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끝에서 온 아이들, 그리고 양복 입은 짐꾼

by 김명규

#1. 카트만두의 부촌, 그리고 낡은 건물


네팔을 떠나기 2주 전, 나는 카트만두의 한 고아원으로 향했다.

부유층의 저택이 즐비한 동네, 그 틈바구니에 낀 허름한 5층 건물.

그곳에는 4살부터 15살까지, 열다섯 명 남짓한 아이들이 살고 있었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무구(Mugu)랑 훔라(Humla)에 다녀왔어."

내 대답에 아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카트만두 사람들도 평생 가볼 일 없는 오지 중의 오지.

그곳이 바로 이 아이들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고향 흙을 밟고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경계심 많던 아이들은 금세 나에게 곁을 내주었다.




#2. 발전(Development)이 존재하지 않는 땅, 무구


네팔이 세계 최빈국 중 하나라면, 무구와 훔라는 네팔 내 75개(당시 기준) 지역 중 발전 순위 74위, 75위를 다투는 곳이다.

그곳은 '발전이 더딘 곳'이라기보다, 문명사회가 정의하는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가 닿지 않은 곳.


히말라야 산맥 위, 구름보다 높은 그곳에는 '도로'가 없다.

당연히 자동차도 없다. 유일한 운송 수단은 노새와 사람뿐이다.

노새조차 무거운 짐은 실을 수 없어, 건축 자재나 철근 같은 중량물은 오직 사람의 어깨로만 날라야 한다.


인터넷? 이메일 한 통 보내려면 위성 신호를 잡기 위해 온 동네를 돌아다녀야 한다.

전기는 해가 쨍한 날 충전한 태양열 배터리로 전구 하나를 간신히 켰다.

냉장고가 없으니 사냥을 해온 날은 마을 축제다.

고기를 보관할 수 없으니 그 자리에서 온 마을 사람이 둘러앉아 부위별로 나누어 먹는다.


밤이 되면 마을 중앙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흩어지는 삶.

그것은 가난이라기보다, 태고의 원시성에 가까웠다.


IMG_3207.JPG 모닥불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야기 나누는 중




#3. 해발 5,000m, 마늘을 짜 먹으며 버틴 시간


그 험준한 땅에서 나는 겸손을 배웠다. 아니, 철저하게 압도당했다.

어느 날, 마을과 마을을 이동하던 중이었다.


우리는 해발 5,000m 고지를 넘고 있었다.

수목 한계선을 훌쩍 넘긴 그곳은 동식물조차 살 수 없는 황무지였다.

풀 한 포기 없는 회색빛 자갈밭과 만년설만이 존재하는,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 같은 공간.


공기가 희박해지자 고산증이 덮쳐왔다.

머리가 핑 돌고 숨이 턱턱 막혔다.


나는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바로 튜브형 간 마늘.

고산병에는 마늘이 좋다는 민간요법을 믿고 가져온 것이었다.

나는 어지러울 때마다 튜브를 치약처럼 짜서 생마늘을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알싸한 마늘 향이 코를 찌르고 속이 쓰렸지만, 신기하게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플라시보 효과였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도움이 되었다.)

최첨단 고어텍스 등산복을 입고, 등산화를 신고, 입안 가득 마늘 냄새를 풍기며 헉헉거리던 나.


그때였다. 저 멀리 산등성이에서 현지인 두 명이 내려오는 게 보였다.

내 눈을 의심했다.

그들은 낡은 검은색 정장구두를 신고 있었다.

그리고 어깨에는 공사장에 쓰일 무거운 철근을 한가득 짊어지고 있었다.


"아니, 그 복장으로... 안 힘들어요?"

"아, 옆 마을 놀러 가는 김에 아르바이트로 철근 좀 옮겨주는 중이에요."


나는 살기 위해 마늘까지 짜 먹으며 기어가고 있는데, 그들에게 이 5,000m 산길은 그저 마실 나가는 산책로였고, 철근은 가벼운 용돈벌이 수단일 뿐이었다.

기능성 의류니, 고산병 약이니, 민간요법이니 따지던 내가 한없이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이미 문명을 초월해 있었다.




#4. 침묵의 바다, 라라 호수


무구 지역에는 라라 호수(Rara Lake)가 있다.

해발 2,990m에 위치한 네팔에서 가장 크고 깊은 호수.


호수 근처에서 하루 묵었는데, 그 풍경은 비현실적이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눈밭과 끝없이 펼쳐진 호수.

너무나 고요해서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DSC_1334.JPG 라라 호수와 롯지


하지만 그 평화는 긴장감을 동반했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그곳에서, 밤이면 야생동물이 롯지를 덮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했으니까.

그 아름답고도 가혹한 대자연. 아이들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5. 피로 맺어진 형제들


다시 카트만두의 고아원.

이 해맑은 아이들이 왜 그 먼 오지에서 이곳까지 왔을까.


사연은 비극적이었다. 과거 무구 지역은 마오이스트(친중 성향의 공산 반군)의 활동이 거센 곳이었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특정 정당 지지자들이 숙청당하는 사건이 있었고, 이 아이들은 그때 부모를 잃은 희생자들의 자녀였다.

고아가 된 아이들이 산속에 방치될 위기에 처했을 때, 희생자들과 인연이 있던 한 독지가가 아이들을 전부 데리고 카트만두로 탈출했다.


그래서일까. 4살 막내부터 15살 맏형까지, 이들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친형제보다 더 끈끈했다.

같은 고향, 같은 상처, 그리고 함께 살아남았다는 유대감.

서로가 서로의 부모이자 형제가 되어주는 그들의 모습은, 내가 보아온 어떤 가족보다도 단단해 보였다.


DSC_2202.JPG 고아원 회식 전 원장님의 한 말씀




#6. 야생화는 도시에서도 핀다


마을에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다.

외부인이 오면 30분 거리까지 마중 나와 북을 치고 피리를 불어주던 사람들.

환영의 의미로 이마에 빨간 티카를 찍어주고 하얀 천 카타를 목에 걸어주던,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만은 풍요로웠던 사람들.

해발 5,000m를 정장 차림으로 넘나드는 그 강인한 사람들.


화면 캡처 2026-02-21 003445.png 첫 번째로 방문한 마을 주민들의 환영식


아이들에게서 그 모습이 겹쳐 보였다.

부모를 잃고 고향을 떠나왔지만, 아이들의 눈빛에는 무구의 대자연을 닮은 생명력이 있었다.

좁은 고아원 방 안에서 서로 살을 맞대고 자면서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던 아이들.


문명과 단절된 세상의 끝 무구.

그리고 그곳에서 쫓겨나듯 도시로 온 아이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마늘 없이는 한 걸음도 못 떼는 나약한 나와 달리, 양복을 입고 철근을 나르던 그들의 아버지들처럼, 이 아이들도 척박한 도시의 삶을 씩씩하게, 아주 튼튼하게 건너갈 것이라고.


네팔을 떠나오던 날, 나는 아이들이 써준 삐뚤빼뚤한 편지와 선물들을 배낭 깊숙이 넣었다.

그것은 내가 네팔에서 받은 가장 비싼 환영의 카타이자, 내 인생의 가장 높은 곳에서 받은 수료증이었다.


IMG_3125.JPG 처음으로 받았던 카타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