 때문에 혼났다는 경험을 이야기하는 회원도 있었다.


다른 소모임이 자신이 얼마나 잘났는지를 이야기하며 이성을 꼬시기 위한 장소로 활용되는 반면, 멸망 위원회는 특유의 음침한 분위기 때문에 새로운 회원이 좀처럼 늘어나지 않았다. 의욕적으로 으쌰 으쌰 하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던 회원들은 다들 한 주 두 주 참여하다가 조용히 자취를 감추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아쉬워하는 회원은 없었다.


회원 수가 4명 정도에서 더 이상 늘지도 줄지도 않게 되자, 주인장은 커뮤니티 앱에서 회원을 모집하는 글을 내려버렸다. 이번에도 아쉬워하는 회원은 없었다.


멸망 위원회는 그렇게 4명이 때가 되면 알아서 모이고 종종 한 명씩 빠지기도 하는, 느슨한 점도로 뭉쳐진 동네 모임이 되었다.



#2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고 있는 시기였다.


분명 더 이상 신입회원이 없어야 하는데, 자취방에는 분명 4명 이하의 사람들이 모여야 하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5명이 모여 있었다.


새로 참여한 사내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이 커뮤니티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소개했고, 회원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렇게까지 그들의 모임에 애착을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고, 그저 누가 자신의 이야기를 좀 들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참여하던 모임이었다. 들어주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어난다고 해서 불편해할 필요는 없었다. 그동안 나오지 못한 것은 사정이 있어서겠지. 적당한 무관심은 적절한 합리화가 되는 법이었다.


그렇게 4명이 자신의 이야기를 차례대로 털어놓았다.


부하직원이 자신을 무시해 상처받았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아무 말도 못 한 이야기,


백수인 기간이 자꾸 길어져서 불안감만 커진다는 이야기,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것에 또 실패했다는 이야기,


열심히 준비하던 사업이 한순간에 파토나서 삶의 원동력을 잃었다는 이야기


톨스토이의 말대로 행복한 모습은 대체로 비슷한 반면 불행한 이유는 각양각색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은 보통 다음 모임에도 크게 변하는 일이 없었다. 분명 지난 모임에서 들은 것과 비슷한데 디테일만 다른 이야기가 매번 이어졌다.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렇다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서로에게 별로 관심이 없으니까. 어찌 되었건 모임의 결말은 ‘지구 멸망했으면’으로 끝났으니까.


누구도 자신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요구하지 않고 섣불리 참견하지도 않으니, 고민을 털어놓는 것까지만 하면 충분했다. 그래서 모임의 시간은 특별히 길지도 않았고, 남녀상열지사도 없었다.


특별히 관계의 진전을 원하지 않는 이에게 이보다 좋은 형태의 모임은 없을 것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날의 신입회원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차례였다.


회원들은 사실 새로운 회원에게 크게 관심은 없었지만 그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니 이제 그의 이야기를 기꺼이, 성심성의껏 들어주겠다는 자세로 그의 입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3


“사실 저는 여러분에게 신이라 불리는 존재입니다.”


분명 사내는 그렇게 말했다.


“맥주 한 캔 드시고 취하시는 분인가 봐요.”


백수 여자가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이름이 ‘지구 멸망 위원회’라 착각하신 모양인데, 저희는 허언증 모임이 아닙니다.”


사업에 실패한 주인장이 정색했다.


사내는 그런 반응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오른팔을 들어 뭔가를 지휘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주인장이 키우는 고양이가 주춤주춤 사내 앞으로 나오더니, 이내 앞발로는 팔짱을 끼고 뒷발을 앞뒤로 움직이며 러시아 전통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겁이 많아 손님이 오면 침대 밑에 숨어있기만 하던 고양이였다.


음악이라도 있었으면 장관이었을 텐데, 적막 속에서 코사크 댄스를 추는 고양이의 모습에 자취방에 모인 회원들은 신기해해야 할지 무서워해야 할지 몰라 벙 쪄 있었다. 사내가 팔을 멈추자 고양이는 두런두런 주위를 둘러보다가 다시 재빠르게 침대 밑으로 뛰어들어갔고, 사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이 별은 저희들의 실험을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그 실험의 가설에 오류가 발견됐지 뭡니까.”


