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1987’이 말하지 못한 것

‘1987’의 바깥에서 우리가 망각하고 있는 것

by 홍명교

영화 <1987>을 봤다. 정말 오랜만에 여유로운 저녁 시간이 생겼고, 돈이 한 푼도 없었는데 새해가 되니 통신사 마일리지가 리셋된 상태였다. 주위에서 <1987>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 탓도 있다. 이런 조건들이 되지 않았다면 한참 뒤에나 봤을지도 모르겠다. 그리 썩 내키진 않았던 이유가 뭘까? 20대 이후 내내 누적된 386세대식 서사에 대한 이질감과 거부감 탓일 게다. 영화 속 데모 장면이나 대학 풍경 등이 내게 엄청 낯선 문화는 아니지만, 2000년대 학번인 내가 겪었고, 현직 활동가로서 겪고 있는 어떤 것과는 무척이나 다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이를테면 내가 느끼기에 '386세대의 서사'는 그 세대만이 공유하는 어떤 정의감과 명예, 그리고 '부채의식'이 중심을 이룬다. 나 역시 그 정의감과 명예 지향에서 자유롭진 않지만, 386세대가 이야기하는 부채의식은 종종 거북스럽게 느껴지곤 했다. 부채의식 이면에 쉽사리 그것을 털어내고만 싶어하는 무의식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물론 '부채의식을 털어내선 안 된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니다. 평생 죄의식을 느껴며 살라는 말도, 물론 아니다. 그런 것은 결코 좋지 않다. 다만, 부채의식이 과연 좋은 '기억 방식'인지 의문은 남는다. 부채의식이란, '빚진 자'가 자신의 '죄'를 모조리 짊어지고 떠난 이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 죄책감 같은 것일텐데 대개 그런 감정은 자신이 '빚'이라고 상정한 어떤 것을 이루고나면 모조리 사라지거나, 혹은 완전한 부정의 경지에 다다라 '나는 할 만큼 했어! 이만하면 됐지 뭘'에 이르면 휘발된다. 그러니 부채의식은 먼저 떠난 이들이 죽음 혹은 헌신을 통해서라도 이루고자 했던 어떤 '못 다 이룬 꿈'을 마침내 달성하는 곳으로 안내하지 못 한다. 어서 그 감정에서 떠나고 싶을 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에 대한 평론은 단 하나도 읽은 바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섣불리 예단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한동안 찬양일색이거나 6월 항쟁에 대한 회고담, 자기 세대나 혹은 '시민들의 위대함' 등의 말들로 도배되지 않을까 싶다. 팟캐스트에 나오는 386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은 멋드러지고 격정에 사로잡혀 그때를 회고하고, 오늘날 '우리(라고 말하고 "너희 다음 세대")'가 숨 쉬고 있는 공기가 그때(1987년 즈음)의 뜨거움과 숭고한 죽음들 때문이라고 다시 한 번 소리 높여 외칠 것이다. 더러는 당시에 함께 했던 자신의 청춘시절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거나 부끄러운듯 부채감을 토로하기도 할테지만, 그게 그리 큰 차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박종철과 이한열의 죽음은 너무도 슬픈 일이고, 오래도록 기억하며 돌아봐야 하는 일임에 분명하다. 나 역시 이 희생이 남긴 어떤 유산 위에 서 있고, 그 후에 만들어진 사회운동의 토대 위에 서 있다는 걸 안다. 그런 탓인지, 아니면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오를 때 눈물을 주르르 쏟으며 영화관을 나와야 했다. 게다가 영화 <1987>은 대중영화로서 손색을 찾기 힘든 영화다. 스토리 라인, 만듦새, 연기, 미술, 촬영 등 거의 모든 면에서 그렇다. 하지만 이 영화를 매개로 한 대부분의 '후일담들'이 그렇게 좋기만 한 일은 아닐 게다. 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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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이 영화는 '1987년'의 한 단면, 즉 계급 없는 시민들의 저항, 노동자대투쟁 이전의 상황 중에서도 정치경제적 모순들을 제거한 어떤 상황만을 드러낸다. 한편의 정치드라마적인 외양을 띄고 있지만 정작 이 영화에서 어떤 정치적 함의나 반성, 비평, 이데올로기를 읽어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순진무구하고 아름다운 청춘들과 정의로운 '똥개'들의 투쟁이 빛날 따름이다. 물론 이는, '대중영화'로서 당연한 선택이기도 하다. 이에 대해 비판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런 한계를 생각할 필요는 있다.


