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전화는 매일 밤 10시 30분만 되면 어김없이 걸려왔다.
그리고는 3초 정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다가 이내 통화가 종료되었다.
동철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업무상 전화를 돌리는 곳에서 내 전화번호가 섞여 들어갔고, 최신화가 되지 않아 매일 같은 시간에 전화가 걸려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업무상 받아야 하는 전화가 많은 동철에게 잘못 걸려오는 전화나 광고 전화가 걸려 오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한 번은 거래처에서 실수로 잘못 건 전화 덕분에 대화에 물꼬가 트여서 계약을 성사시킨 적도 있었으니, 누군가에게 전화가 걸려오는 것은 감사해야 하는 일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찾는다는 것은 그가 나를 떠올린다는 뜻이었으니까. 의도했든, 아니든.
그런데 그 전화는 몇 주 째 도무지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전화번호도 004615… 로 시작하는 이상한 번호였다. 번호는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다시 걸어보아도 없는 번호로 안내되었고,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 질문해보아도 해외에서 걸려오는 스팸전화니 그냥 차단하라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너 전 여친이 번호 안 뜨게 해서 연락하는 거 아니야?”
친구가 팔꿈치로 소주병 바닥을 치며 말했다.
술을 마시기 전에 소주병 바닥을 치거나 병 목을 쳐서 술을 약간 흘리는 행동은 술병의 마개가 코르크이던 시절에 만들어진 습관이라고 한다. 코르크 가루가 술병에 돌아다니니 바닥을 톡톡 쳐서 입구 쪽으로 보낸 뒤 내용물을 내보내는 것이란다. 그때의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소주 병만 보면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게 술자리의 문화 현상이라고.
이 이야기는 동철의 전 여자 친구가 그에게 해 준 이야기였다.
그래서 가끔씩 술자리에서 누군가가 소주병의 바닥을 때리면 문득 그녀 생각이 나곤 했는데, 친구는 그 행동을 하면서 굳이 전 여친을 언급까지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긴, 그런 이야기를 친구에게 해 준 적이 없으니 친구는 동철에게 그런 사연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나를 정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사실은 나의 감정을 잘 모를 때가 더 많다. 그래서 매번 혼자 기대하고 혼자 상처를 받는다.
“딴 놈이랑 눈 맞아서 한국도 떠난 애가 무슨 미련이 남아서 연락을 하냐?”
“그게 워낙 급하게 지나간 일이잖아. 뭐, 시간이 지나고 몸이 여유로워지니 너 생각이 날 수도 있지. 나도 가끔 첫 여친 생각이 난다니까? 그게 벌써 10년이 더 지났는데도.”
방금 네가 한 행동으로 인해 나는 반년 전 여친이 생생하게 생각났다는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하던 동철은 그냥 소주 한 잔을 더 마시는 것을 선택했다. 아직 그런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덜 취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술자리가 끝나도록 동철은 좀처럼 취하지 않았다. 친구에게 그 이야기가 하기 싫어서였을까. 그날 밤의 일이 너무 생생하게 떠올라서였을까.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야 취기가 올라왔다. 집까지는 지하철 두 정거장 거리였지만, 날씨도 선선하니 그냥 걸어가기를 선택했다. 첫 번째 역의 입구가 보일 때쯤 동철을 찾는 전화벨이 울렸다. 10시 30분이었다.
오늘 술판이 너무 빨리 끝났구나.
동철은 새삼 시간을 확인하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은수니?”
친구가 꺼낸 말 때문이었을까. 취해서였을까. 동철은 그 전화가 전 여자 친구에게서 걸려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 그녀를 찾고 말았다.
“.......”
전화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가 끊어졌다. 그런데 기분 탓인지 술기운 탓인지 평소보다 더 오랫동안 대기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 생각을 하면서 걸어오니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가 100m보다 가깝게 느껴졌다. 순식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에 들어와 씻고 정리하는 일은 너무나도 귀찮은 일이었다. 동철은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
꿈에는 그녀가 나왔다.
“동철 씨는, 연휴에 바쁜가?”