“어떤 실험이요?”


“그건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도 없고, 말씀드린다고 해도 이해하실 수 없는 범위의 일 입니다.


그저 이 별은 실험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고,

실험에 따라 어떤 결과가 나왔는데,

그게 나와서는 안 되는 결과였고,

원인을 따져보니 처음부터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별의 존재 의미가 사라져버렸다.


여기까지만 알고 계시면 충분합니다.”


“저희가 뭔가 잘못한 건가요?”


소심한 직장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인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게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입니다.”


“와- 지구를 멸망시키러 왔다는 거네요. 그래서, 인류는 어떻게 끝나나요?”


“아무도 제가 여기에 있는 이유를 크게 궁금해하시지 않는 모양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선택권을 드리러 왔습니다. 지구를 멸망시킬 것인지, 아닌지를요.”


“에- 멸망 안 해요?”


“여기 버튼이 있습니다. 이 버튼을 누르면 여러분의 언어대로, 지구는 멸망합니다. 하지만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로 둔다면, 여러분의 세상은 지금과 같이 흘러갈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떤 발전이 있을 수도 있겠고, 다른 방식으로 멸망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멸망하지는 않습니다.”


사내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버튼을 꺼내 회원들에게 보여주었다. 휴대전화 반 정도 되는 사이즈의 판위에 동그란 버튼이 있고, 실수로 눌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인지 투명한 플라스틱 덮개가 덮여 있었다. 조악한 생김새였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에 생김새 같은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실험에 실패했다면서요. 왜 남겨두는 거죠?”


“파괴에도 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존재의 개념 자체가 다르니 여러분이 저희에게 영향을 끼치지도 못합니다. 어떻게 해도 별 의미 없는 행동이 되어버리니, 지성이 있는 존재들에게 자신들의 존폐 여부를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는 회의 결과를 도출했습니다.”


“누구랑 회의해요? 당신 말고 다른 신이 더 있나요?”


백수 여자의 얇고 가는 눈이 처음으로 동그래졌다.


“공정 실험 위원회에서 평화적인 토론 방식을 채택해 당신들 시간으로 약 1억 년 동안 결정한 사항입니다. 저는 그저 전령이기 때문에 회의가 어떤 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자세히는 모릅니다.”


“정말 저희 잘못은 아닌 것 같네요.”


소심한 직장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전달해야 하는 것은 모두 전달한 것 같습니다. 이 버튼을 누를 것인지 아닐지는 여러분이 결정해주시고, 행동까지 직접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현명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사내는 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회원들이 다른 질문을 할 새도 없이 사라졌다. 글자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는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한순간 사라져버렸다.


그가 앉아있던 자리에는 조금 전 보여주었던 버튼이 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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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모두가 버튼을 바라보며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기에, 자취방에는 골목을 돌아다니는 배달 오토바이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눌러볼까요?"


사랑에 실패한 남자가 무거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물어보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호기심으로 눌러볼 만한 장치가 아니라는 사실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듯했다. 아직까지 러시아 전통 춤을 추는 고양이의 충격이 채 가시기 전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질문을 시작으로 다들 기다렸다는 듯 각자가 가지고 있던 의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왜 질문할 수 있을 때 충분히 하지 못했을까. 그들은 조금 후회하고 있었다.


"그 사람들이 했다는 실험이 뭐였을까요?"

"저런 걸 왜 대통령 같은 높은 사람이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줬을까요?"

"저거 누르면 멸망이 어떤 식으로 올까요? 운석 충돌? 대지진? 지구 폭발?"

"아까 저 사람 사라지듯 한 번에 증발되지 않을까요?"

"막 터지고 아프고 그런 건 무서우니까 차라리 그러면 좋을 것 같아요."

"저걸 누른 순간부터 역병이 퍼져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어갈 수도 있잖아요. 신중해야 해요."


"아... 누르긴 할 건가요?"


백수 여자의 질문에 모두의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렇게나 원했던 지구의 멸망이 이렇게나 가깝게 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선뜻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 버튼을 누른다는 것은, 타인의 생명을 동의 없이 빼앗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


"왜 우리한테 이런 책임을 떠넘기는 걸까요... 부담스럽게... 지구 멸망했으면..."


