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 마음이 머무는 소리

by 노정

가랑비, 마음이 머무는 소리


가랑비는 소리 없이 내리지만, 그친 뒤에는 오히려 만물의 빛을 또렷하게 드러나게 한다.


오늘 아침, 집 옆 운동장을 걷던 시간.

비가 지나간 자리마다 벚꽃 가지들은 맑은 물기를 머금은 채, 막 터져 나올 생명의 숨결을 품고 있었다.


비라는 존재는 참 신기하다.

내릴 때와 그친 후, 바라보는 시간과 장소,

그날의 기분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떤 날의 비는 투명한 유리창처럼 맑고,

또 어떤 날은 한없이 울적하다.

때로는 처마 끝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을 설치며 마음의 갈피를 놓치기도 한다.


비가 잠시 그친 운동장 위로,

15년 전의 기억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석사 논문을 마치고 내려오던 길,

지도교수님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무거웠던 마음이 환히 밝아지던 날이었다.

비는 제법 굵게 내리고 있었고,

나는 학교 앞 카페 창가에 앉아

온기가 서린 녹차라떼를 홀로 마셨다.


창밖에는 사선으로 긋는 빗줄기,

작은 뜰에는 물기를 머금은 꽃들이

저마다의 빛깔로 피어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사무치게 좋았다.


그리고 문득 생각했다.


이 시간, 이 풍경, 이 온기를

함께 나눌 한 사람이 곁에 있다면

더없이 좋겠다고.


그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빗물에 젖은 뜰의 장면과 벗이 없었던 아쉬움은 지금도 기억 속에 한 폭의 그림처럼 남아 있다.


하지만 오늘, 운동장에서 만난 비는 결이 달랐다.


벚꽃과 들풀을 깨우고, 마른 땅을 적시며,

세상의 묵은 먼지를 씻어내는 숨결 같은

지극히 맑고 투명한 비였다.


그 비 속을 걷노라니

내 마음도 함께 씻겨 내려갔다.

과거의 쓸쓸함은 잦아들고,

오직 투명한 평온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때, 최립의 <창평우후(倉坪雨後)> 시 구절이 떠올랐다.


農家得雨喜 / 농가는 비가 오니 기뻐하고

滿野叱牛耕 / 들판 가득 소를 재촉하며 밭 가는 소리 들리네

草色亦何事 / 풀빛이 새로워진 것이 무슨 대단한 일인가마는

幽人空復情 / 숨어 사는 이의 가슴은 괜히 다시 설레는구나


비는 누군가에게는 생업의 기쁨이 되고,

또 다른 이에게는 이유 없는 설렘이 된다.

오늘 내가 느낀 이 맑은 감정 또한

비 한 줄기가 건넨 다정한 인사였을 것이다.


비가 지나간 뒤, 세상은 더 또렷한 빛으로 다가온다.


15년 전 카페 창가의 나 역시

비를 보고 있었지만, 실은 비가 남기는 여운을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었는지,

스스로를 향한 다독임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벚꽃이 피어나기 직전의 가지 위로

가랑비가 스쳐 지나가고,

그 자리에 청명한 공기가 남았다.


비는 단순히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적시고, 기억을 깨우며,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소리를 꺼내놓는 존재다.


예전에는 그 순간을 함께할 벗을 갈구했다면, 지금은 이 순간 자체를, 그리고 맑아진 내 마음을 온전히 응시하는 내가 있다.


비는 여전히 악보 없이 노래하듯 내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만물의 기운은

조금 더 깊어졌다.


오늘 내가 걸었던 길 위에는

보이지 않는 생명의 선율이 흐르고 있었다.


그 기운을 온전히 느끼고 사랑할 수 있는 지금,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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