부장이 동철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리는 없으니, 이 말은 이번 연휴에 적어도 하루는 출근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사실 오늘 조금 더 집중하고 쉴 시간을 줄이면 마감일은 어떻게든 맞출 수 있는 사이즈의 일이지만 부장은 언제나 휴일에 출근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런 사항을 이야기할 때에는 늘 동철의 스케줄을 먼저 물어보았다. 뭐가 없다고 대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이기 때문이리라.
“어차피 야근할 거 오늘 좀 더 빡세게 하고 그냥 내일 쉬면 안 되나?”
동철의 동기는 저녁으로 주문한 김밥을 주워 먹으며 말했다.
“노총각이 쉬는 날 집에 있는 게 괴로워서 그래. 주말에 인스타그램 같은 거 들어가 봐. 죄다 데이트하고 있고 친구들은 자기 애들 사진 올리고 좀 잘 나가는 친구들은 해외 나가 노는데 저 사람은 놀 줄도 몰라서 방구석에서 우울해하고만 있을걸.”
선배는 황태 진액을 쪽쪽 빨아먹으며 말했다. 그의 여자 친구가 달여준 것으로, 처음에는 냄새가 역해서 못 먹겠다고 하더니 최근 몸이 나빠지기 시작할 때쯤부터 적극적으로 찾아먹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때부터 그가 말할 때마다 말린 황태 냄새가 섞인, 알 수 없는 고통의 향기가 전해져 왔다. 여자 친구는 이 냄새를 견딜 수 있는 걸까? 사랑만 있다면 괜찮은 걸까?
“그건 저도 마찬가진데요.”
동철의 말은 순식간에 공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다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굴릴 뿐이었다.
“그런데 부장님도 인스타 해요?”
침묵을 깬 건 동기였다.
“응 작년인가?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팔로우해서 봤더니 부장님이더라고. 그래서 나도 팔로우해서 봤는데, 가입하고 혼자 등산 간 사진 몇 개 올리다가 요즘에는 뭐 올라온 게 없어. 그래서 아- 해보려다가 안 하시나 보다- 했는데, 얼마 전에 내 여자 친구 사진에 좋아요를 눌렀더라고. 이게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확대해보려고 막 눌러보다가 두 번 눌려서 좋아요를 누른 것 같단 말이지.”
“어머, 그래서요?”
“그냥 그게 끝인데? 서로 모르는 척하는 거지 뭐. 아, 요즘은 인스타에 지금 활동 중이라는 거 뜨잖아. 그 좋아요 사건 이후에 부장님 계정을 모니터링해봤는데 쉬는 날에는 계속 활동 중이라고 떠 있던데? 주말에 할 일 없어서 계속 직원들 계정 보고 있는 걸지도 몰라. 조심해.”
“헐~ 소름. 계정 비공개로 바꿔놔야겠다.”
말없이 계정을 바라보고 있는 부장보다 부장이 쉬는 날에는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부하직원들에게 까발리는 당신이 더 악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동철이었지만 그냥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기의 계정이 비공개로 바뀌면 이제 그녀의 사진은 어떻게 봐야 하지.
그날도 어김없이 10시 30분에 전화벨이 울렸다.
그 시간까지도 일하고 있던 동철은 전화를 받지 않고 바로 꺼버렸다.
‘알람이야?’
사내 메신저로 그의 동기가 물어왔다.
‘아니, 그냥 매일 이 시간마다 전화가 오네.’
‘헉쓰. 스토커 같은 거 아니야?’
‘누가 나 같은 걸 스토킹 하냐 ㅋㅋㅋㅋㅋㅋ’
‘하긴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화는 싱겁게 끝났다. 조금 더 시적으로 대답했어야 했나. 동철은 괜히 후회하고 있었다.
‘아 근데 나 방금 부장님 자리에 서류드리러 갔는데, 부장님 지금 야구 보고 계심’
‘야구? 프로야구?’
‘ㅇㅇ 개 어이없지 않아? 그럴 거면 그냥 집에 가지 왜 저러고 있대?’
LG 트윈스가 12회 연장 접전 끝에 실책으로 경기를 내어준 시간이 11시 즈음, 그리고 LG 팬이라던 부장이 벌게진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시간은 11시 10분이었다.
"내일 보자."
공휴일인 내일 보자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홀연히 떠나는 부장의 뒷모습에 모두가 욕을 박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러는 사람이 없었다. 회사 생활이란 으레 그런 것이었고,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주 52시간이나 야근수당 같을 이야기는 어디 북유럽 복지만큼이나 멀게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나보다 더 많이 버는 사람부터 혜택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배가 아플 뿐이었다.