소심한 직장인은 습관처럼 '지구 멸망했으면'을 말하고 나서 본인도 흠칫 놀란 눈치였다. 멸망은 이제 바란다면 실행할 수 있는 단계까지 가깝게 와 있었다.


"그런데 말이죠."


주인장이 말했다.


"저희 집 나비를 춤추게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 그냥 그런 초능력을 가진 초능력자가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요. 지금 투명 인간이 돼서 저쪽 구석에서 우릴 보면서 낄낄대고 있을지도 모르고..."


나머지 인원이 주인공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연거푸 겪게 되면 그보다 더 이상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법이다. 꼭 초자연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면서 마주치는 이상한 일들, 기막힌 우연을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지나갈 때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그 공간의 인원들은, 아닐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저 버튼을 누르면 지구가 멸망할 것이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냥 경찰 같은 곳에 맡기는 편이 좋을 것 같아요."


여전히 안정을 찾지 못하고 횡설수설하는 소심한 직장인이 이야기를 꺼냈다.


"경찰이 우리 말을 들을까요? 저거 보자마자 그냥 냅다 눌러버리면 어떡해요. 늘 하던 생각인데, 뒷일은 생각 안 하시고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기부터 하시는 것 같아요. 말씀하실 때도 늘 '~같아요'로 끝내시잖아요. 자기 말에 책임 안질라구."


"아니 회사도 안 다니시는 분이 무슨 책임 얘기를 하세요? 다니시던 직장 나오신 것도 자기 일 책임지기 싫어서 나오신 것 같은데..."


"말 다 했어요?"


"다 안 했어요. 그 나이에 고시공부를 하고 있다고 해도 노답인데 대기업 아니면 안 간다고 하면셔 별 노력은 안 하고 있잖아요. 주제에 중소기업 다니는 사람들은 은근 무시하고."


"당신처럼 책임지기 싫어하는 상사 만날까봐 안 가는 거야!"


"하하, 두 분 너무 예민해지셨네, 그렇게 사람 마음 다치는 말 하면 못써요~"


사랑에 실패한 남자는 어색하게 웃었다.


"기왕 분위기 이렇게 돼서 하는 말인데, 회원님 말하는 거 너무 느끼해요."


백수 여자는 남자를 쏘아붙였다.


그 순간, 남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피식- 하고 코웃음을 터뜨렸다. 당장이라도 주먹이 날아다닐 것 같던 분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말리려는 사람에게 비난을 날리는 것으로 싱겁게 무너졌다.


지구가 멸망하게 생긴 와중에 삶에 대한 태도와 직장의 유무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럼 일주일만 더 생각해 보고 다시 이야기해보도록 하죠."


사업에 실패한 남자가 제안했다. 지금 당장 이 사람들과 이야기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나올 것 같지는 않을 것이었고, 짧은 순간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터라 이 사람들을 집에 보내고 빨리 잠들고 싶은 마음에서 꺼낸 말이었다.


"그럼 이 버튼은 누가 보관하죠? 여기에 보관했다가 주인장님이 홧김에 눌러버리시면 어떡해요?


...


지하철 코인 로커 앞, 한 사람이 키오스크에 숫자 하나를 누르고 오면 다음 사람이 쪼로록 키오스크로 가 숫자를 누르고 돌아왔다. 그렇게 네 사람이 다녀오는 일을 두 번 반복하고 난 뒤, 네 사람은 17번 코인 로커가 제대로 잠겨있는지를 확인했다.


"한 달 정도는 보관이 가능하다고 하니까 다음 주에 사라질 일은 없겠죠. 네 명이 모여야 비밀번호가 완성되니까 누가 혼자 와서 빼가기도 힘들 거고요."


"그런데 이런 곳에 저렇게 위험한 물건을 두어도 될까요?"


"뭐... 어디에 있어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들은 자꾸만 코인 로커가 있는 지하철역방향을 돌아보면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각자의 방식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침대에 누운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확신했다.


일주일 뒤, 자신은 죽게 될 것이라고.



