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가 증발하는 나라에서, 갓생을 외치다

by 김명규

#1. 바다가 없는 나라의 슬픔


지도를 펼쳐보면 네팔은 숨이 막힐 듯한 형국이다.

위로는 거대한 용(중국)이, 아래로는 코끼리(인도)가 버티고 있다.

그 틈바구니에 낀, 바다 한 줌 없는 내륙국가.


내가 머물던 2015년 무렵, 네팔은 헌법 제정을 두고 진통을 겪고 있었다.

겉으로는 내부의 정치적 합의 문제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중국을 지지하는 정당과 인도를 지지하는 정당, 그리고 자주파 사이의 대리전 양상이었다. (내가 떠나고 얼마 후 비로소 헌법이 제정되고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당시 나는 제프리 삭스 교수의 책 <빈곤의 종말>을 읽고 있었다.

저자는 내륙국가인 볼리비아의 발전 가능성을 매우 회의적으로 묘사했는데, 책을 보면서 네팔의 현실이 겹쳐 보여 가슴이 답답했다.


바다가 없다는 것은 단순히 해변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물류의 동맥이 막혀 있다는 뜻이다.

모든 수입 물자는 인도의 항구를 거쳐 육로로 들어와야 했다.

운송비가 붙으니 물가는 상상 이상으로 비쌌고, 기름이나 가스 같은 필수 자원은 늘 부족했다.


옆 나라 눈치를 보느라 헌법 하나 마음대로 못 만드는 설움과, 바다 없는 나라의 고비용 구조.

이것이 '신들의 나라'라 불리는 네팔의 현실이었다.




#2. 100이 들어가면 1이 남는 기적(?)


이런 절망적인 구조 속에서도 수도 카트만두는 활기가 넘쳤다.

치안이 안정적이고 '히말라야'라는 확실한 마케팅 소스가 있어, 카트만두는 전 세계 NGO들의 집합소였다.

타멜 거리는 마치 서울의 이태원처럼 외국인과 다국적 식당으로 북적였다.


하지만 이 활기찬 도시의 이면에는 불편한 진실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UN 보고서의 통계 한 줄이 내 머리를 때렸다.


"네팔에 100의 원조 자금이 투입되면, 실제 수혜자에게 도달하는 것은 1에 불과하다."


나머지 99%는 어디로 갔을까?

복잡한 유통 과정, 정치인들의 개입, 지역 유지들의 통행세, 그리고 비효율적인 행정 비용으로 증발해 버린다는 것이다. 외부감사였다면 당장 '횡령'이나 '부정'으로 적발되어 프로젝트가 중단됐을 수치다.

투입 대비 산출 효율이 1%라니. 이건 망한 비즈니스다.

볼리비아도 비슷한 상황이라 제프리 삭스 교수의 비관론이 뼈저리게 이해가 갔다.


하지만 우리는 멈출 수 없었다. 이것은 비즈니스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니까.

99가 뜯기더라도, 그 마지막 1이 누군가의 입에 들어갈 쌀이 되고, 아이의 손에 쥐어질 연필이 된다면 프로젝트는 돌아가야 했다.


"0보다는 1%가 나으니까."

나는 이것을 '필요악'이라 부르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3. 물과 전기, 그리고 갓생


그 1%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일상생활에서도 전쟁이었다.

카트만두의 겨울. 하루 중 전기가 들어오는 시간은 고작 4시간 남짓.

우리는 '인버터'라는 배터리에 전기를 모아 근근이 버텼다.


문제는 물이었다. 상수도 인프라가 없어 물차를 불러 지하 탱크에 채운 뒤, 전기 모터로 옥상 물탱크로 올려야 했다. 그런데 전기가 안 들어오면 모터를 돌릴 수 없다.

전기가 들어오는 그 짧은 4시간 안에, 물을 올리고, 배터리를 충전하고, 밥을 해야 했다.

타이밍을 놓치면 씻지도 못하고 출근해야 한다.

샤워하다가 전기가 끊겨 비누 거품을 쓴 채 멍하니 서 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511993937_24387225224195245_6305634499773691722_n.jpg 물차를 불러 지하탱크에 물을 채우는 중


나는 이 척박한 환경에서도 소위 '갓생'을 살기로 마음먹었다.

주 1회 네팔어를 배우고, 새벽에는 '알리앙스 프랑세즈'에 가서 불어를 배웠다.