“그런데 아까 매일 온다는 전화, 예전에 오빠 때문에 회사 오고 했었던 그 사람 아닐까?”
회사 문을 닫고 나오면서 동기가 물어보았다.
동철이 깜빡 숫자 기입을 잘못하는 바람에 상대 회사가 몇천만 원을 날려버릴 위기에 처한 일이 있었다. 신기할 정도로 동철의 회사에는 타격이 없었지만 당시 그 회사는 사람이 몇 명 잘리네 마네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동안 회사에 책임을 지라며 상대 회사 사람이 찾아왔고, 동철이 보낸 문서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직원은 사장 뒤에서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곤 했었다.
따지고 보면 상대방도 문서를 제대로 확인해야 했던 상황이었고, 어찌어찌 상대방 회사도 큰 타격 없이 사건이 마무리되었기에 동철도 회사생활을 아직까지 잘하고 있지만 그 일을 계기로 그 회사와의 관계도 끝나버렸기 때문에 그 울 것 같던 직원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서 잘렸다고 해도 납득이 되고, 계속 다닌다고 해도 끝없는 괴롭힘을 당했을 것이다. 동철이 알고 있는 거래처 사장의 성격은 불같아서, 누구 하나 크게 화상을 입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정도로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 직원이 지금까지도 동철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라 해도 납득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그때 잘 해결됐었고 서로 피해 안 보는 선에서 끝났잖아.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고...”
“아, 근데 오빠 내일 몇 시에 나올 거야?”
별로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동기는 꼭 대화가 길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다른 화두를 꺼내곤 했다.
모처럼의 휴일이었지만 모처럼이라도 할 일이 없었다.
약속을 잡으려면 정확하게 쉬는 날을 알고 있어야 하지만 동철의 휴일은 늘 불규칙했다. 평일 저녁 약속을 못 잡는 것에서 시작해 점점 주말 약속마저 심심치 않게 깨지게 되면서, 종래에는 약속을 잡는 것 자체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휴일에 친구에게 연락한다 한들 약속이 없는 친구를 찾는 것이 더 힘든 일이었다. 애매하게 친하던 친구들은 이제 연락하기 애매한 곳까지 멀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철의 주말은 짧기만 했다. 밀린 집안일들을 처리하고 자신이 평일에는 보지 못하던 드라마나 영화를 몇 편 보고 게임까지 하고 나면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는 것이었다.
저녁을 먹고 소파에 누운 동철은 인스타그램을 켜서 친구들의 주말을 관망했다.
한참을 내려가다 보니 ‘알 수도 있는 친구’ 란에 정말 알 수도 있는 친구들의 얼굴이 등장했다. 그중 한 명은 중학교까지는, 꽤 친했던 친구였다.
중학교 시절의 동철은 지금보다는 유쾌하고 장난기가 많은 친구였다.
누군가를 괴롭힐 체격도 되지 않았거니와 그럴 심성도 없었던 동철은 주먹 서열 세우기 좋아하는 친구들에게서 아마 딱 중간 정도로 평가받았을 것이다. 싸워본 적도 없으니 무의미한 순위였지만 그 말은 주먹깨나 쓴다는 친구들이 괴롭힐 대상이 아니라는 반가운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철은 학생부에 앉아서 반성문을 쓰고 있었다.
친구가 동철의 괴롭힘 때문에 학교에 가기 싫다며 등교거부를 했다는 이유였다.
“저는 그 친구를 정말 괴롭힌 적이 없는데요?”
동철의 말에 선생님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동철이 어떤 방식으로 친구를 괴롭혔는지를 말해주었다.
평소 히어로물을 좋아하던 동철은 친구가 만화에 나오는 빌런 캐릭터를 닮았다는 이유로 그 친구에게 그 캐릭터의 별명을 붙이고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생긴 것으로 시작된 놀림은 행동으로까지 이어져서, 친구의 부끄러운 사건이나 행동에 의미를 부여해 만화 속의 일처럼 부풀려 말하게 되었다.