#5


정확히 일주일이 지난 저녁, 네 사람이 모여야 할 코인 로커 앞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소심한 직장인과 사랑에 실패한 남자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결국 도망친 걸까요."


"급한 일이 생긴 걸 수도 있죠."


"이것보다 급한 일이 있을까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죠. 어쩌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 아직 마무리 안 됐을 수도 있겠구요. 하고 싶은 것을 못 하는 게 한이었던 사람들이니까."


"아... 누르기로 결정하셨나 보네요?"


"회원님은 아니시구요?"


백수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는 것도 일종의 대답이라지만 그 의중을 파악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일주일 동안 뭐 하셨어요? 저는 집에서 고양이랑만 있었어요. 특별히 뭐 하고 싶은 게 떠오르지 않더라구요. 해야 할 것도 없구요."


"고양이... 그 이후로 춤춘 적 있어요?"


"아니오... 사실 며칠 전에 죽기 전에 고양이와 산책을 해보고 싶어져서 데리고 나갔는데요. 갑자기 제 품에서 뛰쳐나가서 어딘가로 사라졌어요. 뭐... 혼자서도 며칠은 살아갈 테니 같이 멸망을 맞이하는 셈 쳐야죠."


"하나도 안 슬퍼 보이네요."


"다 끝나는 마당에 무슨... 그렇게 혼자 집에 앉아있는데요. 어쩌면 나비가 죽기 전에 러시아 전통춤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서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코사크였나 그 춤이오? 오락실 테트리스 하면 나오는..."


"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나한테는 없어도 같이 사는 고양이한테는 있었을 수도 있잖아요. 고양이도 그날 대화를 듣기는 했을 테니까..."


주인장은 말끝을 흐렸다.


"저는 취직했어요."


"네?"


"그냥... 지금까지 취업 준비한다고 모아놓은 게 아까워서 이력서를 인사팀 여기저기에 뿌려 봤거든요. 그런데 여태 저를 쳐다도 안 보던 회사들한테서 갑자기 연락이 오는 거예요. 그것도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그래서 면접을 몇 곳 봤는데 제일 마음에 드는 곳에서 오라고 연락이 왔어요."


"가실 거예요?"


"모르겠어요. 아직 답장 안 하고 있어요."


"그렇군요."


"나머지 분들도 뭔가 마지막으로 한 일이 성공해서 나타나지 않는 것 아닐까요?"


과연, 그럴 수도 있었다.


사랑에 실패한 남자는 상대에게 거절의 확답을 들은 것이 아니라 혼자 일희일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제3자가 듣기에 그 관계는 썸이라고도 할 수 없는 관계였다.


소심한 직장인은 그럴듯한 이유와 직급으로 찍어버릴 수 있는 신입사원에게 쩔쩔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로 소심한 성격이 아니라면 스트레스받을 일도 아니었다.


어쩌면 한 번 시도해 보는 것만으로도 성공해서, 더 이상 지구의 멸망을 꿈꾸지 않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은 얄팍해서, 곧 죽을 것 같이 고통스럽던 문제도 일단 해결만 되면 그전까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곤 한다.


"그럼 이제 어떡하죠?"


"00부터 99까지, 100번만 시도하면 열 수 있잖아요."


"그걸 여기서 하고 있기에도 좀... 혹시 나중에라도 연락이 올 수 있으니 하루만 더 기다려보죠. 회원님도 멸망을 원하시지 않으시는 것 같구요."


"아뇨, 저는 아직 결정 안 했을 뿐이에요. 그리고 원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들도 나타나지 않았겠죠. 멸망을 막아야 하니까."


두 사람은 일주일 전처럼, 계속 뒤를 돌아보면서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주인장은 내심 괘씸했다.


나는 멸망을 생각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죽을 날만 기다렸는데 다들 그 새를 못 참고 자신의 행복을 찾아 떠났구나. 결국 나만 혼자 고통받는구나. 내가 마지막으로 한 일이라고는 고양이를 잃어버린 것뿐인데, 다들 무슨 힘이 생겨나서 그런 일을 한 걸까.


내일 백수 여자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혼자서 1000개 조합을 맞춰서라도, 반드시 버튼을 누르리.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어째선지 나비가 보고 싶었다.