IMG_1973.JPG 네팔어 선생님의 주1회 과외


히말라야 산행을 위해 매일 운동도 했다.

카트만두의 숨겨진 식당들을 엑셀로 정리해 '맛집 지도'를 만드는 열정까지 부렸다. (후임에게 인수인계하고 왔는데, 지금까지 잘 이어져올지 모르겠다.)


물론 시련도 있었다. 도착 초기에 동료가 요리를 하다 불을 내는 바람에 왼발에 큰 화상을 입었다.

한 달간 꼼짝없이 누워지내며 미드 <프렌즈>만 2~3번을 정주행했다.

발등에 남은 흉터는 훈장처럼 남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네팔의 느린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웠다.


510651369_24385706181013816_2318989810429892163_n.jpg 왼발에 입은 화상




#4. 개발도상국 최적화 체질


그럼에도 나는 이 나라가 체질에 맞았다.

토요일이면 관광객이 없는 로컬 시장을 쏘다녔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 그곳에서 사람들의 표정을 구경하는 게 즐거웠다.

IMG_1322.JPG 카트만두 거리


음식도 입에 딱 맞았다.

네팔 주식인 '달밧따까리(Dal Bhat Tarkari)'는 밥(달), 국(밧), 반찬(따까리)으로 구성되어 있어 한국 밥상과 비슷했다.

IMG_1278.JPG 달밧따까리


동료들이 '물갈이'로 고생하며 설사를 할 때도, 나는 배탈 한 번 없이 멀쩡했다. (그건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거나 잘 먹고 탈도 안 났다. "회계사님은 전생에 네팔 사람이었나 봐요." 동료들의 농담처럼, 나는 생각보다 이 혼란스럽고 비효율적인, 하지만 사람 냄새나는 땅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패션은 더 가관이었다.

헐렁한 네팔 바지에 조끼를 입고 다니니, 네팔인 동료와 걸어가면 사람들은 나에게 네팔어로 말을 걸고 동료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나는 그 오해가 싫지 않았다.


영어가 안 통하는 로컬 시장을 헤집고 다니며 흥정을 하는 재미, 100원짜리 찌야(밀크티) 한 잔의 여유.

나는 지정학적 비극과는 별개로, 이 도시의 활기찬 생명력을 사랑했다.




#5. 크리스마스의 가짜 승려


그해 겨울이었다.

크리스마스 날, 나는 엉뚱한 기획을 했다. "예수의 생일에 부처의 탄생지를 가보자."


그렇게 룸비니(Lumbini)로 향했다.

당시 나는 편하다는 이유로 펑퍼짐한 회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세계 각국의 절이 모여 있는 룸비니 동산에 들어서자, 소풍 온 수백 명의 네팔 아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그들의 눈에 나는 영락없는 한국 승려였다.


"나마스떼!" 아이들이 몰려와 손을 내밀었다.

"No, I'm not a monk"라고 해명하려 했지만, 예수의 생일에 부처의 고향에서 만난 동양인 스님이라는 환상을 깨는 건 아이들의 동심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수백 명의 아이들과 일일히 악수를 했다. 거룩한 성지에서, 회계사 출신 가짜 스님이 아이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기묘한 풍경.

KakaoTalk_20260210_232855984.jpg 한국에서 온 승려로 오해중




#6. 1%의 기적을 확인한 시간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 나는 아껴뒀던 2주간의 휴가를 이용해서 카트만두의 한 고아원으로 향했다.

내가 프로젝트를 했던 히말라야 무구(Mugu) 지방 출신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99%가 증발해 버리는 부조리한 시스템.

하지만 그 좁은 바늘구멍을 뚫고 살아남은 1%가 바로 이 아이들이었다.

하루 종일 아이들과 뒹굴며 놀아주느라 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네팔에 머문 1년 중 가장 충만했다.


지금도 페이스북을 통해 성인이 된 그때 그 아이들의 소식을 본다.

제프리 삭스는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통계적으로 이 나라는 여전히 가난하다.

하지만 통계가 잡아내지 못하는 것이 있다.

별로 해준 것도 없는 나를 기억해 주는 아이들의 마음, 그리고 그들이 씩씩하게 자라 만들어갈 내일.


나는 그 1%의 가능성을 목격했기에, 나의 네팔 생활을 '성공한 투자'로 기록하기로 했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