그런데 평소 친구에게 관심이 없던 친구들도 그 친구의 캐릭터를 만화 속 캐릭터와 동일시하게 되면서 모두가 동철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동철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친구는 아무것도 한 것 없이 모두의 악당이 되어 있었다.
그것을 농담으로 넘기기에 그의 나이는 너무 어렸다.
그 후 돌아온 친구와 서먹해진 동철은 친구와 이전보다 더 적게 대화했고, 반이 달라진 이후에는 저 멀리 보여도 못 본체 지나가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동철은 조심스럽게, 실수로라도 좋아요를 누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친구의 프로필 사진을 눌러보았다.
친구의 삶도 그리 즐거워 보이지는 않아 보였다.
조금 어둡게 찍힌 사진들, 셀카지만 카메라를 똑바로 응시하지 못하는 어색한 미소, 어설프게 적힌 철 지난 노래 가사들, 낮은 팔로워와 좋아요 수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누가누가 행복한지를 대결하는 전쟁 같은 소셜 네트워크 세계에서, 다들 행복한 척 글과 사진을 올리고 있지만 사진 주변에 잡히는 것들, 사진 아래쪽의 짧은 멘트에서 정말 행복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쉽게 느낄 수 있는 법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때 놀리지 않았다면 이 친구가 지금쯤 자신감 넘치는 인싸로 살고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고, 세상에 ‘만약에’라는 것은 없었다. 원래부터 소심한 친구였다.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폭발해 버린 것은 동철에게 있어도 꽤 큰 상처였다. 어쩌면 그 사건 때문에 동철의 활력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누워서 TV를 보다가 깜빡 잠든 동철은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는 전 여자 친구, 거래처의 사람, 중학교 동창 세 사람이 원탁에 앉아 회의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 전화를 걸고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동철은 분명 그 자리에 있었으나 동시에 없는 사람이었다. 마치 TV로 토론 중계를 보듯, 누군가가 말을 하면 그 사람을 쳐다보게 되고 이따금 세 사람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구도가 나오는 식이었다.
“저는 이 자에게 고통을 선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는 제가 첫 직장에서 경력을 채 쌓기도 전에 잘리게 만든 장본인이며, 덕분에 저는 재취업이 되지 않아 한참을 고생해야 했습니다.”
“꼭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전 여자 친구가 끼어들었다.
“이 사람은 분명 덤벙거리고 뭘 자주 까먹어서 기념일을 제대로 챙겨 본 적도 없지만, 그래서 저를 외롭게 하는 일이 많았지만 그 점을 이야기하면 분명히 미안해할 줄 아는 사람이었어요.”
“그건 당신이 결국 동철이를 차 버렸으니 죄책감에 하는 말 아닌가요?”
중학교 동창이 말했다.
“확실히 뭐 그렇게까지 나쁜 친구는 아니지만, 이 친구의 가장 큰 잘못은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누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모른다는 데 있겠죠.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시점에서, 이미 깊은 반성 같은 건 할 수 없는 것 아닐지…”
“천인공노 할 놈이구먼!"
거래처의 사람은 다시 한번 흥분했다.
‘나도 정말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동철은 이들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동철이 무슨 말을 하든 여전히, 그들의 동철에 대한 대화는 동철이 없는 채로 계속되었다.
‘그치만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당신들도 나에게 상처를 분명 주었는데 왜 나만 이렇게 죄인으로 살아야 합니까?’
“저는 그 인간 때문에 탈모에 걸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누군가의 죄에 피해를 입으며 살아갑니다. 그게 재수 없게도 저였을 뿐 아닙니까?’
“제가 그 사람을 떠난 건 그가 바빠서도 아니고 나빠서도 아니고 저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이에요.”
‘대화를 하지 않고 도망친 것은 당신들 아닙니까.’
“아직까지도 저는 그 시절의 꿈을 생생하게 꿉니다."
‘제발, 나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고 화를 내란 말이야!’
10시 30분이었다. 동철은 그를 찾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
TV 속에서는 맥주 광고 모델들이 동그란 테이블에 앉아 하하 호호 웃으며 잔을 부딪히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동철은 잠긴 목소리로 수화기에 대고 말했다.
“미안… 미안합니다.”
“.......”
여전히 아무 말이 없던 전화는 이내 끊어졌다. 기분 탓인지 잠 기운 탓인지 동철의 사과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오랫동안 대기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