한참을 뒤척이다가 겨우 잠에 들려는 순간

그를 찾는 전화 벨소리에 눈을 떴다.


"저희 17번에 넣은 거 맞죠? 지금 이거 열려있는데요..."



#6


17번 로커의 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그리고 안에 있어야 할 버튼은 온 데 간 데 사라졌다.


"한 달은 보관한다면서요. 어떻게 된 거예요."


뒤늦게 나타나 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한 소심한 직장인이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니 왜 약속시간에는 안 나타나고 새벽에 혼자 와서는 저희한테 짜증을 내세요. 어제 연락이라도 주셨으면 이런 일 없었잖아요."


"직장을 안 다녀서 모르시나 본데, 일이라는 게 원래 그래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까지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구요."


"그 상황에 일을 하고 있었어요?"


백수 여자의 작은 눈은 부어서 동그래지지 않았다. 주인장은 그 순간 이상하게도 그녀가 눈을 제대로 뜨고 있는 걸까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칸마다 다른 접수시간을 매일 관리할 수는 없어서 월 말에 일주일 이상 보관된 짐들을 일괄 처리합니다."


상담 시간까지 기다려 겨우 연결한 직원은 아직 덜 깬 목소리로 매뉴얼에 나와있는 대사를 그대로 읽어주었다.


"저희 쪽에서는 맡기신 짐의 행방을 바로 확인하기는 어렵고요. 분실물 센터에 물어보셔야 합니다. 지금 연결합니다."


더 이상 수화기를 붙잡고 있으면 높은 확률로 욕이 날아올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상담 직원은 주인장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분실물 센터로 전화를 돌렸다.


엘리제를 위하여가 한참 동안 연주되었다.


봉고차나 화물차가 후진할 때 이런 음악이 나오던데, 우리의 후진은 별 탈 없이 성공할 수 있을까. 초조해진 주인장은 휴대전화 모서리를 손톱으로 긁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엘리제를 위하여가 더 빠르게 흘러나온다거나 상담원이 더 빨리 전화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음.. 17번은 비어있어서 그냥 열어두기만 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다네요."


"혹시 정리하시는 분께서 짐이 아니라 쓰레기라고 판단하신 것은 아닐까요? 그거 그렇게 생겼어도 정말 중요한 물건인데..."


"뭐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사탕 봉지나 빈 캔 같은 것을 귀중한 물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잖습니까. 그럴 때는 직원분께서 임의로 처리하시고 비어있었다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만... 저희 직원들이 그렇게 물건을 아무렇게나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만에 하나 가능성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잖아요. 혹시 담당 직원을 연결할 수 있을까요?"


"아, 그건 저희 협력업체의 일이라 저희 쪽에서도 확인이 불가능합니다.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 정보에 해당되어서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아까는 저희 직원이라더니, 이제는 협력업체 직원이란다. 이 일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자꾸 빙빙 돌기만 하니, 더 이상 대화한다고 해도 얻어낼 것이 없을 것 같았다.


전화를 끊자마자 두 여자가 어떻게 되었냐고 캐물었지만, 버튼의 행방을 확인할 수 없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은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었다. 탓을 한다고 해서 버튼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주변의 쓰레기통도 뒤져보고 역 사무실을 찾아가 보아도 버튼을 본 사람도, 치웠다는 사람도 없었다.


그때 그 사내가 다시 가져간 걸까?

그래서 비슷한 다른 모임에 버튼이 주어진 걸까?

직원이 쓰레기라고 판단해서 지금쯤 매립지로 간 것은 아닐까?

그러다가 실수로 버튼이 눌러지게 된다면?

나타나지 않은 회원이 몰래 가져간 것은 아닐까?


수많은 가능성이 이야기되었지만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버튼의 행방도, 누가 눌러서 지구가 멸망하게 될지 아닐지도, 그전에 그 버튼이 정말로 작동하는 물건이었는지도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때 버튼이 보이자마자 눌렀어야 했는데...


주인장은 꽤 오랜 세월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사랑에 실패한 남자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남은 세 사람도 더 이상 모임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런데도 세상은 거짓말처럼 전과 같이 흘러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