둘째, 영화가 다루는 범위가 지극히 한정적이다. 결과적으로 6.29 선언으로 모든 것은 끝나고, 그 다음의 3개월은 보이지 않는다. 영화 제목이 '6월 항쟁'이었다면 모를일이지만, '1987'이기에 7~9월 전국을 달군 노동자들의 투쟁은 삭제된 것처럼 느껴질 뿐이다. 이는 <1987>만의 잘못은 아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지식인, 미디어들 역시 1987년의 서사를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에서 6.29 선언까지만을 다루지, 그 이후의 보다 광범위하고 끈질기며 계급적인 저항에 대해선 다루진 않는다. 당시에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6.29 선언을 ‘전 국민의 위대한 승리’로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있을 뿐, 그 다음의 치욕스러운 패배는 까맣게 잊곤 한다.


셋째, 1987년은 분명 '위대한 승리'였으나 그보다 더 치욕스러운 패배로 이어졌음을 잊는다. 모두가 생략하고 있지만, 당시 직선제 개헌에 의한 승자는 군부 독재의 계승자 노태우였다. 그 아름다운 이들의 죽음과 거대한 투쟁 이후 전두환 베프 노태우의 승리라니, 이보다 더한 치욕은 어디있을까? 영화는 이 '치욕'을 생략한다. 왜 그렇게 됐는가? 영화 속에도 등장하는 함세웅 신부나 김정남, 이부영 등 운동 진영 주류의 오판은 무엇이었나? 촛불 항쟁으로 박근혜 정권을 몰아내고 자유주의 정권으로의 교체를 이룬 지금, 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6.29 선언은 김대중과 김영삼 등 야권 정치인들과 민중운동 진영에게는 예상치 못했던 승리였다. 당시 항쟁에 참가했던 여러 조직들은 정세와 노선에 따른 상이한 인식으로 인해 꽤 짧은 시간 내에 여러 방향으로 갈라졌다. 이를테면 민주당은 ‘선거혁명론’을 내세웠는데, 그 안에서도 김영삼 계열은 여야민주화 공동선언을 전제로 해야 함을, 김대중 계열은 거국중립내각을 전제로 해야 함을 내세웠다. 운동 진영 역시 갈라지는데, 크게 보면 '군부독재 종식투쟁론'과 '군부독재 타도투쟁론'이 그것. 전자는 현재의 운동역량으로는 물리력으로 군부독재를 타도하는 게 불가능하니 선거에서 군부독재의 재집권을 저지하자는 입장이었고, 후자는 군부독재는 선거가 아니라 민중의 힘에 의해서만 타도될 수 있으므로 비타협적 반군부독재 전선을 강화하는 데 주력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런 지지부진한 논쟁 속에서 노동자대투쟁은 '야권'의 외면 속에서 전개됐다. 그러다가 결국 김대중은 탈당 후 출마를 선언하는데, 운동 진영은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론과 후보단일화론, 독자후보론 등으로 갈라진다. 여름을 달군 뜨거운 투쟁은 겨울이 되면 싸늘하게 식고, 6월 항쟁의 성과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운동 세력은 다양하게 갈라졌고, 노태우는 승리했다.


이를테면 우리의 고민은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이 처절한 투쟁 이후 어떻게 이런 치욕스러운 결과에 도달하게 되었나? 그 사이의 '망각'(노동자대투쟁)은 어떻게, 누가, 무엇으로 기억할 것인가? 우리는 이 스펙타클하고 아름다운 대중영화로 색칠되었을 뿐인 과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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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그럼에도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장면은 무엇인가 생각해봤다. 나는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가 끌려가듯이 영정과 분골함을 안고 떠밀리고, 또 슬프게 아들을 떠나보내는 시퀀스였다고 생각한다. 그 영화를 보며 2014년 삼성전자서비스 수리기사 염호석 열사의 시신이 장례식장에서 탈취되고, 화장터에서 탈취되었던 그 나날이 떠올랐다. 1987년의 탈취가 무소불위 군부독재 권력에 의한 것이었다면, 2014년의 탈취는 삼성 자본과 공권력에 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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